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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클립튼의 ‘천국의 눈물 (Tears In Heaven)’ 노래동영상, ‘서프라이즈’ 621회 ‘아들을 위한 노래’




영국의 천재적인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 라이터인 에릭 클립튼의 최대의 히트곡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이 에릭 클립튼이 자신의 죽은 아들에게 바치기 위해서 만들어진 노래라는 사실이 밝혀져 큰 화제가 되고 있다. 7월 6일 방영된 ‘서프라이즈’ 621회에서는 에릭 클립튼의 히트곡 ‘Tears In Heaven’의 탄생배경과 아들에 대한 슬픈 사연이 공개되어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63년 그룹 크림으로 데뷔했던 에릭 클립튼은 81년에 발표한 앨범 ‘Another thiket'이 크게 히트를 하면서 스타덤에 올랐고 80년대 대표적인 싱어송라이터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더 이상 히트곡이 나오지 않게되자 에릭 클립튼은 음악적으로 몹시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에릭 클립튼은 후속곡을 만들기 위해 오랜기간 작업에 몰두했지만 좋은 악상이 떠오르지 않자 술과 마약에 손을 대게 된다.

음악적으로 큰 활약을 펼쳐야될 중요한 시기에 좋은 곡을 더 이상 만들지 못한 에릭 클립튼은 또다른 히트곡을 만들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있었으며 이러한 강박관념으로 인해서 그의 곡작업은 더욱 더 난항에 빠져들게 되었고 좋은 곡을 만들지 못한 자신에 대한 힐책을 술과 마약에 의지함으로써 현실을 잊고자 하였다.



에릭 클립튼은 80년대 중반 이탈리아 사진작가인 로리 델 산토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는데 더 이상 히트곡을 발표하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진 에릭 클립튼에게는 아들 또한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아내와 가족들과도 단절된 채 알콜중독, 마약중독에 빠져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하였다.


이렇게 알콜과 마약중독에 빠져있어 정상적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그의 부인은 에릭 클립튼에게 마약과 술에서 벗어나기를 간곡하게 권했지만 술과 마약에 완전 찌들어버린 에릭 클립튼은 더 이상 아내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에릭 클립튼에게 지쳐버린 그의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두사람은 별거생활을 하게 된다.


에릭 클립튼 부인 로리 델 산토와 아들 코너 사진


이후 자신의 아내와 아들과 졸지에 생이별을 하게 된 에릭 클립튼은 그 때부터 자신의 잘못된 생활태도를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알콜중독자 치료보호시설에 스스로 찾아가서 술을 끊는 등 심기일전하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을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오랜 노력 끝에 술과 마약을 끊고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온 에릭 클립튼은 꿈에도 그리워하던 아들을 만나러 갔으며 그는 아들과 아내에게 지난날 자신의 과오를 사과하면서 아들에게 다음날 놀이공원에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그 다음날 에릭 클립튼은 아들이 죽었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충격을 받는다. 아들 코너는 아버지 에릭 클립튼을 기다리면서 55층 아파트 베란다 위에 있다가 그만 아래로 떨어지는 추락사고로 사망했던 것이다.



졸지에 아들을 잃어버린 에릭 클립튼은 엄청난 충격과 슬픔에 휩싸이게 된다, 아들 코너를 잃고 슬픔에 빠져있던 에릭 클립튼은 마음을 추스르고 죽은 아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기로 계획한다.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과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던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날 아들에 대한 그리움의 가사를 담은 노래가 바로 92년에 만들어진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이었고 감미롭고 애절한 멜로디를 지닌 노래 ‘Tears In Heaven’은 발표와 동시에 세계적인 히트를 치게된다.


에릭 클립튼의 대표적인 히트곡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은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에릭 클립튼 노래인생에서 최고의 역작으로 꼽히고 있는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은 오랜 슬럼프에 빠져있던 에릭 클립튼에게 아들이 죽음으로써 동기를 만들어준, 죽은 아들이 준 마지막 선물이었던 것이다.


