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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실체와 근거

- 단군조선은 실재로 존재하였는가? -

  

 

 

 

 

 

 

서 론

 

우리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檀君(단군)은 과연 실존 인물인가?

그리고 단군이 세웠다는 단군조선은 실재한 역사일까?

古朝鮮(고조선)을 처음 개국하고 우리민족의 최초의 국가를 형성하여 민족의 始祖(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단군에 대해서 탐구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왜냐하면 우리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고 이것은 우리의 뿌리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상고사를 보면 보통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맥을 이어왔다고 알려져 왔고 이 세 단계를 합쳐서 고조선의 역사라고 통칭해 왔다.

그런데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역사적 기록문헌에는 단군조선이나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매우 빈약하기 그지없다.

 

가장 오래된 문헌사료인 ‘삼국사기’에는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는데 삼국사기는 우리 상고시대부터 고대 삼국시대의 역사를 사실위주로 객관적으로 기록한 가장 중요한 正史(정사)인데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역사의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단군, 고조선 기록은 고려 후기인 1281년경에 쓰여진 ‘三國遺事(삼국유사)’에 비로소 처음 등장하는데 이책은 승려인 일연이 썼는데 주로 불교에 관계된 일화와 민담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기에서 빠진 역사사실을 보충해서 기록하였지만 정사인 삼국사기보다는 객관성이나 사실적 근거가 떨어지고 문헌사료로서의 가치가 낮은 야사다.

 

단군이라는 '인물' 에 대해 언급하는 최초의 기록은 바로 '삼국유사'이다.

현존하는 것들 중에 중국 사서까지 통틀어서 봐도 '삼국유사'가 바로 최초이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의 내용이 나오는데 천신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곰이 변한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내용과 단군이 BC 2,333년에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인데 내용 그대로만 볼 때는 신화적 성격이 상당히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처럼 단군이 우리의 민족국가를 최초로 건국한 민족의 시조라면 그 역사적 중요성은 상당히 크며 우리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인데 왜 ‘삼국유사’ 이전의 문헌사료에는 없는 것일까?

 

고조선을 개국했다는 BC 2,333년 이래 ‘삼국유사’를 기술하기 이전까지 무려 3,600년간의 긴 시간동안 기록에 없다는 것이 이해불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단군기록과 별개로 고조선에 관한 내용은 ‘삼국유사’이전 시기에도 중국의 고대사서에 종종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선 삼국유사 이전의 고대사서는 삼국사기를 제외하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므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삼국사기에도 단군조선 기록 없음)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까지의 과정에서 단군조선만 배제된 채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내용은 기원전부터 고대시대에까지 중국의 여러 사서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중국의 고대문헌에서 단군과 단군조선만이 기록에서 빠지고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 관련내용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원전에 쓰여진 산해경, 사기, 한서, 염철론등에 고조선 기록은 많이 보이는데 단군기록은 하나도 없다 주나라, 한나라 시대에도 중국은 고조선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는 사실을 이러한 중국 문헌사료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이것은 기원전의 중국에서도 단군을 역사적 실체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중국과 교류하던 고조선 관리들도 단군관련 정보를 중국측에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 고조선은 민족의 시조이자 국조인 단군의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시조로서의 단군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인가. 중국측 기록처럼 예를 중시하는 동방예의지국인 고조선에서 국조를 망각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차라리 그러한 인물(국조단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순리에 맞다

 

단군출현의 필요성

 

그렇다면 국조인 단군은 고려후기에 특별한 정치적 이유에 의해서 급조된 허구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란 의문이 생기는 것은 이때문일 것이다.

단군이 실재했던 안했던을 떠나서 단군은 어떤 시기에 민족의 국조로서 탄생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각도를 달리해서 단군이 실존인물인지의 여부보다는 단군이 민족의 시조는 아닐지라도 어느 특정시기에 어느 특정지역의 부족을 다스린 수장(수장의 호칭)이었을 가능성에 무게중심이 더 실린다.

즉, 단군이란 인물은 처음부터 민족의 시조는 아니었을 것이다.

단 특정시기인 고려후기에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 국난극복과 민족통합을 위해서 정신적 구심점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구심점이 바로 단군이라는 것이다 - 탄생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삼국유사’가 쓰여진 고려후기는 외침이 많았던 혼란의 시기였다.

몽고족은 중국을 집어 삼키기 위해 그 변방국가인 고려를 복속시켜 후방의 안전을 미리 다질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송나라와 친교관계에 있는 고려를 수없이 침략해 들어왔다.

