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 인간화석의 형태와 모습,이유 / 폼페이 화산폭팔




감독 폴 W.S. 앤더슨

출연배우 - 키트 해링턴, 에밀리 브라우닝

개봉일 - 2월 20일





2월 20일날 개봉을 앞두고 있는 허리우드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의 개봉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서 실제로 2,000여년 전에 일어났던 폼페이도시의 대참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은 사실 이번이 네번째로 만들어진 영화이며 20세기 초반에 두번 제작되었고 1960년에 미국 허리웃에서 세번째로 제작되었던 적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어서 큰 화제가 되었던 영화로서 20세기 최고의 화제작 가운데 하나이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에 어떠한 내용과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는 지 아닌 실제 역사를 통해서 폼페이의 대참사를 한번 살펴보도록 한다.




♣ 폼페이 화산폭팔과 대참사, 그리고 인간화석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국으로 알려진 로마제국에 큰 재앙이 닥쳤다.

전대미문의 큰 재앙이 로마제국의 한 지역 폼페이도시를 강타한 것이었는데 불과 18시간 만에 5,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5,000여명의 폼페이주민들을 죽인 것은 폼페이도시의 북서쪽에 있는 베수비오 산이었다.

바로 폼페이의 뒤쪽 언저리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대폭팔을 일으켜서 하루 사이에 폼페이라고 하는 도시 하나가 통째로 사려져 버렸다.




AD 79년에 로마제국의 10대 황제인 티투스 황제 때에 발생하였던 폼페이 대참사 사건으로 실제한 역사 사건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남부 나폴리만에 위치해 있던 폼페이는 로마 상류층들의 여름철 휴양지이자 무역이 활발했던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었다.


아름다운 바다로 둘러쳐진 천혜의 항구도시 폼페이는 당시 활발한 무역과 상업으로 인해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으며 동시에 로마귀족들이 휴양지로 각광을 받았던 가장 화려했던 항구도시였다.

재정로마 황제의 식민도시로서 로마의 남부도시 중 가장 발전했던 도시인 폼페이가 어느 한 순간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화산폭팔이 발생하게 되고 그 대참사로 인해서 약 2,000~5,0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번성했던 폼페이도시는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같이 가장 화려했고 번성했던 폼페이를 24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페허로 만들어버린 주범은 바로 폼페이도시 뒤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었다.

AD 79년 8월 폼페이 인근 북쪽에 있던 베수비오 산 속에서 마그마가 들끓고 있었고 팽창을 거듭하던 마그마가 급기야 베스비오 산 정상을 뚫고 나와서 이글거리는 화산재와 가스구름을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베스비오 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가스구름은 15km까지 날아올랐다고 하며 당시 베스비오 화산에서 내뿜는 뜨거운 마그마 화산재는 섭씨 1800도의 온도로 무섭게 폼페이 시가지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으며 뒤이에 유독가스가 안개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당시 폼페이주민의 인구는 2만 명 정도(유동인구까지 포함하면 5만 명)였는데 화산폭팔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폼페이주민들은 베스비오 산에서 분출되기 시작한 화산재 및 가스구름을 대수롭지 않은 자연현상의 하나로만 생각하고 있다가 큰 봉변을 당하게 된다.



한번 분출되기 시작한 베스비오 화산은 1분에 무려 1억톤의 화산분출물을 쏟아내었고 시속 100km의 속도로 빠르게 쏟아져 내려오는 화산분출물은 1800도라고 하는 뜨거운 열기로 폼페이의 주민들과 건물들을 마구잡이로 녹여버리고 집어삼키고 있었다.


결국 베스비오 화산은 18시간 만에 1,000억톤이라고 하는 엄청난 화산분출물들을 토해내었고 5,000여명의 폼페이주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폼페이도시는 화산재와 돌들에 의해서 완전히 함몰되었다고 한다.



폼페이도시는 나중에 로마에서 구조단을 파견하였지만 너무나도 처참하게 파괴되어서 손을 전혀 쓰지 못했다고 하며 1,600년 동안이나 화산재 속에 파묻혀 있다가 1594년 수도관 건립공사를 하던 중 폼페이도시의 일부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폼페이의 발굴을 계속되고 있다고 하며 현재 80%정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18시간이라고 하는 짧은 시간에 화산폭팔로 인해서 5,000여명이라고 하는 많은 사상자들과 도시 전체가 함몰되는 대형참사가 일어난 이유는 지금처럼 신속한 재난정보 통신체계가 발전하지 못한 까닭도 있지만 폼페이주민들이 화산폭팔에 대해서 경험과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의 시기에 발생했던 재난으로서 화산폭팔 현상을 폼페이시민들은 평범한 자연현상이나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의 섭리라고 여기면서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피해규모가 더욱 커진 것이다.


또한 폼페이에 살고 있던 귀족들의 화려한 사치생활이 참사의 피해를 더욱 증폭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1594년 시작된 폼페이 발굴을 통해서 드러난 폼페이의 유물, 유적들을 살펴보면 당시 폼페이도시는 상당히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생활상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땅속에서 잿더미에 파묻혀 있다가 발굴된 폼페이의 유적에선 남녀 공용목욕탕들이 유독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 공용목욕탕은 상당히 규모가 큰 것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이 남녀 공용목욕탕 안에는 별도로 작은 여러 개의 내실이 갖추어져 있어서 여기에서 남녀간 관계가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시 폼페이시민들이 상당히 향락생활과 쾌락생활에 탐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폼페이벽화들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 폼페이벽화는 그 당시의 폼페이주민들의 생활형태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는 자료이다.

