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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민 솔로곡 ‘나이스바디’ 중국 뮤직비디오차트 1위, 지연 ‘1분1초’ 3위, 뮤비동영상, 지연 월화드라마 ‘트라이앵글’ 유진역




6월 30일 티아라의 효민이 첫솔로앨범 ‘나이스바디’를 발표하면서 지연에 이어서 티아라에서 두 번째로 솔로활동을 본격 개시했다.

지난 5월 시크릿의 전효성, 티아라의 지연을 시작으로 불붙기 시작한 인기걸그룹 솔로열풍에 효민도 자신의 첫 솔로곡 ‘나이스바다’를 들고 활기차게 출격했는데 3일이 지난 7월 3일 현재 효민의 ‘나이스바디’ 티저영상은 유투브 조회수가 무려 136만을 기록했으며 ‘나이스바디’ 뮤비동영상은 57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대중들의 큰 관심을 끌며 인기를 점점 높여가고 있다.




효민의 첫 솔로곡 ‘나이스바디’는 히트제조기 용감한형제가 작곡한 곡으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여자의 애절하고 귀여운 속삭임을 담은 미디엄템포의 힙합곡으로 효민의 앙증맞고 귀여운 섹시미가 잘 녹아있는 싱그럽고 상큼발랄한 곡으로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곡이다.


티아라의 지연이 자신의 첫 솔로곡 ‘1분1초’의 활동을 6월 말로 종료하자마자 같은 소속 멤버인 효민이 곧바로 ‘나이스바디’를 들고 솔로활동을 시작했는데 중국에서는 지금 티아라의 지연과 효민의 솔로곡 때문에 난리가 났다고 한다. 첫 솔로활동을 시작한 효민 뿐만아니라 이미 솔로활동을 종료한 지연까지도 중국에서는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면 큰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드라마 '트라이앵글'에서의 유진역의 지연


같은 걸그룹 티아라에서 나란히 솔로앨범을 발표한 지연과 효민이 서로 사이좋게 중국 뮤직 차트에서 1, 2위 상위권을 휩쓸고 있어서 큰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티아라 소속사 코어에 따르면 6월 30일 효민의 솔로곡 ‘나이스바디(NICE BODY)’의 뮤비과 댄스버전 뮤비 2편이 중국의 최대규모의 뮤직비디오 사이트인 ‘인위에타이’에서 각각 1위와 2위를 기록했다고 하며 또한 6월말에 활동을 종료했던 지연의 솔로곡 ‘1분 1초’ 뮤직비디오도 같은 ‘인위에타이’ 사이트에서 효민에 이어 3위를 기록하며 티아라의 효민과 지연이 중국 최고의 뮤직사이트에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며 상위권을 싹쓸이하고 있는 중이란다.


효민의 ‘나이스바디’는 이제 발표한 지 2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연의 ‘1분1초’는 발표한 지 거의 2개월이 지난 시점으로 이미 솔로활동을 종료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중국에서 커다란 인기몰이를 지속하고 있어서 티아라의 높은 인기에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이미 활동이 끝난 노래를 3위에 올려놓고 그리고 같은 소속 멤버의 신곡을 1위와 2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매우 드문 현상으로 다른 K-POP가수들도 엄청 많은데도 불구하고 티아라 멤버 2명이 나란히 1위에서 3위까지 싹쓸이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중국에서의 티아라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지연의 셀카


사실 중국에서의 티아라의 인기는 엄청나다는 얘기가 몇 년전부터 흘러나왔는데 중국의 한 티아라 팬카페의 회원수가 140만명을 훨씬 넘는다고 하며 이러한 규모의 팬카페가 여러개 존재한다고 하는데 티아라는 2년 전부터 중국의 열화와 같은 러브콜을 받아들여 일년 1~2번씩 중국공연을 다녀오고 있다.

효민과 지연이 1위에서 3위를 차지한 ‘인위에타이’ 뮤직 차트에서는 4위 GOT7, 5위 AOA, 6위 소지섭, 7위 보아, 8위 god 등이 랭크됐다.


