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와 허구, 반박, 야마토정권 가야지배설, 역사외곡, 광개토대왕비의 해석




집권초기부터 역사왜곡과 독도발언으로 우리나라에 대해 사사건건 도발을 서슴치않았던 일본의 아베정권은 또다시 우리 한국에게 엄청난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그것은 이번에 일본의 국정교과서로 채택한 일본 중학교역사교과서에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임나일본부설을 구체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또다시 역사침탈과 역사왜곡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역사분야에 대해 단 일원 한푼짜리 지식도 없는 아베가 우익역사학자들의 편향된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마치 고대시대에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던 것처럼 거짓된 내용을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실고있는 것이다.


일본은 4세기후반부터 6세기후반까지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한일역사학계에 엄청난 갈등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이 고대국가시기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드는 것이 광개토대왕비와 일본서기다.


일본이 왜 틈난 나면 이렇게 허황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는지 그 근거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의 허와 실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후반부터 6세기후반까지 일본의 야마토정권이 한반도의 가야지방을 점령하고 그 가야를 본거지로 하여 백제와 신라까지도 지배력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사실상 한반도 남부지역을 그들의 식민지로 삼았다는 이론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야마토정권이 백제와 신라까지 복속시켜서 조공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 시기를 보더라도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억측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사실상 지배했다는 그 시기가 4세기후반부터 6세기후반인데 이시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엄청나게 영토를 확장해나가고 한반도 중남부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당시 동북아에서 가장 후진국이었던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지배했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않는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오랜기간에 걸쳐서 한일관계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중 하나가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인 광개토태왕의 비문이다.


광개토대왕의 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 광개토태왕이 사망한 그 이듬해에 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으며 광개토대왕의 비는 광개토대왕의 즉위시절 이룩한 업적에 관한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새겨놓은 것으로 그 높이가 3층아파트 높이(6.8m)에 이르며 18,000자가 기록되어 있고 우리나라 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유명하다.


광개토대왕의 비에는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과 업적등이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4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삼국시대의 중요한 사건과 전쟁, 그리고 국제정세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고구려의 시조와 건국에 대한 기록까지 있는 등 우리나라 고대국가시대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일본이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조선총독부 같은 식민통치기관을 가야지방에 두었다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이다.

그런데 일본학자들은 일본이 고대시기에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랫동안 한일간에 논란이 되고있는 부분은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의 기록인데 아래와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이것을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기존의 번역)


이것을 일본은 - 광개토대왕 즉위 1년인 신묘년(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모두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신묘년의 기록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고있다.



이 광개토왕비의 신묘년의 기록을 보기에 따라서는 일본측의 주장이 일리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문제는 ‘백잔○○○라를 격파하고’에서 세글자가 지워져서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한가지 문제점은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기록인데 이것은 ‘백제와 신라가 과거로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왔다’로 해석되는데 그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백제와 신라가 어느나라에게 조공을 받쳤으며 어느나라의 속민이었는지가 그 주어가 빠져서 불분명한데 그 주어가 일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신묘년의 기록을 정인보가 재해석한 설이 매우 유력한대, 정인보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정인보는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을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왔으므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백제),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했다.


즉,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는 그 주어는 바로 고구려인데 이비가 광개토대왕의 비이므로 고구려인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주어인 고구려는 생략되었다고 정인보는 해석했다.

정인보는 이 신묘년의 기록도 광개토대왕 비석의 기록이므로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주어는 당연히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인 것이 당연하므로 고구려가 왜가 처들어왔을 때 바다를 건너가 백제, ○○, 신라를 격파하고 이들국가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는 ‘왜구’ 또는 ‘가야’일 것으로 추정하며 광개토대왕은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왜가 신라를 공격해왔을 때 신라땅으로 군대 5만을 출정시켜서 신라를 침범한 왜와 백제를 토벌했던 적이 있으며 이후 백제와 신라, 가야등을 속국으로 삼았다. 이 정인보의 설이 가장 타당한 학설로 인정되고 있다.


사카와 가케노부가 1884년 만주 집안시를 방문해서 광개토대왕비를 조사했는데 사카와는 일본 육군성에서 파견한 스파이였다. 이 사카와가 처음으로 광개토대왕비를 일본에 소개했는데 그는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만든 것이 아니라 비에 종이를 대고 글자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5년 뒤인 1889년에 일본육군성은 국수주의기관지인 회여록에 광개토대왕의 내용을 공개했으며 이때부터 광개토대왕비는 임나일본부설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사카와 가케노부가 가져온 광개토대왕비의 글자를 토대로 ‘왜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와 백제, 가야를 격파하고 이들국가를 식민지로 삼았다’로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로 삼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임나일본부설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 데에 명분이 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병하는 데에 그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 임나일본부설이기 때문에 우리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경각심을 갖고 그 해석을 정확하게 하고 확실하게 정립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계속 반복되는 성질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언제가 일본이 또다시 임나일본부설을 근거 내지 명분으로 삼아서 또다시 우리나라에 침략의 야수를 뻗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지금 아베정부가 갑자기 뜬금없이 임나일본부설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서고 있지않는가?