이 폼페이벽화에는 특히 남녀간 관계를 하는 모습의 그림들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발굴의 결과물로 볼 때 당시 폼페이주민들은 향락적인 생활에 깊이 빠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폼페이발굴에서 거대한 신전들이 많이 발굴되었으며 귀족들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저택들도 상당수 발견되었으며 값비싸고 화려한 도자기들과 장식품들도 많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발굴된 폼페이 시가지는 거리가 계획적으로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상수도시설, 하수도시설등을 모두 갖춘 근대식 설비를 완비한 도시라서 많은 놀라움을 주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에 이정도로 잘 갖춰진 도시를 건설했다면 이 도시에 살았던 주민들은 상당한 수준의 문화수준을 향유했을 뿐만 아니라 크게 번성했던 도시임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폼페이는 무역과 상업들을 통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도시였으며 귀족들이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즉, 폼페이 대참사는 타락하고 쾌락에 빠져있는 폼페이 주민들에 대한 신의 분노와 저주가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될 정도이다.

시속 100km 속도로 흘러내려오는 화산분출물(마그마등)이 4m의 높이로 폼페이도시를 함몰시켰다.



폼페이주민들의 죽음은 길고도 고통스러웠을 것으로 보여진다.

발굴을 통해서 그당시 죽은 폼페이주민들의 시신들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을 나중에 석고상으로 견본을 만든 석고인간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석고인간들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1800도의 온도로 시속 100km 속도로 빠르게 쏟아져 내려온 마그마와 화산재로 인해 사람들의 살과 뼈가 타들어가고 녹아버렸고 화산재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은 도시전체를 뒤덮은 유독가스에 질식되어 서서히 고통을 느끼면서 죽어갔던 것이다.

폼페이주민들의 죽을 당시의 엄청난 고통스러움이 오늘날 고스란히 석고인간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폼페이 화산폭팔 당시 한 용감한 청년이 살아남아 그날의 참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가 소플리니우스이다. 당시 참상을 기록한 소플리니우스의 기록이 너무도 처참하고 기괴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소플리니우스의 기록을 믿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의 기록이 사실로 밝혀진 것은 1600년 이후의 일이다. 폼페이발굴을 통해서 소플리니우스의 기록이 사실로 인정된 것이다.



♣ 인간화석의 구체적인 형태와 모습들




그럼 1594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발굴되었던 폼페이의 발굴 유물들과 인간화석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폼페이발굴의 결과는 전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거대하고 대단하다고 한다.

발굴된 폼페이는 거대한 신전과 상점들 잘 정비된 도시의 도로들, 상수도관. 하수도관들이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 중 가장 번성했던 도시, 가장 화려했던 도시, 가장 발전했던 도시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발굴결과 가장 놀라운 것은 죽어있는 폼페이 사람들의 석고상이었다.

화산재에 묻힌 사람들은 육신은 부패되었지만 석고상을 떠놓은 듯 그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검투사, 그리고 임산부까지도 석고인간의 모습으로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포리비우스의 집에서 가족들에 의해 둘러쌓인 임산부의 죽음이 발견되었고 검투사들의 막사에서는 보석으로 치장한 여인의 유해가 검투사들의 시신 속에 함께 발견되었다.

우체국 부근에서 발견된 유골에서는 금이 가득 찬 주머니를 움켜줘고 있었다고 한다. 죽기 직전 폼페이의 한 남자는 금에 대한 미련 때문에 폼페이를 빨리 탈출하지 못한 채로 죽어간 

듯하다.


여인숙에서 발견된 노예소녀의 팔에는 글씨가 새겨진 팔찌가 발견되었는데 그 팔찌에는 ‘주인으로부터 노예소녀에게’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즉, 이 노예소녀는 자신의 주인의 정부였던 것이다. 이 노예소녀는 자신의 정부이자 주인으로부터 팔찌를 선물 받고 함께 여인숙에서 밤을 보낸 후 밀려오는 화산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곁에 주인이 없는 것으로 봐서 그 주인은 참상을 당하기 전에 혼자 달아나 버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그 이외에도 다양한 석고인간의 모습들이 놀라움을 주고 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연기를 피해 고개를 숙인 남자, 서로를 끌어안은 연인 등 다양한 형태는 물론이고 금화를 잔뜩 움켜쥔 탐욕스러운 귀족, 금목걸이와 은제 식기들을 챙겨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여인, 수술용 칼과 겸자를 챙기려던 의사 등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최후의 모습까지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폼페이의 발굴을 통해서 드러난 석고인간들의 모습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당시의 주민들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주고 있다.

현재까지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폼페이의 유물과 석고인간들은 그 시대를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다.

이처럼 도시전체의 모습과 사람들의 형태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기는 폼패이가 최초일 

것이다.


폼페이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역사와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울러 1세기경 로마시대의 역사도 관찰할 수가 있다.

지금은 350만 명의 주민이 베스비오 산 주변에 살고 있다. 내가 언제 인간들에게 참사를 가져다 주었냐고 발뺌하듯이 베수비오 산은 현재 아주 아늑하고 편안한 산처럼 운치 있는 산으로 남아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그 당시와 같은 격렬한 화산의 분화는 2,000년을 주기로 한번씩 분화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음 분화의 시기는 언제가 될까요?








Posted by 프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