지연 사진 화보


한편 솔로활동을 끝낸 지연은 곧바로 드라마 출연으로 바쁜 나날을 이어가고 있다. MBC 월화드라마 ‘트라이앵글’ 15회부터 지연은 윤양하(임시완)의 정략결혼 상대 유진역으로 출연하였으며 16회에서는 윤양하에게 기습키스를 감행하는 등 도발적인 모습을 선보이면서 극의 활력과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트라이앵글’에서 지연(유진역)은 앞으로 기존의 영하·양달 사이를 오가며 경영권 다툼에 줄다리기 게임을 하면서 정희의 연적으로까지 부상해 기존의 애정전선마저 뒤흔들어놓은 기세인데 지연(유진역)의 앞으로의 행보에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효민 ‘나이스바디’ 뮤비 동영상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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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황산대첩, 승리의 결과, 황산대첩의 군사규모, 왜구의 규모

 

 

 

 

‘황산대첩’은 변방을 떠돌던 무인 이성계를 일약 영웅으로 만들어준 왜구토벌전으로 왜구격퇴에 있어서 최고의 성과를 올린 전투이다.

고려말 우왕때 왜구의 침략과 약탈이 극에 달하고 있었는데 북쪽에서는 홍건족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처들어와 고려는 남북으로 적을 맞아 싸우는 어려운 정세에 처했던 시절이었는데 북쪽에서 쳐들어왔던 홍건족을 진압하자 이번에는 남쪽에서 왜구들이 삼남(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지역에 침략해 들어와서 약탈과 살육을 일쌈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1376년 금강을 거슬러 올라온 왜구들을 부여에서 최영장군외 고려군을 만나 크게 섬멸되었다. 홍산대첩으로 왜구들은 크게 패퇴하여 돌아갔는데 그 후 한동안 잠잠하더니 1380년경 또다시 왜구들은 거대한 선단을 이끌고 서남해안 일대에 처들어와 약탈을 자행했다.

 

왜구들은 초기에는 주로 삼남지방 해안가지역에서 노략질과 약탈, 방화등을 일삼았는데 점점 침략 횟수와 규모가 커지면서 우왕시절에는 내륙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와 고려의 내정을 어지럽히고 있었으며 왜구의 규모도 엄청난 규모로 커져 있었다.

우왕 때에만 왜구의 침략횟수는 무려 278회에 이를 정도로 왜구는 징그러울 정도로 고려를 괴롭히고 있었다.

 

 

1380년 고려를 다시 침입한 왜구는 그 규모가 500여척으로 더 이상 해적떼가 아닌 대규모의 전단이었고 함선 100척 밖에 없었던 고려로서는 상대하기 벅찬 상황으로 고려로서는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때 영웅처럼 등장해서 큰 활약을 펼쳤던 인물이 바로 최무선이었다. 최무선은 병법에 능통한 대전술가로 왜구의 대규모선단을 무찌를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선택한 화약과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지금의 금강상류)에 출몰한 왜구의 500척 대부분을 불살라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다.

 

고려에서 최초로 사용한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공격으로 왜구의 500여척의 함선들을 물속으로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토벌된 것은 왜구의 함선들이었으며 불타는 배에서 탈출한 왜구들은 아직 토벌되지 않은 채 이들은 금강일대의 내륙으로 달아났는데 고려 내륙 깊숙한 곳에 산재해있던 왜구들이 모두 모여서 거대한 군단을 형성하며 다시 노략질을 일삼고 살상을 벌이고 있었다.

최무선의 진포대첩은 수전에서는 승리했지만 왜구들이 내륙으로 이동해서 제2전선을 형성한 것이고 내륙에 흩어져있던 왜구들이 모두 집결해서 황산지역에서 거대한 군단을 형성함으로써 또다른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럼 왜구들은 유독 고려말에 왜 이처럼 끝도없이 많이 침입해 들어왔는가?

고려말경 일본에서는 남북조 전쟁을 겪고 있었으며 북조의 세력이 남조의 세력에게 압박을 가하면서 규슈지역의 남조세력들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동쪽에 있는 규슈지역의 남조세력이 북조의 침략군에 밀리면서 항전을 하던 과정에서 부족한 군량미를 얻기 위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고려의 남부지역으로 군량미 약탈 원정을 도발한 것이다.