92년 에릭 클립튼이 발표한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은 발표와 동시에 빌보드 차트 1위를 거머쥐었고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2천만장이나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


아들이 힘들어하는 아버지에게 영감을 주기위해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만들어진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은 죽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천국에서 보내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크게 히트를 친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을 2004년 에릭 클립튼은 돌연 더 이상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에릭 클립튼이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을 부르지 않기로 한 표면상의 이유는 이 곡을 처음 불렀을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사실은 에릭 클립튼의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던 아들과 이제는 작별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자신의 죽은 아들을 위해서 만든 노래인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은 에릭 클립튼의 죽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을 담겨 있었는데 아들을 떠나보내고 12년이 흐른 상태에서 에릭 클립튼은 이 노래를 중단함으로써 아들을 마음속에서 잊기로 했던 것이다.


그럼 죽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연민의 정과 그리움이 사뭇쳐 흐르는 에릭 클립튼의 노래 ‘티어스 인 헤븐’의 노래를 한번 감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릭 클립튼의 ‘Tears In Heaven’ 뮤직 동영상














tears in heaven 가사


Would you know my name if I saw you in heaven

내가 천국에서 너를 만나면너는 내이름을 알 수 있겠니

Would it be the same if I saw you in heaven

내가 천국에서 너를 만나면 너는 예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

I must be strong and carry on Cause

나는 강해져야해 그리고 꿋꿋하게 살아 가야해 왜냐하면

I know I don't belong here in heaven

나는 여기 천국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Would you hold my hand if I saw you in heaven

내가 천국에서 너를 만나면 너는 내손을 잡아주겠니

Would you help me stand if I saw you in heaven

내가 천국에서 너를 만나면 너는 내가 굳건히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겠니

I'll find my way through night and day

나는 밤낮없이 항상 내 살길을 찾아 나갈꺼야

Cause I know I just can't stay here in heaven

왜냐하면 나는 여기 천국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Time can bring you down

시간이 흐르면 좌절을 겪을 수도 있단다

Time can bend your knees

시간이 너를 굴복 시킬 수도 있고

Time can break your heart

시간은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단다.

Have you begging please. Begging please

그럴때는 애원해라, 애원하거라

Beyond The Door There's Peace I'm Sure

저문 너머에는 분명히 평화가 있을거라고 확신 한단다.

And I Know There'll Be No More Tears In Heaven

그리고 난 안단다, 그곳 천국에는 더이상의 눈물은 없을 거라는 것을

Would you know my name if I saw you in heaven

내가 천국에서 너를 만나면너는 내이름을 알 수 있겠니

Would it be the same if I saw you in heaven

내가 천국에서 너를 만나면 너는 예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

I must be strong and carry on

나는 강해져야해 그리고 꿋꿋하게 살아 가야해

Cause I know I don't belong here in heaven..

나는 여기 천국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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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고의 미녀배우 정윤희 최근모습, 남편 조규영, 간통사건, 영화

 

 

 

7월1 TV조선 ′대찬인생′에서는 70년대 우리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대표적인 미녀여배우 정윤희씨를 다루어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답니다.

정윤희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녀’ 그리고 ‘나는 77번 아가씨’이지요. ‘나는 77번 아기씨’는 70년대 당시 유행했던 호스티스여성의 가련한 삶과 사랑을 그렸던 영화로서 이 영화가 크게 히트하면서 ‘나는 77번 아가씨’는 ‘비련의 여주인공’ ‘미모의 여성’을 의미하는 용어로 한때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답니다.


 


정윤희는 1975년 영화 ‘욕망’으로 연예계에 데뷔했는데 데뷔하자마자 각종 cf광고에 출연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알렸는데 정윤희의 인형같은 아름다운 미모는 당시 장안의 큰 화제가 될 정도로 대단했었답니다.

 

이제 막 신인으로 데뷔한 정윤희의 선굵은 외모가 시청자들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린 것이죠. 60년대의 문희 이래로 최고의 미녀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나면서 정윤희는 70년대 중반 데뷔초부터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당시 무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외모’ 하나 때문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것이며 그 후 아시아가 인정하는 고품격 명품 미모를 바탕으로 해서 수많은 영화들의 당당히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미녀여배우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답니다.


 

정윤희가 활동할 당시인 70년대 중반 우리 연예계에는 정윤희 외에도 2명의 인기 여배우들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바로 유지인과 장미희지요.

