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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 여행하기, 삼한지테마파크, 반남고분군




나주관광은 구경거리가 유독 많아 알찬 관광을 즐길 수 있다.

 ‘주몽’ 드라마 촬영지인 삼한지테마파크와 반남고분군을 방문하면 삼국시대의 고풍스러운 성곽유적과 풍속들, 그리고 이집트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고분들 감상으로 신기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으며 영산강변에 있는 천연염색문화관에서 직접 염색과정을 체험해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으며 영산포천창에서는 홍어맛집이 널려있어 다양하고 싱싱한 홍어요리를 맛볼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 나주 장소별 관광코스 소개



▶ 삼한지테마파크


나주관광에서 빼놓을 수없는 코스가 바로 삼한지테마파크로서 몇 년 전 드라마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주몽’의 세트장으로 나주관광에서 명소라고 할 수 있다. 삼한지테마파크는 나주시 공산면 신곡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드라마 촬영세트로 지어진 크고 우람한 동부여성과 고대 삼국시대의 가옥과 풍습을 재현해놓은 거리와 각종 세트들이 고풍스러우면서도 많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사적인 명물로서 인기가 좋다.



7m 높이의 동부여성, 철 생산 광산, 고구려 기와집 거리, 초가집 거리, 운치있는 해자와 성문 등 현대도시생활에서 결코 볼 수 없는 신기하고 고풍스러운 볼거리로 용인민속촌 이상의 구경거리를 제공해주며 총 크기가 14만9000m2에 이를 만큼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해자성문은 우리나라 성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형태를 하고 있고 성문 왼쪽으로는 철기 제작소가, 오른쪽으로 졸본 부여성이, 앞쪽으로는 초가 거리가 이어진다.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 전의 삼국시대로 되돌아간 야릇한 느낌과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어가 보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관람 시간 09:00~18:00. 관람료는 어른 3000원, 어린이 1000원이다.


▶ 천연염색문화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영산강변에 있는 천연염색문화관은 300m2 규모로, 2006년 9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1층에서 염색에 사용되는 염료를 구경할 수 있으며 2층에서 쪽 염색 과정 등을 감상할 수 있으며 1층 왼쪽 상설전시∙판매장을 보는 동선이 좋다. 관광객들을 위해서 염색체험 과정이 준비되어 있어서 직접 손수건을 비롯한 염색 체험이 가능하다.

관람 시간 09:00~18:00 (동절기 17:00). 관람료 없음, 천연 염색 체험료 4000~2만원선. 체험 예약 필수.


▶ 김춘식 공방


나주시 보산동에 위치한 김춘식 공방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4호 나주반장 김춘식 선생의 작업실이다. 김춘식 선생은 해주반, 통영반과 함께 명품 상으로 손꼽히는 나주반의 맥을 이어오는 장인이다. 나주 부채 ‘남평선’ 중 곡두선 체험이 가능하다. 예약 필수, 체험료는 2만원 



▶ 완사천



나주시청 앞에 위치한 완사천은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가 만났던 곳으로 당시 후백제의 견훤을 공격하기 위해서 왕건이 이지역에 진출해 내려왔는데 이 완사천 앞에서 왕건이 당시 금성(나주) 토착세력의 딸인 오다련의 딸(장화왕후)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녀가 버들잎을 띄워서 물바가지를 건넨 곳으로 유명하다. 샘가에는 나중에 장화왕후가 되었던 그녀의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 반남고분군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일대에 있는 반남고분군은 마치 이집트의 작은 피라미드를 연상시킬 정도로 수십개의 독무덤이 고분군을 이루고 있어 이국적인 정취와 정경을 자아내고 있는 곳이다. 이 반남고분군에서는 금관이나 칼, 장신구들이 수백점 발굴되어서 화재가 되었던 곳으로 삼국시대 이전의 이지역을 관할했던 마한 지배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미산을 중심으로 반남면 덕산리∙ 신촌리∙대안리∙흥덕리 등에 봉토 고분 40여기가 분포되어 있다. 고분군의 형태도 원형, 머리를 자른 피라미드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큰 것은 지름 40m, 높이 6m에 이를 정도로 장엄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이지역에 정착했던 고대세력이 왕국에 버금가는 세력권이었음을 짐작케한다.