 

남북조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규슈세력들이 고려에 침략해 들어와 군량미와 병참의 공급처를 확보하기도 하였고 또한 고려의 남부지방을 자신들의 피난처 내지는 퇴로로 삼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 본토에서 군사적으로 몰리고 있던 이들 왜구들은 마지막 생존을 위해 고려에서 더욱 악랄하게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던 것이다.

외딴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던가! 고려땅 외에는 더 이상 퇴로나 피난처가 없었던 일본 남조의 잔여세력들은 고려 남부지방으로 들어와 제세상 만난 것처럼 마지막 발악을 하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진포에서 자신들의 배를 모두 잃고 내륙으로 달아났던 왜구들은 내륙에 흩어져있던 왜구들과 합세해서 전국 곳곳을 누비면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는데 마지막 이들이 집결한 곳이 바로 지리산 부근 황산(오늘날 전북 남원)이었다. 이들은 진포에서 달아났다가 옥주를 거쳐 경북 상주와 성주등을 돌며 살육과 약탈을 벌였고 계속해서 경상도지역을 돌아다니며 약탈하다가 전라도 지리산 부근으로 모여들고 있었는데 이곳에 집결한 왜구들은 거의 10만에 육박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고려조정에서는 고려의 지역 수비군들이 계속해서 왜구들에게 패전하자 이번에는 북방에서 큰 전과를 세웠던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로 임명해서 왜구토벌에 출전시켰다.

 

몽고족과 홍건족을 무찌른 전쟁의 화신 이성계는 자신의 기병대를 선봉에 세우고 지리산 남원부근으로 들어갔는데 지리산에 모여있던 왜구들은 고려군의 공세를 알고 산 높은 곳에서 진을 치며 방어하고 있었다.

이당시 양군의 규모를 살펴보면 고려사 기록에는 왜구의 규모가 고려 군사의 10배나 되는 규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군으로서는 군사숫자상으로는 중과부적이라는 뜻이다.

 

이성계의 왜구 토벌군의 규모를 1만명 수준으로 본다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간 왜구의 규모는 거의 10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이다. 왜구의 정확한 군사규모가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진포에 쳐들왔던 왜구 선단이 500척이었으니 한 척당 승선인원 150명씩만 잡아도 총 75,000명이나 된다.

 

75,000명 대 1만명의 대접전이 지리산 자락에서 벌어진 것으로 분명한 것은 우리 고려토벌군의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에 처했던 전투였다. 이당시 왜구들은 고려토벌군을 멸하고 수도 개경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호헌장담했다고 한다. 이당시 왜구들의 사기나 기세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한마디였다.

 

황산대첩이 벌어졌던 남원 운봉읍 일대, 운봉읍 피바위와 대첩비가 있는 지역이 쵀대의 격전지로 알려졌고 이곳에서 이성계는 왜장 아지발도를 죽였다.

 

왜구들이 집결해있는 지리산자락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군대는 하루밤 휴식을 취한 뒤 그 이튿날 곧바로 공격을 개시했다. 지리산계곡으로 군사를 이끌고 올라간 이성계는 군사를 2개조로 나누어서 산 정상에 버티고 있는 왜구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서 교란적전을 펼

쳤다.

산과 계곡 등에서 이성계의 고려군과 왜구들은 서로 뒤엉켜서 접전을 펼쳤으며 시간이 갈수록 전세는 이성계의 군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산위에서 험준한 지형을 방패삼아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는 왜구들에게 전세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산위로 쳐올라갔던 이성계의 군대는 결국 후퇴하고 다시 산을 내려와야 했다.

 

그 다음날 2차전에서는 이성계는 군사들을 시켜서 적과 싸우면서 패배를 가장해서 산 아래로 왜구들을 유인하도록 작전을 짠다.

황산 아래의 벌판으로 왜구들을 유인에 성공한 이성계군대는 이제 전투다운 전투를 벌일 수 있게 되었다. 황산 아래의 넓은 들판에서 양군이 대치한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적장 아기발은 젊은 장수로써 용맹과 신기를 지니고 있어서 많은 장수들을 수하에 거느리고 있는 맹장이다.