유지인은 영화 ‘그대의 찬손’ ‘마지막 겨울’ 등의 히트로 세련되고 도회적인 미녀로 이름을 떨쳤으며 장미희는 ‘겨울여자’의 공전의 히트로 스타덤에 올랐지요. 그리고 여기에 정윤희가 가세하면서 70년대 중·후반은 정윤희·유지인·장미희의 3대 트로이카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렸답니다.


70년대 미모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유지인과 정윤희

 

60년대의 트로이카였던 문희·윤정희·남정임이 70년대 초반 결혼과 함께 은퇴하고 난 후 여배우스타 부재에 빠져있던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트로이카 미녀군단이 등장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60년대 트로이카인 문희·윤정희·남정임에 빗대어 정윤희·유지인·장미희를 70년대 트로이카로 부르게 되었답니다.

정윤희·유지인·장미희, 세명의 미녀여배우들은 각자 개성있는 연기와 자기영역을 확보해가면서 70년대 중·후반 동시에 인기와 명성을 쌓아갔던 것이지요.


 

새롭게 구성된 트로이카 미녀여배우 3인방은 서로 경쟁적으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자신들의 인지도와 명성을 쌓아갔는데 이 중 누가 더 인기가 높았었는지는 단정지울 수는 없답니다. 왜냐하면 모두 개성들이 강하고 자기만의 트래이드마크가 분명했으며 영화와 드라마, 쇼프르그램 등에서 자기영역을 확고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지만 이들 세명의 미녀여배우들이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70~80년대 우리 영화계를 활성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갔던 것은 분명합니다.


 

칼라TV의 보급으로 60년대에는 크게 흥행에 성공했던 우리 영화계가 침체되어 가는 시점에서 이들 트로이카 3인방의 영화들 만큼은 흥행에 성공하고 있었으며 우리 영화산업계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지요.

이당시 침체기에 빠졌던 우리 영화산업이 트로이카 정윤희·유지인·장미희가 없었더라면 거의 몰락할 수도 있었던 시기였는데 이들 3인방의 활약과 인기 덕분에 그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며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오늘날 아시아를 주름잡는 영화의 메카로서의 한국 영화계가 우뚝 설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답니다.


 70년대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트로이카 3인방, 유지인, 장미희, 정윤희


아뭏튼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전반까지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트로이카 3인방 중 장미희는 전형적인 동양미인으로서 중장년층으로부터 인기가 많았고 화장품 광고모델로 혜성처럼 나타났던 유지인은 세련되고 청순한 미모로 드라마 ‘서울야곡’에 출연하면서 젊은층과 중년층으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었는데 그녀의 도회적인 미모와 더불어 청순미가 인기의 비결이었지요.

 

그리고 정윤희는 선이 굵고 윤곽이 뚜렷한 서구형미인으로 가장 눈에 띄었는데 세명의 트로이카 중 정윤희가 미모에서는 으뜸이라는 당시 일부 매스컴의 보도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대만과 일본에서는 정윤희를 ‘아시아의 최고미인’으로 보도할 정도였으니까 당시 정윤희의 미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답니다.

 

또한 정윤희는 당시 무술영화를 찍기 위해 한국에 자주 방문했던 홍콩배우 성룡이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밝히며 공개적으로 정윤희의 미모를 찬양해서 마치 정윤희와 성룡이 스캔들이라도 난 것처럼 오보가 나기도 했답니다.

‘아시아의 최고미녀’ ‘100년만에 한번 나올 정도의 미녀’ ‘역대 한국 최고미녀’ 등 정윤희에게 붙여진 화려한 수식어를 보더라도 그녀의 미모는 70,80년대를 대표하는 고품격 미모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고 할 수 있지요.


 

정윤희는 영화 ‘청춘극장’과 ‘77번 아가씨’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렸으며 그 후 80년대에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이 두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톱스타로 급부상하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예쁜 외모’ 덕분에 여러 작품에 무임승차했지만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때부터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승부하는 명실상부한 ‘미모’와 ‘연기력’을 동시에 갖춘 연기파여배우로 변신하게 된답니다.


