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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식 서울시의원, 수천억대 재력가 살인교사혐의로 구속, 강서구 재력가 송씨 청부살해, 김형식 친형




지난 3월 자칫하면 미제사건으로 남을 뻔했던 내발산동 60대 재력가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런데 60대 노인 피살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에 검거된 범인은 다름아닌 현역 시의원이어서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다.


강서경찰서는 자신과 채무관계에 있던 수천억원대의 재력가 송(67세)씨를 살해하도록 사주한 혐의로 서울시의원 김씨(44세)를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시의원 김씨의 사주를 받고 송씨를 살해한 사람은 서울시의원 김씨로부터 7천만원의 빛을 진 친구 팽씨로 팽씨는 서울시의원 김씨의 빛을 탕감바든 조건으로 재력가 송씨를 살해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팽씨 또한 이날 경찰에 체포되었다.



강서구 내발산동의 수천억원대 재력가를 살인하도록 팽씨를 사주한 김씨는 바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의 서울시의원인 김형식의원으로 밝혀져서 또한번 엄청난 충격을 몰고왔다. 김형식의원은 6.4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현재는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되어있다.


서울시의원까지 당선된 사람이 살인을 교사하게 된 이유는 그가 재력가 송씨에게 진 빛 때문이며 살해직전 김형식의원은 송씨로부터 빌려준 돈을 빨리 갚으라고 독촉을 받고 있었으며 그가 지방선거에 출마할 것을 알고있는 송씨로부터 빛을 빨리 갚지않으면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고 압박을 가하자 김형식의원은 지인 팽씨에게 손도끼와 전기충격기를 건네주면서 살인을 지시했던 것으로 경찰서조사에서 밝혀졌다.


김의원의 사주를 받은 팽씨는 3월 3일 0시 40분경 강서구 내발산동 송씨 소유의 건물로 찾아가서 둔기로 수십차례로 송씨 머리에 때려서살해한 것으로 경찰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런데 현재 살인범과 살인교사범으로 경찰에 검거된 두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어서 앞으로 법정에서 어떠한 판결이 나올지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살해용의자 팽씨는 경찰조사에서 살해혐의를 인정했지만 김의원은 살인교사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살해교사범으로 구속된 김의원은 재력가 송씨 살해사건을 팽씨로부터 전해듣고 비로소 알았으며 팽씨가 자신에 진 빛을 갚기위해 송씨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자신은 재력가 송씨에게 돈을 빌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사람은 살해교사를 받고 살인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교사범으로 지목된 사람은 자신은 살해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매우 희한한 살인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팽씨로부터 살해당한 송씨는 강서구 내발산동에 있는 빌딩과 예식장, 그리고 다세대주택과 사우나를 보유한 3000억원대의 재력가로 알려져 있다. 강서구 재력가 송씨 살인사건의 단서는 서울시의원 김씨가 부인하고 있는 송씨에 대한 채무의 존재를 밝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번 송씨 살인교사 혐의를 받고있는 김형식의원은 신기남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보좌관을 지냈으며 2011년 서울시장 보권선거 당시 박원순 후보의 정책기획위원장을 맡고 있었다고 하며 6.4지방선거에 출마해서 현재 강서구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치인이라는 사실이다.

김의원은 재산이 6억 8천만원대로 신고되어 있다고 하는데 빛 5억원을 충분히 갚고도 남을 재산이다.


경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김형식의원 2010년~11년 재력가 송씨로부터 여러차례에 걸쳐서 5억원을 빌렸는데 채권자 송씨가 빛을 빨리 갚지않으면 6.4지방선거에 나설 때 방해를 하겠다고 압박을 가하자 자신의 10년 지기 친구 팽씨에게 자신에게 진 부채 7천만원 탕감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팽씨에게 송씨 청부살해를 사주했다는 것이다.

팽씨는 송씨 살해후 중국 심양으로 도주했다가 2달만에 결국 검거되었는데 팽씨는 김의원이 중국에서 오지말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심한 배신감을 느껴 범행전모를 자백했다고 한다.



현재 구속되어 있는 김형식의원은 자신의 청부살해 혐의를 완강히 부정하고 있으며 앞으로 받게될 재판 또한 시민을 배심원으로한 국민참여재판을 받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김형식의원의 친형과 관련된 내용이 있어서 올려봤다.