 

이러한 아지발도이 선두에 서서 고려군사들을 거침없이 무찌면서 돌격해오니 고려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동북면 도통사로 북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성계는 전쟁의 승패는 군사규모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군사의 사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오랜 전쟁을 통해서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의 승패는 바로 하늘같이 치솟은 왜구의 사기를 꺽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감지한 이성계는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화살을 날려 단 한방에 적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맞혔고 투구가 벗겨진 아지발도이 미처 방어자세를 취할 여유도 주지않고 이성계의 부장 이지란이 곧바로 두 번째 화살을 날려 적장 아지발도의 얼굴에 명중시켜 아기발을 쓰러뜨렸다.

 

적장을 단번에 잃은 왜구들은 사기가 꺾이고 공포를 느끼면서 오합지졸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이성계의 정예기마병들이 노도와 같이 적진으로 돌격해서 닥치는 대로 왜구들을 도륙하였고 이성계의 제2군이 왜구들의 후미를 기습해 공격해 들어오자 왜구들은 고려군에게 완전 포위당한 채 지리멸렬해갔다.

 

이성계의 활 솜씨는 신궁으로 소문이 나 있으며 이성계는 전쟁이 시작되면 항상 제일 먼저 자신이 직접 활을 쏘아서 적장의 투구를 떨어뜨리는 묘기를 부리곤 하는데 이것은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이성계의 계락 중 하나이다. 몽고침략군 나하추와의 전쟁 때에도 이성계는 직접 활을 쏘아서 적장 나하추의 투구를 떨어뜨려서 나하추의 간담을 싸늘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왜구는 대장 아기발을 잃고 나자 전의를 거의 상실해버려 오합지졸이 되어있었고 이틈을 타서 이성계의 군대가 왜구의 전면과 후면에서 포위공격하면서 닥치는 대로 배어버리자 왜구들은 속절없이 당했으며 퇴로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지만 미리 요소요소에 고려군을 매복시켰기 때문에 달아나던 왜구들은 고려매복군들에게 걸려 목숨을 잃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 황산대첩은 이성계군대의 대승으로 끝이 났으며 지리산 기슭에서 집결해있던 왜구 7만 5천여명(20만명설?)의 병사들은 거의 다 전멸당했으며 살아서 도망친 자들은 70명에 불과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는 왜구의 말 1,600필의 전리품을 얻었으며 노획한 병기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또한 전쟁이 너무 치열해서 황산 앞에 있는 냇물은 7일 동안이나 핏물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며 근처에 적장 아지발도가 피를 많이 흘려 바위를 피로 붉게 물들였다는 피바위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오랜기간 동안 경상도, 양광도(충청도), 전라도 지역을 종횡무진하면서 가는 곳마다 관병과 백성들을 수없이 살육하고 노략질하면서 한반도를 황폐화시켰던 대규모의 왜구들은 이성계의 황산대첩으로 완전히 지리멸렬당했으며 이 황산대첩을 계기로 더 이상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황산대첩의 승리로 이성계는 고려를 구한 영웅으로 급부상한다. 이성계는 이전쟁 이후 백성들의 높은 신망을 얻었으며 또한 이성계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마침내 이성계는 함경도 변방 장수에서 벗어나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황산대첩의 큰 공을 세운 이성계는 최영의 천거를 얻어서 내사문하성 수시중 자리에 오르면서 고려 조정의 핵심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공민왕 때에만 해도 이성계는 사실 함경도 함흥지역의 토착 호족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함흥지역의 도통사를 지냈지만 이지역이 몽고족의 쌍성총관부 관할 아래에 있던 지역이라서 고려의 권문세족들로부터 이성계는 오랫동안 몽고족의 수하노릇을 한 역신취급을 받아왔다.

후에 몽고족들과 홍건족이 쳐들어왔을 때에도 이성계는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과 싸워서 물리치는 큰 공을 많이 세웠지만 조상 대대로 몽고족의 수하라는 꼬리표가 붙어서 중앙정계 진출은 불가능했으며 고려의 권문세가들로부터 견제를 심하게 받아왔으며 정치적으로도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불리한 상황이 황산대첩의 승리로 인해서 일거에 반전을 이루게 된다. 이성계는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우왕으로부터 큰 상(금 50량)을 받았고 아울러 최영시중으로부터도 신임을 돈독히 받아 수시중의 자리까지 승진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재상이었던 최영과 부재상이었던 이성계의 관계는 돈독했으며 정치적으로도 한배를 탔었다.