우리가 임나일본부설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그 허구성을 낱낱이 밝히고 국제사회에 공개해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이 완전 날조임을 증명해야 한다.



제일사학자 이진희씨는 일본에 의해서 광개토대왕비의 글자가 변조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진희씨의 주장에 의하면 사카와 이후에 일본학자들이 소장하고 있는 탁본들의 글자체가 일정하지 않고 탁본들이 서로 엇갈리고 있고 없던 글자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즉, 사카와가 광개토대왕비의 글자를 변조했으며 그 후의 학자들이 다시 그곳에 석회를 발라서 변조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일본학자들이 갖고있는 탁본들이 전에 없던 글자들이 나타나는 등 서로 다른 글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서영수교수도 변조설을 주장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破百殘○○○羅 以爲臣民’ 글자는 원래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破百殘倭降新羅 以爲臣民’ 글자였는데 변조되었다는 것이다.


서영수교수가 주장한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破百殘倭降新羅 以爲臣民’ 글자를 해석하면 ‘백제 신라는 속민임에도 불구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대왕이 백제와 (그동조자인) 왜를 공파하고 신라는 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이처럼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 기록은 사카와가 비석을 발견한 후 지금까지 120년간 한일간에 합일점을 찾지못하고 최대의 논란에 휩싸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묘년조 글자의 바로 뒷부분에 ‘광개토대왕이 즉위 6년에 수군을 이끌고 백잔(백제)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백제는 신묘년에 이미 왜의 속국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묘년조 바로 뒷부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않는다.


광개토대왕은 신묘년조 이후에 백제를 공격해서 당성(강화도)과 한성(백제수도) 등을 공격하는 등 무려 58성이나 함락시키는 대승을 거두었고 백제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으며 백제는 고구려에 복속된다.


일본학자들 주장대로라면 백제는 이미 왜의 속국내지 왜의 통치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이라면 광개토대왕이 왜와 싸웠다고 기록되어야 옳은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이후(즉위9년) 보기군 5만군사를 남쪽 경상도로 내려보내 신라를 침범한 왜를 크게 물리쳤으며 왜가 크게 패퇴하여 가야땅으로 달아나자 가야땅까지 추격해서 왜를 완전 전멸시켰다고 한다.



이당시 신라땅에 창궐했던 왜는 거대한 군대의 규모가 아니라 잔당의 수준에 불과했으며 고구려군이 나타나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군세가 매우 미약한 소규모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왜는 백제를 도와서 보조적인 역할로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규모나 역할로 보았을 때도 왜는 한반도 남부지방을 지배할 정도의 큰 세력이 아니었으며 단지 신라와 싸우는 백제를 지원해주기 위해 건너온 소규모 지원병력이나 용병에 불과했다.

왜는 그당시 왜성을 갖고있지도 않았고 신라·백제·가야 틈바구니에 끼여서 보조적 역할이나 수단에 불과했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에서만 확인되고 있는데 541년부터 10여년간의 기록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즉, 임나일본부는 541년부터 10여년 간에만 존재했던 작은 관청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은 가야(안라국)으로부터 수많은 철을 집중 수입해갔으며 이외에도 가야의 철기제작기술과 토기들도 많이 수입해갔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본은 가야(안라국)로부터 철과 선진문물을 집중 수입해갔던 후진국이었다.


만일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그 지역에서 일본의 고고학적 유물이나 유적이 나와야 하는데 가야지방에서 일본의 유물, 유적은 하나도 출토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서 가야나 안라국으로부터 수입해간 철기류와 가야토기들이 수없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보면 일본이 가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가야의 선진문물과 기술을 수입해가는 가야의 부종국가내지 종속국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가야지방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남부지방을 지배하는 식민통지기구가 아니라 가야의 선진문물을 수입해가는 창구인 일본의 외교사절의 집단거주지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나일본부는 지금의 영사관 정도의 관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당시 일본은 철을 독자적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는 매우 후진적인 집단이어서 가야에 빌붙거나, 가야에 내투해서 가야의 선진문물을 수용해갔던 가야의 부종집단에 불과했다는 의미다.


당시 5~6세기 한반도에서 가장 약한 세력이었던 가야를 상국으로 섬기고 선진문물을 수입해갔던 왜(일본)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완전 허구에 지나지 않는 가설일 뿐이다.

자신들에게 선진문물과 선진기술을 전수해주었던 상국(가야)을 후진국인 일본이 어떻게 지배할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욱 타당하다고 본다. 즉, 가야가 일본에 대해 정치적·문화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2010년 3월 한국학자와 일본학자가 공동으로 설립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 아니며, 임나일본부라는 용어자체를 페기하기로 완전 합의를 보았다. 즉, 한일간 역사학자들간에 공식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을 공식 천명한 것이다.











Posted by 프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