김형식 의원 친형이 2007년에 발생한 ‘골프장사장 납치사건’의 주범으로 밝혀져 또다른 충격을 주고 있다.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김형식의원의 친형은 2006년 지청소속 부장검사직에서 퇴직하고 변호사 개업을 했던 김모 전검사라고 한다. 김형식 의원 친형 김씨는 2007년 2월 정모씨를 포함해 7명과 함께 공모해서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던 H골프장 강사장과 그의 아들을 48시간 동안 납치한 후 감금한 혐의로 검거되어 교도소에서 4년간 복역했던 검사출신 전과자라고 한다.


그는 골프장 자산 1800여억원을 가로채기 위해서 각종 서류를 위조하는 등 범행을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하고 총괄했던 사실이 드러나 같이 기소된 공범 8명 중 가장 무거운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고 한다.


그가 범행에 끌어들인 정씨는 1970년 의문의 살해를 당한 여인 정인숙씨의 아들이다. 정씨는 국정원 직원을 사칭해 김 전 검사가 위조해 준 체포영장을 보여주고 강 사장을 납치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김 전 검사는 검찰에 재직할 당시에 자신이 수사했던 사장의 외삼촌 윤씨와 친하게 지내면서 범행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윤씨는 강사장으로부터 골프장 경영권을 빼앗아 3500억원에 매각하기를 원했는데 김 전검사는 강 사장을 납치해서 공범인 윤씨를 속여 골프장 토지 보상금 300억원과 매각 대금 일부인 1500억원을 가로챌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당시 경찰조사에서 밝혀졌다.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시민들의 선택을 받은 현직 서울시의원이 빛 때문에 청부살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뿐더러 검사까지 지낸 사람이 저런 끔찍한 범죄를 짓고 교도소에 복역했다는 사실이 정말 기가 막힐 뿐이다.


서울시의원도 믿을 수 없고 검사도 믿을 수 없는 험악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할까?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끔찍한 범죄에 연루될 수가 있단 말인가? 법을 지키고 모범적으로 잘 살아나가는 일반 시민들보다 훨씬 못난 사람들이 아닌가!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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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전’ 이휘소박사 핵개발 시도, 천재 핵물리학자 이휘소와 박정희, 핵개발 기밀문서 전달




7월 10일 JTBC의 ‘'독한 혀들의 전쟁-썰전’에서는 매우 이채로운 주제를 다루어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바로 한국의 핵개발 시도에 관여했던 이휘소박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날 토론에 참석한 이철희소장의 발언에 의하면 박정희 전대통령이 당시 미국에서 핵물리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휘소박사를 한국으로 귀국시키기 위해 비밀제의를 했던 것과 이휘소박사가 박 전대통령에게 핵관련 기밀문서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일이 있은 직후에 이휘소박사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이휘소박사의 사망은 미국의 짓이라는 게 지배적이었다고 말했다.



MC 김구라의 ‘우리나라가 1979년 핵개발을 88%이상 완료했다는데, 거의 다 했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강용석변호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때인 1978년 홍성에서 규모 5.0 지진이 났는데, 당시 핵실험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의혹이 있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파키스탄에서 ‘핵의 아버지’라고 존경을 받고있는 압둘 아디르 칸 박사는 ‘이휘소박사는 현대물리학의 발전을 10년이나 앞당긴 천재라고 칭송한 바 있다고 한다.


공석하의『소설 이휘소』, 김진명의『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책에서는 이휘소박사의 행적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70년대 후반 당시 이휘소박사가 박정희 전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한국에 핵개발의 시도에 도움을 주었으며 이과정에서 이휘소박사는 미국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미국CIA의 사주로 인한 교통사고로 위장한 트럭충돌사고로 사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70년대 한국이 낳은 천재 핵물리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이휘소박사의 핵개발 관련 활동과 그의 죽음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이휘소 관련 책에서는 이휘소박사가 한국의 핵개발시도에 기여를 했다고 나오지만 이휘소박사의 가족이나 제자는 이휘소박사의 핵개발 기여를 부정하고 있다.


이휘소박사는 서울대공대를 수석 입학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애미대학을 수석 졸업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천재라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또한 이휘소박사는 펜실베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펜실베니아대학의 정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했다.


이휘소 박사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세계 입자물리학계의 최고권위자로 부상하였고 20년간 모두 110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현대 핵물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그가 77년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을 거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상태다.



그가 제시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시켰으며 그의 연구결과는 다른 여러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와인버그, 살람(1979년), 트후프트,벨트만(1999년), 그로쓰, 윌첵, 폴리터(2004년) 등이 노벨상을 수상하게 했다.