 

그런데 1988년 요동정벌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우왕, 최영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이성계는 최영과 대립하는 관계로 돌변하게 된다. 자신을 요동정벌군 우총관으로 임명한 최영에게 이성계는 강력히 반발했지만 당시 최고의 실권자였던 최영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요동정벌군으로 떠나갔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마음이 변심을 일으키게 된다.

 

요동정벌군 5만명을 통솔했던 이성계는 역시 5만명을 이끌던 조민수를 꾀여서 위화도회군을 일으켰고 총 10만의 군사를 몰아서 다시 개경으로 쳐들어가는 쿠테타(군사반란)을 일으켰으며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자신이 정치적 실권을 잡았는데 1년 후에 자신을 도왔던 조민수마저 암살하고 고려조정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그리고 친명파인 신진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는 패망하고 새로운 조선이 개국하게 되었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킨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위화도 회군’이다. 이성계에게 5만명의 군사적 지원이 없었으면 이성계는 결코 군사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이성계가 자신의 고향인 함흥지역에서 직접 거느리는 사병은 3천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요동정벌군 우통사에 임명되면서 군사 5만명의 통솔권을 함께 부여받았다.

즉, 이성계의 역성혁명의 밑거름은 바로 ‘위화도회군’이었으며 여기에 정도전, 조준, 남은 같은 신진사대부들의 조언과 계략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원래 함흥지역에서 일종의 지방수령(만호)에 불과했던 이성계는 오랫동안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변방을 전전하며 전쟁에만 동원되었던 정치적으로 불운한 장수에 불과했으며 더욱이 몽고에 내조했다는 과거의 전력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아왔으며 수없이 외적을 물리치면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중앙관직에 출사를 못하는 불운한 신세였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이성계가 단번에 군사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중앙정계에 높은 지위로 신분상승을 이루게된 계기가 바로 황산대첩에서의 승리였던 것이다.

황산대첩의 승리는 이성계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뀌어 놓은 대사건이다. 지방의 무명장수가 한나라의 왕이 되었으니 엄청난 운명의 변신이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소재 -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

1577년(선조 10년) 건립. 높이 4.25m.

 

황산대첩비는 1380년 고려에 침입해왔던 왜군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었던 이성계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서 1577년 세운 승전비이다.

 

김귀영이 비문은 짓고 송인이 썼으며, 전액은 남응운이 하였고, 박광옥이 비를 세웠다. 1380년(우왕 6)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되새기기 위하여 세웠다.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후 파편만 남아 있는 정도였으나 1957년 귀부와 이수를 그대로 이용하여 중건하였다. 중건된 비는 쌍귀(梗龜)를 떠서 새겨진듯하며, 본래 모양의 높이·너비·두께 등은 정확히 고찰할 수 없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많이 흐르고 나서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고 있으니 비석을 세워서 후대에 널리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주청을 올려서 왕명으로 건립하였다.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 황산에서 고려병사보다 10배나 더많은 왜적을 대파함으로써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후대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기념하기 위해서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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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베정권 ‘집단적 자위권’ 행사 선포, 평화헌법 해석변경 각의결정




7월 1일 일본 각의가 마침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선포하는 결정을 내렸다. 오직 전수방어만을 규정한 일본 헌법 9조애 대한 재해석을 시도해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헌법해석을 변경함으로써 일본은 마침내 2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69년만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국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내각 결정은 아베총리가 과거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해왔던 ‘강한 일본’의 부활 작업의 일환으로 앞으로 일본정부의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일본의 아베정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주 노골적으로 평화헌법마저 개헌할 기세로 나오고 있다. 


어차피 정권마다 서로다르게 일본의 평화헌법을 해석함으로써 오는 혼란과 헌법해석에 대한 위헌여론 등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아예 평화헌법마저 개정함으로써 완전한 전쟁수행이 가능하도록 법적인 기반을 마련하자는 우익관료들의 주장이 거세게 불고 있다.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상은 '헌법 개정이 정론이다. 다음 단계론 개헌을 해야 한다"고 기자들에게 노골적으로 밝혔다. 또한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은 "전쟁억지력 효과를 높이는 예산을 편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집단적 자위권행사’를 위해서 방위비를 증액해야 한다고 주장을 펼쳤다,



일본 아베정부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각의 결정을 내리고는 이어서 일본 방위비 증액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또한 곧이어 완전한 ‘전쟁권’을 확보하기 위해 헌법개정까지 할 뜻을 내비치고 있다.