 

고려는 국가적 자존심이 강한 나라이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계승하여 동방의 강국이었던 옛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패권적 야망을 갖고 있던 고려에 근본도 모를 북방미개인이라고 인식되던 야만스러운 몽골족이 침입해 들어왔고 여러번 국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고려는 국난극복을 위해서 정신적, 민족적 구심체가 필요했고 동북아의 적자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북저역의 정신적 구심체로 인식되던 단군이 國祖(국조)로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즉, 단군은 고려후기에 국난극복을 위한 정신적 구심점으로서의 필요성 때문에 탄생한 국조이고 그 당시 민족통합, 국가적 통합을 위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단군의 개념적 유래

 

 

단군은 만주 서남부의 일부지역(요동지역)을 다스리는 수장으로서 부족집단의 군장名稱(명칭)이었을 것이다.

특정인이라기 보다는 보통명사로서의 부족국가의 수장칭호였을 것이다.

선사시대에 단군이라는 수장이 다스리던 지역이 만주의 일부지역이었는데 후에 그 지역에 강력한 금속무기(청동기, 철기)로 무장한 강력한 권력집단이 들어오고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키면서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상당한 영역을 통솔하는 동북부의 대국으로 성장하는데 그 세력이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일개 부족에서 시작해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시키면서 만주 서남부와 그 주변지역을 장악하는 패자가 되었는데 당시 수많은 이질적인 부족들로 구성되어 부족간 알력이 심했던 상황에서 정치적인 통일체로 통합하기 위해서 그 지역에 전승되어 오던 단군이란 전설적인 인물을 국조로 삼아 정치적인 통합을 도모했던 것이다.

즉, 단군은 고조선의 실재인물이라기 보다는 고조선의 성립하는 과정에서 부족집단간의 이합집산이 심했던 시기에 정치적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승되어 오던 인물을 수장의 명칭으로 삼아 통합의 구심체 역할을 하던 상징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고대국가 성립 초기부터 단군이 부족통합의 상징적 군장으로서 존재했었다고 본다.

 

단군, 환인, 환웅의 어원

 

 

또한 단군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군에 관한 유일한 근거인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세 명의 주인공인 환인, 환웅, 단군을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桓因(환인)은 단군의 할아버지이면서 단군의 아버지인 桓雄(환웅)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낸 하늘을 다스리는 천신, 하느님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환인(桓因)의 어원을 살펴보자.

고대 인도의 신화를 모아놓은 책인 리드베다를 보면 Sakrodevenam Indra라는 神이 있는데 농사를 주관하고 비를 뿌리는 신인데 후에 이 Sakrodevenam Indra를 비롯한 고대 인도의 토착신들이 대부분 불교의 신으로 흡수되었고 이러한 신들이 불교가 성행했던 중국과 고려시대에 우리 불교에도 전래되었는데 Sakrodevenam Indra를 한자를 빌어써서 釋迦帝桓因羅(석가제환인다라)로 음차하였고 이것이 불교식 용어로 굳어졌다.

 

단군신화의 환인은 바로 여기에서 桓因만 따온 것이다.

釋迦(석가) - 하늘의 임금, 하늘을 다스리는 전지전능한 신, 고려시대 유행한 용어

桓因(환인) - 하늘님, 천신, 고려시대 유행한 불교용어

羅(인다라) - 인도의 천신, 하느님

즉, 환인(桓因)은 불교의 신인 Sakrodevenam Indra를 한자로 음차만 빌려쓴 불교식 용어로서 天神(천신)을 의미하는데 원래 어원은 인도의 천하를 주관하는 최고의 신인 인드라신에서 유래된 것이다. 환인(桓因)은 인도의 최고의 신 인드라신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환인(桓因)은 천신을 뜻하는 불교식 용어로 고려시대에 붙여진 것을 알 수 있다.

桓雄(환웅)은 환인의 아들로서 환인(桓因)에서 桓을 빌리고 웅녀와 혼인하는 남자로서의 수컷雄자를 붙여서 환웅(桓雄)으로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檀君(단군)의 어원을 보면 몽골에서 무당이란 뜻인 텡그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 텡그리를 한자로 쓰면 檀君이 된다.

즉, 檀君(단군)은 몽골의 텡그리를 음만 빌려쓴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檀君은 한자의 뜻은 의미가 없고 음차만 한 것이다.