▶ 영산포선창, 영산강 등대



봉토 윗부분에 독널을 묻은 독무덤이 일반적이다. 반남고분군은 4세기부터 5세기 말경까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24시간 개방되며 관람료는 없다. 반남 고분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여행객이라면 가까운 곳에 있는 영산포역과 영산강 등대를 찾아가 60, 70년대의 정취와 분위기에 젖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홍어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영산포선창에서 감칠맛 나는 홍어회도 맛보는 것도 또다른 관광의 묘미다. 흑산도에서 진상하는 홍어가 도착하던 영산포 선창 주변에 홍어거리가 있어서 홍어회, 홍어무침, 홍어찜 등 다양한 홍어요리를 실컷 맛볼 수 있는 홍어맛집이 많이 산재해 있다. 매년 4월 25일에는 영산포선창에서 홍어축제가 열릴 만큼 이곳의 홍어요리는 맛좋기로 소문난 지 오래되었다.

또한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등대가 있는 영산강변은 트레킹 코스로로 적당하다.


▶ 나주배박물관



나주시 금천면 석전리에 위치한 나주배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배박물관으로 배 모양과 종류, 배 만드는 과정을 감상할 수 있으며 배꽃을 주제로 한 한시와 현대시를 접할 수 있다.


관람 시간 09:00~18:00(동절기 17:00), 연중무휴. 입장료 없음. 수확 체험은 10월 10~30일. 가족 단위 체험은 토요일 오전에 한하며, 4인 가족 기준으로 선착순 20가족만 가능.

체험료 1만원. 예약 필수.



♣ 나주 장소별 교통코스

여행 코스 : 서해안고속도로 무안 IC - 1번 국도(나주 방면) - 23번 국도(나주 방면) - 삼한지테마파크 - 23 번 국도 좌회전 - 801번 지방도 좌회전 - 1번 국도 우회전 - 천연염색문화관 - 좌회전 - 구진포 장어거리 -

1번 국도 우회전 - 나주반장 김춘식 공방 - 1번 국도(나주 시내 방면) - 완사천 - 나주 매일시장(남평식당) -

23번 국도 - 821번 지방도 - 반남 고분군 - 나주 시내 - 1번 국도 우회전 - 나주배박물관 - 1번 국도(나주 방 면) - 13번 국도(광주 방면) - 광산 IC

연계 코스 : 093(무안) 코스와 연계해 1박 2일 여행이 가능하다. 나주 기행을 가을에 실시한다면 함평의 용천사 꽃무릇이나 장성의 백양사 단풍 감상을 추가하는 것이 좋다.


♣ 축제∙행사 정보

페어데이 및 해맞이 - 새해엔 ‘배(pear)’로 나누고 ‘배(double)’로 거두라는 뜻. 1월 1일.

나주영산강문화축제 - 매년 10월.

나주시청 문화관광과 www.영산강축제.kr


♣ 숙박∙식당 정보

천연염색문화관 체험동 2층에 가족 체험객을 위한 숙소 4개와 단체 숙소 2개가 있다. 숙박료 3만원. 예약 필수.

중흥골드스파&리조트 - 나주호 근처. 한실과 양 실, 골프장, 물놀이 시설‘워터락’구비.

리츠칼튼모델 - 시청 근처. 숙박료 3만원 선.

금붕어민박 - 나주시 다도면 소재. 다양한 금붕어 사육장 구경. 5인 1실 10만원.


♣ 나주 맛집·식당 정보

나주곰탕 - 50년 전통의 나주곰탕 원조집. 옛 나주군청 인근.

하얀집

남평식당 - 홍어1번지 2대째 이어오는 홍어 요릿집. 홍어 모둠정식 4인분 6만원(2인분 4만원).

구진포 신흥장어 - 43년간 영업. 장어구이 1만 2000원, 장어정식 1만3000원.

나주가상박물관∙관광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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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여인, 서프라이즈 612회, 소련스파이 올가 체코바, 독일패망의 원인이된 여배우




4월 13일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독일패망의 원인이 된 스파이 ‘올가 체코바’에 대해서 다루었는데요. 놀라운 것은 독일최고의 인기여배우였던 올가 체코바가 히틀러의 연인이었으며 그녀는 소련에서 파견한 고급스파이였다는 것이지요.