이른바 ‘군국주의 일본’으로 가는 수순을 밟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아베정권의 군국주의 폭주에 대해 일본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무라카미 세이치로 전 행정개혁상은 ‘개헌이 아닌 헌법해석 변경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고 위헌소송이 제기되면 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 씨를 포함한 일본 시민들 1만여명이 총리관저앞에 모여 ‘집단적 자위권’ 각의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거세게 벌이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 씨는 기자회견에서 ‘과거 정부 견해와 전혀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면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하지 않으며, 헌법도 일본어도 파괴하는 이상한 사태’라고 정부의 결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총리관저 앞에서는 연일 1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반아베 시위가 지속되고 있다.



교도통신은 집단적 자위권 헌법해석을 변경하는 각의 결정이 발표된 1일과 2일에 이틀동안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집단적 자위권 행사애 대한 찬성률은 34.6%를 기록했으며 집단적 자위권행사에 대한 반대는 54.4%로 찬성보다 반대가 20% 정도 훨씬 높게 나왔다.

또한 아베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처음으로 50%이하로 추락했다고 교도통신은 전하고 

있다.


그러면 일본 아베정권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결정에 대한 국제적인 반응은 어떠할까? 미국은 일본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찬성과 지지입장을 발표했으며 중국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당연히 일본의 ‘전쟁권’ 행사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 사살상 중국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의 외교적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동맹국인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더불어 미사일방어망 구축 등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꾸준히 희망해왔는데 특히 미국의 재정수지 악화로 인해 국방비를 감축해야 할 상황에 처해있는 미국으로서는 아시아에서 중국을 겨냥한 군사적 부담 등 재정적 뒷받침을 일본과 분담하기를 바라고 있는 입장이다.

그러니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군사력 강화가 아시아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안전장치로서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며 미국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에서 공식적으로 환영을 표하고 있다.



중국의 훙레이 외교부 대변인은 ‘"일본은 지역 평화와 안정을 해쳐서도 안되고, 중국의 주권과 안보를 침해해서도 안된다’고 일본을 경고와 함께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게 되면 2차대전 패전이후 지금까지 일본은 평화헌법 조항에 따라 오직 전수방위만 해오던 것에서 벗어나 외국에 군대와 무기를 파병할 수 있는 길을 터주게 된다.


일본의 평화헌법은 명시적으로 외국에 대해 먼저 공격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또한 외국으로 군대를 파견할 수도 없게 되어있는데 일본이 이러한 평화헌법의 조항을 임의적으로 변경해석함으로써 방어를 위한 집단안보의 군사참여는 공격이 아니라 방어의 개념이므로 집단방어를 위해서 이웃국가에 군사파견은 가능하다는 억지 해석을 한 것이다.


헌법변경을 통한 외국 군사파견은 국민 과반수 찬성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우선 헌법해석의 변경이라는 쉬운 방법을 통해서 ‘전쟁권’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전쟁권’을 확보한 일본이 앞으로 한반도 안보에 깊숙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제임스 쇼프 선임연구원은 ‘일본이 한반도에서 조만간 직접적으로 미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제공할 걸로 보인다’고 말한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이 미국의 한반도 군사작전 수행시 보조하는 역할로 한반도 군사작전에 개입할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물론 일본이 한반도 유사시나 군사작전시에 미국의 요청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개입할 것이며 미국의 보조역할에 머물 것이긴 하지만 과거 일본의 오랜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우리나라로서는 일본이 한반도에 미국의 병참지원을 온다는 것 자체가 소름 끼치는 일인 것이다.



만약에 미국이 장래에 국방비 부담 등의 이유로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영향력을 감소시켜 나갈 경우에는 그 빈자리를 군국주의화된 일본이 대신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이 도래하게 된다면 한국으로서는 미국에 비해 훨씬 더 적대적인 일본을 아시아에서 군사적 맹주로 모셔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물론 먼 미래의 일이지만 일본의 군사력이 계속해서 강화된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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