檀君(단군)은 실재했던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고대국가 건설초기에 여러 부족들이 분열과 통합하면서 초기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왕이 되었던 지도자 호칭인데 선사시대에는 제사장이 부족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 제사장격인 단군은 부족집단의 정치적 리더 내지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러 부족들간에 통용되는 군장호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렇게 선사시대부터 통용되던 귄위의 상징인 단군을 나중에 후대의 사람들이 민족통합을 이루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국조로 둔갑시켜 신격화한 것이다.

 

단군조선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

 

재야사학자들이 단군을 실존인물로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로 드는 것이 중국의 산동성 가상현에 있는 무씨사당의 석실 그림이다.

무씨사당은 중국 한나라시대인 147년에 제작되었는데 이 무씨사당의 후석실에 제2석과 제3석에 각각 그림1과 그림2가 있는데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이 석실 그림을 환인, 환웅등이 나오는 단군신화를 묘사한 그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개의 석화중 제 2석의 그림 1은 환인과 환웅이 나오며 특히 환웅이 날개달린 마차를 타고 하늘에서 태백산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며 제 3석의 그림 2는 풍백, 운사, 우사가 묘사되었다고 하여 이 그림들을 조합하면 단군신화의 내용에 들어맞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김재원의 ‘단군신화의 신연구’)

이를 근거로 삼아 고조선영역이 만주는 물론 요서지방을 지나 산동반도 일대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무씨사당의 벽화를 좀 다른 각도에서 냉정하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림 1에 남자형상과 여자형상이 나오는데 여자형상은 중국신화인 서황모 여신이고 남자형상은 서황모 여신이 나중에 남자신으로 변모하는데 그 남자신인 동황모라는 것이다. - 재야사학자측에선 여자형상을 환인의 부인이라고 해석하는데 그러면 환인의 부인에 대해서는 왜 단군신화에선 언급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환웅이 날개 달린 마차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묘사되었다고 하는데 그 마차를 탄 인물이 - 환웅이라고 문자로 표시한 것도 아니고 - 환웅이라는 직접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중국에도 신화는 무수히 많기 때문에 복희씨, 신농씨, 여와씨, 황제등 이 그림을 대입시킬 수 있는 신화는 얼마든지 있으며 또한 부여신화에서도 부여 시조인 해모수도 천제의 아들로서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그 내용도 이 그림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단군기록에 대한 두 번째 근거로 드는 것이 고구려의 각저총 고분 벽화이다. 여기에는 씨름하는 두 명의 역사 곁에 있는 큰 나무 아래 좌우에 곰과 호랑이가 짝을 이루며 등장하고 있다.

곰과 호랑이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를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다른 해석에 의하면 이것은 황제와 치우의 싸움을 묘사한 것이고 호랑이는 난폭한 치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고대의 벽화 그림은 구체적인 문자 설명이 없기 때문에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해석이 더 객관적 근거를 잘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민족적 정서에만 기대어서 우리의 역사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금물이

다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 남들도 인정할 수 있는 타당성있는 객관적 근거 내지 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군에 대한 또다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과 단군사당인데 이 참성단과 단군사당의 건축양식을 세밀히 조사해본 결과 조선후기에 지은 양식임이 밝혀졌다.

 

단군조선에 대한 사료적 근거

 

즉 이 단군사당은 당대에 지어진 것도 고대에 지어진 것도 아닌 훨씬 후대인 조선시대때에 지어진 것인데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는 단군을 국조로 떠받드는 민족이념 - 국조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는 민족이데올로기가 형성되고 강화되었던 시기 - 이 가장 강했던 시기였음은 많은 문헌사료에서 이미 밝혀진바 있다.

그 근거로 고려후기의 ‘삼국유사’ ‘제왕운기’와 조선전기에 쓰여진 서거정의 ‘동국통감’등에서 단군을 명백한 민족의 시조로 숭배하는 내용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즉, 단군은 당시대나 고대국가시기에서 중세까지는 국조대접을 전혀 받지 못하다가 -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어쩌면 우리의 직접조상이 아니기 때문에 - 고려후기인 AD 13C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민족시조로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다.

 

이렇게 고려후기에 와서 국조로서 제창되고 난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확보한 지배세력들이 자신들의 정권찬탈로 인한 민심이반을 막고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국명을 조선(고조선의 적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으로 정하고 조선성립 직후 흉흉하고 혼란스런 민심을 수습하고 민족통합을 이루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전승설화에 불과한 단군을 국조로 재탄생시켜 민족을 결집시키고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단군에 대한 내용은 13C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최초로 쓰여진 이래 7년 후에 쓰여진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조선시대에 쓰여진 ‘동국통감’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동국여지승람’에 연이어 계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분명한 것은 단군에 대한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은 1281년에 쓰여진 ‘삼국유사’이고 나머지 사료들의 단군기록은 이 ‘삼국유사’를 보고 모두 배껴쓴 것들이다.