올가 체코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히틀러에게 에바 브라운 이외에도 또다른 여인이 있었다고 하는

데요. 하나는 히틀러의 약혼녀 에바 브라운이고 또 한 여자는 당시 독일 최고의 여배우로서 명성이 높았던 올가 체코바였다고 하네요.

그런데 눈부신 미모를 갖춘 당대의 인기 여배우 올가 체코바가 다름아닌 소련에서 독일에 심어놓은 고급스파이였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답니다.


올가 체코바는 33년 ‘러브스토리’ 36년 ‘피터 대제의 딸’등 걸작품에 출연하면서 독일에서 인기와 명성이 높았던 여배우였는데 그녀가 고급스파이 마타 하리처럼 고급정보를 빼내기 위해서 소련에서 독일로 파견한 고급스파이였다는 것이지요.



올가 체코바는 소련의 명문가에서 출생했지만 그녀는 원래 독일 게르만족이라고 하네요. 

삼촌이 유명한 소련 단편소설작가인 안톤 체홉이라는 사실에 또한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군요.

당시 소련에서 결혼해 주부로 살고 있었던 올가 체코바가 독일로 파견되어 스파이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올가 체코바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희귀병을 앓고 있었으며 딸의 치료를 포기하려고 하는 남편과의 갈등으로 남편과 이혼하게 되었고 혼자서 희귀병에 걸린 딸을 부양하게 되는데 이러한 올가 체코바의 처지를 파악한 소련군 정보당국에서 병을 치료해주는 대가로 올가 체코바에게 독일스파이가 될 것을 권유했다는 것이지요.


결국 딸을 살리기 위해서 독일스파이로 파견된 올가 체코바는 독일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 높은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당시 독일 선전부장이었던 괴벨스에게 먼저 접근해서 독일총독 히틀러를 소개받기에 이릅니다. 영화를 무척 좋아했던 히틀러는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을 갖춘 올가 체코바에게 빠져들었고 그녀를 무척 신임했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올가 체코바는 히틀러의 약혼녀인 에바 브라운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히틀러가 폴란드공격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급기야는 소련을 먼저 침공해서 독일·소련간 전쟁이 불이 붙게 되었지요.


당시 유럽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두나라, 독일과 소련의 전투는 쉽게 승부를 가리기 어려웠었죠. 두나라 모두 대규모의 강력한 전차군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렇지만 독일이 대규모 전차군단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소련영토로 진격해 들어감으로써 전쟁 초반에는 독일이 우세를 보였는데 전세를 역전시켰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바로 ‘쿠르스크전투’에서 독일은 소련에게 치명적으로 패해 결국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답니다.

히틀러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올가 체코바는 히틀러가 ‘쿠르스크전투’에 대규모 전차군단을 파병할 계획을 사전에 입수하고 이를 소련에게 넘기게 되었고 소련은 치밀한 작전을 세워 ‘쿠르스크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되었답니다.

즉, 독일패망의 원인은 바로 올가 체코바가 넘긴 정보 때문인데 히틀러가 가장 신임했던 올가 체코바가 독일을 패망으로 이끈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답니다.



그럼 당대의 인기 여배우였던 올가 체코바와 히틀러가 과연 연인관계였을까가 관심거리인데요. 당시 히틀러에게는 에바 브라운이라는 연인이 있었으며 그녀와 나중에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지요.

연인 에바 브라운을 곁에 두고서 또다른 여인 올가 체코바를 사랑했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올가 체코바


히틀러가 워낙 영화를 좋아했었고 또한 자신에게 충성을 보이며 자신을 추종하는 인기여배우였던 올가 체코바를 신임하는 측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진짜로 사랑했었는지는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힘들지요.



에바 브라운


히틀러는 이상하리만큼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인물로 유명하죠. 연인으로 알려진 에바 브라운에게도 오랫동안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있었던 히틀러였기에 에바 브라운이 히틀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자살소동까지 벌이는 일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지요.



히틀러의 조카이자 연인이었던 겔리 라우발


히틀러가 진짜 사랑했던 여인은 조카인 겔리 라우발이지요. 겔리 라우발은 히틀러 누나의 딸로 히틀러에게는 조카인 셈인데 히틀러는 한 때 조카인 겔리 라우발과 동거를 했을 정도로 그녀와 가깝게 지냈으며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답니다.