 

그리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80, 81년 대종상을 두차례나 수상하면서 트로이카 중에서 가장 앞서가게 되었지요. 이당시의 인기와 명성을 인해서 일본에서는 정윤희를 ‘아시아 최고의 미녀배우’라고 극찬하며서 정윤희 스카우트를 시도하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나서 출연한 영화 ‘사랑하는 사람아’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으로서 최고의 연기력을 선보였던 정윤희는 당시 유행했던 슬픈 멜로영화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수많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으며 연기의 절정에 다다르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70년 중반부터 80년대 전반까지 미모와 연기력을 모두 검증받으며 최고의 인기배우로서 인기의 절정에 섰던 정윤희가 갑자기 스캔들의 한복판에 서게 되면서 우리 영화계와 완전히 작별을 고하게 된답니다.


 

1984년경 정윤희는 현재의 남편인 조규영 중앙산업개발 전무이사와 스캔들이 터졌는데 최고의 미녀배우와 중견 건설회사 임원과의 스캔들, 불륜이라고 신문에서 대서특필했던 사건이랍니다.

84년 인기 절정에 서있던 정윤희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된 조규영 중앙산업개발 이사와 사귀게 되었는데 문제는 조규영이사가 11녀를 둔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지요.

 

한참 교재를 해나가던 두사람을 조규영씨의 전부인이 ‘간통죄’로 고소하였으며 두사람은 잠시 낮설은 유치장 신세를 5일간 지기도 하였답니다.

결국 조규영씨 전부인과의 합의가 성립되고 고소취하로 다시 풀려난 정윤희와 조규영씨는 1984 12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결혼 후 정윤희는 일체의 방송출연 및 영화출연을 하지 않고 오로지 가정만을 지켜면서 평범한 주부로서 일생을 살아왔답니다.

 

결혼한 지 30년 동안 과거의 화려했던 명성과 인기를 묻어두고 오직 가정주부로서만 평범하게 살아온 주부 정윤희씨가 TV조선 ‘대찬인생’에 잠깐 모습을 나타내어 올드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으며 아름다운 옛추억을 다시 상기시키시도 했답니다.

 

80년대 이후에 출생한 대부분의 신세대들은 왕년의 인기여배우 정윤희의 존재감에 대해서 전혀 실감할 수 없지만 부연 설명하자면 70,80년대의 정윤희는 현재 한국에서 최고의 미모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미녀의 아이콘, 김태희와 송혜교와 견줄 수 있는 미모라고 할 수 있답니다. 어떤 혹자는 정윤희를 ‘역대 한국 최고의 미녀여배우’라고도 말할 정도이니까 송혜교보다는 좀 더 예쁘다고 할 수 있답니다.


 

‘대찬인생’에서 정윤희씨의 현재 모습이 잠깐 전파를 탔는데요. 정윤희씨의 미모가 여전히 아름다워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답니다. 정윤희씨는 1954년생으로서 현재 나이가 61세이신데 아직도 젊었을 때도 선굵은 미모가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답니다.

 

84년 연예계에서 은퇴한 후 행복하고 단란한 결혼생활을 이어오던 정윤희에게도 한 때 아픔을 겪게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요.

바로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미국유학 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답니다. 정윤희는 남편 조규영씨의 전처와의 소생 11녀를 포함해서 21녀를 키우고 있었는데요. 그 중 정윤희가 낳은 친아들이 미국 유학중에 심장미비증세로 사망했으며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겪기도 했답니다. 정윤희의 아들은 사망 당시(2011)에 나이가 23살이라고 하는데 너무도 젊은 나이에 사망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네요.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정윤희 아들의 사인은 약물중독으로 인한 쇼크사라고 합니다.


 

정윤희의 남편 조규영씨는 정윤희의 8세 연상으로 원래 부친이 운영하던 중앙산업개발의 이사로 재직하였다가 현재는 중앙건설의 회장을 맡아 직접 회사를 운영하고 있답니다.

중앙산업개발은 전라도 지역에서 과거 중앙하이츠아파트를 건설하면서 아파트 건설붐을 일으켰던 꽤 잘나가던 중견 건설회사입니다.

그런데 최근 건설경기의 침체의 영향을 받아 조규영씨가 운영하는 중앙건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네요. 지난 2월에 중앙건설은 법원에 회생절차를 밝고 있다고 합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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