上記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내용은 고려후기 ‘삼국유사’에 처음 기록된 내용인데 그러면 고조선 성립후부터 3.600년 동안 왜 국조라고 하는 단군을 전혀 기록하지 않았을까?

 

고조선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의 기록에도(삼국사기의 기록) 단군에 관해서는 국조는 커녕 단 한 줄의 기록도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상고시대와 고대역사를 많이 기록한 중국의 5대 정사, 25대 정사에도 전혀 기록이 없다.

그리고 고려중기까지 삼국사기를 비롯한 그 어떤 사료에도 단군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있다가 13C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삼국유사’에 출현한 것이다.

단군이 활동했던 시기와 고조선 시대에는 기원전의 시대로 우리나라에 문자(한자)가 전래되기 이전의 시대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자가 전래되고 기록이 보편화된 시기인 삼국시대에는 왜 국조인 단군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삼국시대에도 명백히 삼국 각나라가 역사를 기록하였다.

 

고구려는 신집, 백제는 서기, 신라는 국사라는 역사서가 존재하였고 이 사서들을 구삼국사라고 하는데 이 사서들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 전래되지 않고 있지만 없어진 3대 사서들의 내용을 볼 수 있는 또다른 사서가 있다.

그것이 바로 1145년에 김부식이 쓴 ‘三國史記(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는 김부식과 10인의 학사들이 구삼국사(신집,서기,국사)등을 보고 옮겨 적은 종합역사서이다.

서문에서 김부식은 구삼국사와 중국의 정사들을 참조해서 ‘삼국사기’를 기술했다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구삼국사의 근거

 

‘삼국사기’ 본기에 고구려가 10편, 백제가 6편, 신라가 12편이 있어 삼국의 내용을 엄청난 분량으로 가득 채워넣고 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은 사실상 당대에 쓰여진 구삼국사의 내용을 중국의 사료를 추가해서 그대로 옮겨 기록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들의 어디에도 단군기록은 누락되어 있다. 이것은 삼국시대에는 단군이라는 존재를 국조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단군이 실재했던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삼국과는 전혀 무관한 존재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삼국들은 그시대에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상황에서 각자 다른 정통성과 전통을 갖고 있어서 통일적 구심체가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만주의 한쪽 귀퉁이에 위치한 일개 부족집단의 수장이었던 단군이 삼국에게는 정치적 연관성이나 연고가 전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동명성왕’편에 내용을 보면

‘북부여에는 스스로 天帝(천제)의 아들이란 칭하는 해모수가 도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래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망명해 졸본촌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개국하는 과정의 내용이다.

‘주몽이 비류수가로 올라가서 사냥하다가 비류국에 이르러 비류국왕 송양을 만났는데 송양이 말하기를 ‘과인이 바다의 한구석에 치우쳐 있어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다가 오늘 만나서 다행인데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묻자 주몽이 대답하기를 ‘나는 天帝(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국가를 열었다’고 하니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 노릇 하였다 땅이 협소하여 두 왕이 다스릴 수 없으니 나라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그대가 나의 부하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자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그대보다 더 우월하다’라고 말하며 주몽은 그와 더불어 말다툼을 하고 또 서로 활을 쏘아 재능을 겨루었는데, 결국 송양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 주몽왕이 비류국의 송양왕과 영토를 놓고 정통성을 내세우며 다투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주몽이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다’라고 누누이 밝히는 부분이다.

여기서 드러난다. 주몽의 고구려는 단군조선이나 단군조선과 맥을 같이 하는 권위와는 전혀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해모수도 천제의 아들로서 묘사하고 있다. 주몽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해모수도 천제의 아들, 주몽도 천제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고 환웅이 천제의 아들이라든지, 단군이 천제의 손자라든지 하는 기록은 전혀 없다.

단군신화에서는 천제의 아들은 당연히 환웅인데 여기서는 천제의 아들은 주몽이라고 밝히는 것은 환웅과 단군에 대해서는 고구려 사람들은 전혀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전혀 고조선에 대한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주몽왕에 대한 찬사는 존재해도 민족의 국조라는 단군에 대한 찬사는 단 한마디도 없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고조선과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본기, 신라본기에도 단군과 고조선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고구려인 스스로가 기록한 광개토대왕비나 모두루묘지명을 살펴봐도, 주몽왕에 대한 경배는 있어도 단군에 대한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조차 않는다.