결국 겔리 라우발이 권총자살함으로써 두사람의 관계는 끝이 나지만 겔리 라우발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았던 히틀러는 그 후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그당시 자신에게 다가왔던 에바 브라운을 오랫동안 멀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에바 브라운이 자신에게 집요하게 집착하며 충성을 다하자 나중에는 에바 브라운과 함께 동거하며 죽기 2일전에 지하벙커에서 결혼식을 올리지만 이 결혼식은 에바 브라운을 위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올가 체코바와 그녀의 딸, 두사람 오두 당대의 유명한 여배우로서 활동했다


아뭏튼 히틀러와 연인관계였는지는 불분명해 보이지만 고급스파이 올가 체코바는 소련의 승리의 분기점이 된 중요한 정보를 얻어냄으로써 자신의 딸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딸의 병도 고치게 되었고 그 딸도 나중에 성장해서 엄마처럼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었다고 하네요.


히틀러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던 한 여인, 그녀는 자신의 병든 딸을 살려내기 위한 모정의 힘으로 유럽을 공포에 떨게했던 히틀러의 독일제국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힘을 발휘했다고 하니 어머니의 사랑의 힘이 이토록 크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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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612회 ‘오드리 헵번’ 그녀의 악몽편, 아버지 나치당원




1950년 ~ 60년대 만인의 연인으로 세계적으로 큰 사랑과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허리우드여배우 ‘오드리 헵번’, 그렇게 청순가련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큰 인기를 누렸던 톱스타였던 오드리 헵번에게도 남들에게 말못할 고민과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서 알게되었답니다.





정말 오드리 헵번처럼 청순한 미모를 지닌 여배우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눈부신 미모는 전세계를 환히 비추어줄 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데요.

4월 13일에 ‘그것이 알고 싶다’ 오드리 헵번 편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드리 헵번의 말못한 고민과 콤플렉스를 다루어서 큰 화제를 뿌리고 있답니다.


오드리 헵번은 1953년 그레고리 펙과 함께 출연했던 ‘로마의 휴일’ 영화 한편으로 일약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 우뚝 솟았으며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인기의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었지요.

그러던 오드리 헵번에게 또다른 영화 ‘안네의 일기’ 출연제의가 들어왔답니다. ‘안네의 일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박해를 받았던 유태인소녀 안네 프랑코와 그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삶을 그리고 있는 영화인데요.

저도 이 ‘안네의 일기’를 과거에 책으로 읽은 적이 있으며 영화로도 본 적이 있는데 무척 감동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코가 가족들과 함께 독일 나치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몰래 은신처에 숨어 살게 된답니다. 어린 소녀였던 안네 프랑코가 성장해가면서 사랑과 자아를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랍니다. 나중에 나치당원들에게 그녀의 가족이 숨어살던 은신처가 발각이 나면서 가족 전원이 유태인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며 유태인수용소에서도 의연하게 행동했던 안네 프랑코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영화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는 추억의 영화이지요.


제가 당시 느꼈던 감동과 똑같은 감동을 오드리 헵번도 느꼈을 겁니다.

오드리 헵번은 영화 시나리오 ‘안네의 일기’를 보고 무척 감동을 받았으며 처음에는 영화출연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답니다.

당시 ‘안네의 일기’는 허리우드의 수많은 인기여배우들이 서로 출연하기를 희망했던 걸작품이라서 당시 인기의 절정에 서있었던 오드리 헵번의 출연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네요.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공주역으로 분한 오드리 헵번


그런데 오드리 헵번이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던 시점부터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고 말았지요. 오드리 헵번은 영화 ‘안네의 일기’ 시나리오를 받았던 첫날부터 무서운 악몽에 시달리게 된답니다. 그녀의 꿈속에서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나치당원이 계속 나타나서 그녀를 괴롭히고 위협을 가하곤 하였지요.


결국 오드리 헵번은 허리우드의 수많은 여배우들이 출연하기를 희망했던 영화 ‘안네의 일기’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답니다.

오드리 헵번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당원들의 횡포로 고통을 많이 받았던 어두운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안네의 일기’를 읽으면서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났기 때문에 밤마다 악몽을 꾸었던 겁니다.