일부학계에서는 이휘소박사가 이뤄낸 업적이 아인슈타인 못지않게 크다고 하며 이휘소박사는 아인슈타인박사보다 더 위대한 천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지만 이휘소의 능력은 이미 그 위에 있었다. 이휘소는 까다롭고 지루한 계산을 끝까지 파고드는 유일한 학자이다. 

그는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이며 핵과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이나 페르미보다 이미 앞서있는 창조적 지도자다’ - 오펜하이머 -


이휘소박사가 활동했던 70년대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수상자들이 이휘소박사의 이론에서 영감을 얻고 그의 이론을 도용해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실상 70년대 노벨물리학상의 진짜 주인공은 바로 이휘소박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휘소박사에게는 한가지 고민을 떠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의 박정희대통령의 친서 때문이었다.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은 이휘소박사의 명성을 알고 있었으며 이휘소박사에게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 도움을 요청했으며 한국에 귀국해 달라는 친서를 여러번 보내기도 했다.


70년대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미국과 매우 불편한 관계에 처하고 있었는데 박 전대통령의 유신체제로 인한 독재정치와 인권탄압 문제로 인해서 미국의 카터대통령과 대립관계에 놓여져 있었으며 박 전대통령의 독재정치에 불만을 가진 미국은 마침내 주한미군 철수라는 카드를 내세워서 박 전대통령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실제로 주한미군 1만7천여명이 철수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고립상태와 미군철수로 한반도 국방과 안보의 위기상황에 직면한 박대통령은 핵무기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박 전대통령은 당시 세계적인 핵입자물리학자로서 최고 권위를 가졌던 한국인 출신의 이휘소박사에게 핵관련 개발사업의 도움을 원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있는 ‘월간조선’과 ‘신동아’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과 이휘소박사가 핵개발 부문에서 소통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휘소박사가 한국에 와서 박 전대통령을 만났던 것 또한 사실로 받아들일만 한 여러 가지 정황들이 존재하고 있다.


70년대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두차례에 걸쳐서 미국에 있는 이휘소박사에게 천필서신을 보냈으며 그 서신에는 미군의 철수와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박 전대통령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실려 있었으며 이휘소박사에게 간곡하게 귀국을 요청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1974년 공무 수행차 잠시 한국을 방문했던 이휘소박사를 박정희 전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해서 만나기도 했는데 그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의 국가안보를 위한 협력요청에 대해 이휘소박사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박정희 전대통령의 거듭된 친필서신과 간곡한 요청으로 인해 이휘소박사는 결국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고 77년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전대통령을 비밀리에 만나게 된다.


1977년 5월 20일 이휘소박사는 세미나참석차 일본 도쿄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밤에 비밀리에 한국에 다녀갔다는 것이다. 이 때에 이휘소박사가 청와대에서 박 전대통령을 만나 핵개발 관련 제조원리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1달 뒤에 이휘소박사는 미국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즉, 이휘소박사가 한국에 미사일 및 핵 제조원리를 넘겨주고 난 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휘소박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 시점이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휘소박사가 일본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간 시점이 1977년 5월 20일이었고 - 이날 이휘소박사는 한국에 몰래 다녀온다 - 이희소박사가 미국 일리노이주 고속도로에서 트럭과 충돌해서 사망한 시점이 같은 해 6월 16일로서 불과 한달도 안되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이휘소박사의 일본방문 및 한국방문과 그의 죽음이 상당한 인과관계를 갖는다고 추청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77년 6월 16일 이휘소박사는 세미나 참석을 위해 가족을 동반하고 자가용을 몰고 집을 나섰으며 일리노이주의 케와네시 근처 고속도로에 들어섰을 때 느닷없이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대형 유조트럭이 중앙선을 넘어서 이휘소의 자동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자동차는 처참하게 부서졌으며 이희소박사는 사망했고 그의 가족은 다행히도 부상만 입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것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천재 핵물리학자 이휘소박사의 사망과 관련된 핵심내용이다. 


이휘소박사가 실제로 한국 핵무기개발에 도움을 주었는지, 그리고 이휘소박사의 죽음은 미국에서 사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논란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박정희 전대통령이 핵무기개발을 추진했을 당시에 ‘핵무기 기술개발 관련 핵심문서’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 핵개발 기밀문서는 박 전대통령의 개인금고에 보관해오고 있다가 박 전대통령의 서거 후에 최규하 전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5·17사태이후 전두한 신군부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두한 전대통령은 쿠테타로 대통령에 집권한 이후 미국의 추인을 받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이 핵개발기밀문서를 당시 레이건 전대통령에게 상납함으로서 미국으로부터 정식 대통령으로 추인받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두한이 핵무기 설계도와 대통령직을 교환했던 셈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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