이렇게 ‘삼국유사’에 단군내용이 처음 등장하기 전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와 고려 중기까지 단군은 전혀 국조로서 인식을 하지 않았었고 기록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었다.

이것은 단군이 실재했던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집고 넘어 가야할 부분이 하나 있다.

단군이 실재했는지 여부와 단군설화가 존재했는지 여부는 별개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단군은 실존하지 않았지만 그당시에도 단군신화는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구전(口傳)으로 전승되어서 민간에 떠돌던 설화(說話)이다.

 

단군신화의 탄생배경

 

이 전승설화가 오랫동안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고려후기에 와서야 국난극복과 민족결집의 필요성 때문에 가공과정을 거쳐 국조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만주의 한귀퉁이의 일개 부족의 수장인 단군이 재편집 과정을 거쳐서 민족시조로 재탄생되면서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정신적 지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그런 부족집단은 존재하였을 수 있지만 그 집단이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고 단지 북방민족의 한 일파였을 것이다. 이것이 가공과정을 거쳐서 국가위기를 맞아 민족결집의 상징으로 좋은 소스로 제공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민족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단군을 고구려와 백제, 신라인들이 인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기록할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고대 정사인 ‘삼국사기’에 고조선과 단군관련 내용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딱 두 줄짜리 관련 내용이 존재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조에(高句麗本紀 5 - 東川王 21年)

二十一年, 春二月, 築<平壤城>,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

‘동천왕 21년 2월 21일에 평양성을 건축하였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왕검의 택지였다’ ‘누군가 왕의 도읍을 왕검이라고 한다’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 조선의 유민이 6촌으로 나눠어 살고 있었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단군, 고조선 관련 유일한 기록이다.

당시 12C 삼국사기 저술가들이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왕검의 택지(도성)였다’라는 얘기를 촌로한테 들었다는 내용인데 12C 당시에도 민간에는 단군관련 설화가 민간에 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고려 중기이전부터 아마도 고대로부터 계속 전승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검증할 수 없는 민담이나 신화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객관적인 사료만을 기술하였던 ‘삼국사기’의 저술가들은 황당한 내용의 단군신화를 기록에서 배제한 것이고 더욱이 단군신화의 근거라고 하는 중국사서 ‘위서’에도 전혀 단군관련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민간에 떠돌던 전설을 기록할 가치를 못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단군신화’는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위주로 기록된 ‘삼국사기’에서 배제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후 140년후에 쓰여진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이 개인의 신분으로 기술하였고 민담과 신화가 엄청 많이 수록되었는데 국가관리 차원에서 왕명으로 사명감을 갖고 쓴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삼국유사’는 일연이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기술하였기에 검증할 필요도 없었고 또한 개인의 사사로운 문집이므로 민담과 설화가 많이 포함된 것이고 ‘단군신화’도 그러한 여러 민담중에 섞여

채록된 것이다.

이렇게 민간에 떠돌던 민담과 설화위주로 쓰여진 개인의 사사로운 문집인 ‘삼국유사’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한 일이다.

더욱이 3600년간이나 기록에서 배제되었고 중국의 수많은 정사에도 없는 단군조선을 역사적 사실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전라도 지방에서 무당이 굿하는 것을 당골이라고 부른다.

무당을 당골 또는 당골무당이라고 하는데 이 당골은 단군의 고대음가인 것이다. 즉 단군은 원래 무당이라는 의미이다.

상고시대에는 무당 내지 제사장은 대단히 높은 권위를 가진 존재였었고 한 부족집단의 지배계급이었는데 이렇게 상고시대에 보편적인 권위의 상징이었던 제사의 주관자인 단군은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제사장이면서 군장을 뜻하는)권위의 상징으로서 구전으로 전승되어 내려오다가 후대에 국난의 위기를 겪으면서 민족결집이라는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가공과정을 거쳐 국조의 개념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단군이 꼭 실존인물일 필요는 없다.

단군은 민족통합과 결집을 위한 정신적 구심점이고 정신적 지주이다.

국난 위기를 맞을때마다 큰 힘을 발휘하는 민족의 구심체역할을 하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의미가 더욱 크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무당들은 단군을 시조신으로 믿는다. 무교에서 전수되는 책에는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단군은 당골, 텡그리라고 불리우던 선사시대의 제사장이면서 샤머니즘(무속신앙)의 시조로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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