또한 오드리 헵번에게는 남에게 숨기고 싶었던 더 어두운 과거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바로 나치의 열렬당원이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과거의 피치못할 이력들이 그녀에게 악몽과 컴플렉스로 남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오드리 헵번이야말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피해자라고 할만큼 고충을 많이 겪었답니다.

그녀의 아버지 안소니 헵번이 나치 당원이었지만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난 후 벨기에에 살고있던 오드리 헵번과 어머니를 매정하게 버리고 가출했던 장본인이었지요.

이렇게 아버지로부터도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오드리 헵번과 그의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기아와 굶주림, 그리고 전쟁의 공포와 나치의 횡포로 시달리면서 삶과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게 되었지요.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한사람이었던 오드리 헵번이었지만 세계적인 톱스타로 성장한 오드리 헵번에게는 아버지가 과거 나치당원이었으며 전범이었다는 사실과 전력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그녀의 인기와 이미지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되는 상황에 놓여있었답니다.


아내와 어린 딸을 버리고 이혼했던 비정한 아버지였지만 항상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했던 오드리 헵번은 어느날 아버지로부터 보고싶다는 편지를 받게 되었지요.

어머니가 딸 오드리 헵번의 장래에 피해를 줄까봐 숨겨왔던 아버지의 편지를 발견한 오드리 헵번은 아버지를 만나기를 열망했으며 그런 그녀를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렸지만 이세상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부모와 자식간의 혈육의 정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오드리 헵번은 과거 나치당원이었던 아버지의 신분 노출로 인해서 자신의 인기에 치명타를 주게되는 상황을 감수하면서 아일랜드 요양소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게 됩니다.

역시 천사의 마음씨를 지닌 오드리 헵번 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답니다.

그녀는 자신의 출세보다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의 안위가 더욱 소중했던 것이지요.


인기절정의 시기에 세계적인 톱스타로서의 이미지관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아버지의 과거전력이 노출되었는데도 그녀는 의연하게 받아들였고 결코 숨기려하지 않았으며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고 난 후 영화출연을 하면서도 세계의 빈곤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구호활동에 전념하게 된답니다.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의 친선대사가 되어 전세계 50개국을 돌아다니면서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는 빈곤한 이웃과 어린이들을 구호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답니다.





오드리 헵번의 이같은 구호활동에 대해 일부사람들은 그녀가 점점 식어가는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한 행사용 활동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하였지만 그녀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자신이 직장암에 걸려 사망선고를 받은 후에도 그녀의 구호활동과 선행은 멈추지 않았

답니다.


이 세상에는 최선을 다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답니다. 자신은 결코 단 한번의 선행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남을 비방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과 남들이 비방하는 그 순간에도 죽어가는 생명을 한명이라도 더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그것이지요.


그녀는 1993년 직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아프리카의 열도에서 기아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어린이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이러한 그녀의 박애정신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전세계에서 구호자금이 쏟아져 들어오기도 하였지요.



그녀가 구호활동 하러간 나라들은 에디오피아, 수단,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국이 넘을 정도로 많지요. 이렇게 오드리 헵번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로 세계 여러 곳의 소외된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굶주린 어린이들을 돌보다가 자신의 몸은 점차 쇠약해질 데로 쇠약해져만 갑니다.

그렇게 남을 위해서 헌신하던 오드리 헵번은 자신을 혹사시킨 대가로 결국 직장암에 걸리게 되었으며 1993년 스위스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그녀는 죽기 직전에 남은 두아들에게 명언을 남기고 죽었답니다.


오드리 헵번의 명언1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네가 더 나이가 들면 두 번째 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명언2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

입니다’


오드리 헵번은 93년 63세의 나이에 명언을 남기고 사망했답니다.

그녀가 약해진 자신의 몸을 조금이라도 더 돌보았더라면 아프리카를 돌며 강행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더 오래 살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녀가 사망한 63세의 나이는 평균수명보다도 훨씬 짧지요.


진정한 아름다움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실천해 보였던 20세기 허리웃의 가장 아름다운 천사, 오드리 헵번!

그녀는 외적인 아름다움 못지않게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그녀를 진정 잊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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