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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폐위이유, 인조반정, 개혁정치, 중립외교정책, 후금과의 관계, 광해군의 업적



광해군은 과연 뛰어난 개혁군주였는가, 아니면 포악한 폭군이었는가?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크게 위의 두가지로 엇갈린다. 광해군은 1608년 선조의 죽음으로 왕위를 물려받아 15년간 왕으로 군림하다가 1623년년도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쫒겨나 귀양가는 안타까운 신세로 전락했다.



무려 15년이나 일국의 군주로 군림했던 광해군이 왕위에서 쫒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광해군을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옹립했던 인조반정은 왜 일어났으며 과연 정당성이 있는 행동일까?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있는 상식에 의하면 광해군하면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매우 포악한 왕이나 폭군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되어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과 재야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광해군을 좀더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노력들이 꾸준히 있어왔다.


광해군은 15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동안 조선의 국왕으로서 재위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반정이 일어나 왕위에서 폐위되는 바람에 역사적관심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왔다.

그리고 승자들이 기록했던 역사적 사실로 인해서 광해군이 이루어냈던 여러 개혁적인 정책들은 평가절하되었고 단지 광해군은 폭군이라는 이미지만이 씌어져왔다.



광해군 재위 시절 대북파가 정권을 잡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던 서인들은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 서인들이 주축이 되어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 광해군을 체포한 후, 왕위에서 폐위하고 능양군(인조)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반정을 성공시킨다.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 광해군을 폐위시켰던 인조반정은 어떤 명분으로 일으켰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년 동안이나 왕으로 군림해왔던 군주를 쫒아냈다면 그만한 명분과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 반정군이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유 -


반정군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난 후 광해군의 죄상을 밝혔는데 그 핵심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광해군이 궁궐등 축조공사를 많이 벌여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2.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인 후금과 화친하였다

3.광해군이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


인조반정을 일으켜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반정세력들은 위와 같은 죄목을 들어 광해군을 폭군으로 칭하며 폐위시킨 명분으로 삼았다.


인조반정을 일으켰던 반정세력들이 광해군의 죄목으로 삼았던 위와 같은 일들이 과연 사실일까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이 궁궐을 새로 축조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으면서 궁궐 대부분이 불에 타고 사실상 재만 남았던 상황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수도 한양으로 돌아왔던 당시 경복궁이 완전 불에타 소실되어 없어진 상황에서 선조나 광해군은 덕수궁을 임시궁궐로 사용했었는데 그 당시 덕수궁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양반의 저택을 임시로 개조해서 사용했다.


광해군은 왕이 되고 난 후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한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 불에 타서 재만 남았던 궁궐터에 경복궁을 다시 지었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새로이 지었다.


7년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궁궐을 다시 지은 것은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행위인데 이것을 이유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고 죄목으로 삼는 것은 너무 과장된 표현이며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그 어떤 왕이라도 광해군처럼 궁궐을 다시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의 두 번째 죄목으로 명나라와의 의리를 배반하고 오랑캐인 후금과 화친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이 죄목을 한마디로 말하면 앞뒤가 전혀 맞지않는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이 통치하고 있을 당시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급박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과거 명나라 중심의 동북아 질서에서 명나라가 쇠락해가고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여진족이 세운 후금(청나라)이 강성해지는 상황으로 국제정세가 바뀌고 있던 상황이었다.

즉, 명나라는 사실상 쇠퇴해져서 그 명운이 종말을 고하는 상황이었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새로운 동북아의 강자로 떠오르는 동북아 정세를 정확하게 간파했던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표방해서 국가적 실리를 취했던 것이다.



17세기 초반 명나라와 후금이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었는데 명나라가 조선에게 원군파병을 요청해왔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던 조선에서는 명나라에게 원군을 파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원군을 파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후금을 적으로 만드는 매우 위험천만 일이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당시 사대주의와 숭명주의에 빠져있던 대다수의 조정대신들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원군을 파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강국 후금(청)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광해군은 어쩔 수 없이 강홍립을 원수로 삼아 군사 12,000명을 파견했는데 만주에서 명나라군사가 청군에게 패한 상황에서 강홍립의 12,000명의 조선군은 청군에게 곧바로 항복해버리고 만다.


즉,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사는 청나라군사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채 청나라에게 투항하는 데 이것은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외교를 펼치겠다는 광해군의 의도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당시 명나라는 내란이 일어나서 분열된 상태로 점점 망해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여진족의 모든 부족들을 통합해서 새롭게 국가를 건설한 후금(청)은 매우 강성해가고 있어 동북아의 저울추가 명나라에서 후금으로 이동해가는 국자정세를 광해군은 정확히 간파하였고 광해군과 교감을 이뤘던 강홍립원수는 명나라의 원군으로 파병되고 외형상 명나라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청나라에게 항복해서 청나라와 조선이 적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준 것이다.


이렇게 광해군은 조선의 대신들이 망해가고 있는 명나라와의 의리만을 중시하면서 비현실적인 대의명분과 사대주의에 빠져있을 당시에도 정확하게 동북아의 정세를 꿰뚫고 있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반영한 실리외교, 중립외교를 추구하였다.


즉 광해군 폐위의 두 번째 죄목으로 지적되고 있는 명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 후금과 화친하였다는 부분은 죄가 아니라 조선의 실리를 최대한으로 추구했던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광해군의 이같은 전략 때문에 광해군 당시에는 조선과 후금 관계가 매우 친밀했으며 당시 후금의 칸 누루하치는 조선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덕분에 후금과의 전면 전쟁을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정대신들은 이같은 광해군의 실리중립외교를 당시 망하기 일보적전인 명나라와의 의리를 배반했다고 엄청 비판했으며 결국 광해군을 왕에서 쫒아내는 구실로 삼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의 침략을 불러들이는 엄청난 정책미스를 범하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왕이된 인조는 광해군과 달리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하면서 친명반청정책을 추진하다가 결국 청태종 홍타이치의 분노를 사서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고 청태조에게 항복 삼배를 올리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된다.

광해군이 추진했던 중립실리외교정책을 반이라도 따라했었다면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에 대한 무조건적이 사대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후금(청)나라에 대한 무조건적인 화친도 아닌, 조선의 이익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은 왕에서 폐위될 만한 죄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막고 조선을 지켜낸 혁혁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광해군의 세 번째 죄목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했다는 부분이다.

이부분이 광해군의 가장 실질적인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은 원래 적장자 출신이 아니라 선조의 후궁의 소생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죽자 그뒤를 이어 왕비로 책봉된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이 광해군에겐 커다란 후환이자 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광해군 재위당시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사건이 실제로 방생하였고 역모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이 역모모의사건으로 인해서 영창대군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인목대비는 폐위된다.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은 사실 잘못된 일이다. 그렇지만 영창대군이 역모사건에 연루되는 일이 발생하자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영창대군을 죽인 것은 권력의 속상상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생을 두명이나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태종과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세조가 그 일로 인해서 반정이 일어난 것은 아니며 또한 왕위에서 쫒겨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광해군을 왕위에서 쫒아낸 인조반정이 일어난 진정한 이유는 다음 두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것, 이것이 반정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 당시 정권을 담당했던 동인세력이나 서인세력 모두 명나라를 숭배하는 숭명주의와 사대주의에 철저하게 빠져있었다.

당시 조선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유교와 성리학의 교주인 공자, 맹자, 주자가 태어난 한족의 나라 명나라를 스승의 나라, 심지어는 조상의 나라라고까지 추겨세우면서 크게 섬겼으며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조선의 조정대신들은 광해군이 후금(청)나라를 중시하는 실리중립외교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자신들이 신봉하는 유교적 가치를 위반하는 행위로 간주한 것으로 이러한 이유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명분으로 작용한 것이다.


즉, 자신들의 나라보다 군주보다도 공자, 맹자, 주자와 그들의 사상이 조선 사대부들에겐 더욱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다. 정말 멍청하기 그지 없던 조선 사대부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완전히 유교와 성리학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약보다도 더 무섭게 유교와 성리학에 중독되어서 결국엔 우리 조선을 소중화(작은 중국)이라고까지 부르고 다녔을 정도다.

즉, 우리 조선은 독자적인 나라가 아니라 중국의 방계혈족으로 작은 중국이라는 얘기다.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는 조선 사대부들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이이첨, 정인홍 같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했던 광해군 집권시절 정치적으로 소외당했던 서인파 세력들이 권력을 획득하려는 욕심이 인조반정의 두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이첨 등 대북파가 권력을 독점하자 정치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었던 김류, 이귀, 김자점, 이괄 등 서인세력이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고 광해군에게 앙심을 품고있던 능양군과 훈련도감을 포섭해서 반정을 성사시킨 것이다.


반정군 2천명의 군사가 불시에 궁궐로 쳐들어갔고 궁궐내부의 훈련도감병사들도 반정군과 내통함으로써 쉽게 궁궐문을 열수가 있었다고 한다.

반정군이 대궐로 쳐들어오자 광해군은 대궐을 빠져나가 안국신이라는 의관집에 숨어있었는데 정남수의 밀고로 결국 반정군에게 체포된 후 제주도로 유배가서 위례안치된다.


49세 때 왕위에서 쫒겨난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했으며 67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폐위된 왕 치고는 상당히 오래 장수했다.


광해군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해보면 광해군은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보다는 더 뛰어난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이 포악한 군주였다는 실록의 기록은 승자의 관점에서 씌어진 일방적인 기록일 뿐이다.

광해군은 재위당시 공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대동법을 실시했던 현명한 군주였다.


대동법은 각지역의 특산물을 국가에 바치는 제도인 공납이 백성들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자 모든 특산물을 쌀로써 대신 납부하도록 하는 제도로 가난한 소작인들은 부과대상에서 제외시켰으며 오직 토지를 소유한 자들만 대상으로 부과했던 제도이다.


즉, 광해군은 폐단이 무척 심했던 공납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자 대동법을 실시해서 - 당시엔 경기도 땅에 한해서 실시 - 가난한 백성들을 공납부담을 완화시켜주었던 것이다. 광해군이 실시했던 대동법은 당시 사대부 기득층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지만 광해군은 소신을 갖고 끝까지 관철시켰다.

결국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사대부 기득권층들에게는 광해군이 자신들의 이익의 일부를 빼앗아가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러한 광해군의 개혁정치 등이 조선 사대부들에게 반감을 불러왔던 것이고 광해군을 폐위시키고자 하는 반정(쿠테타) 지지세력들을 손쉽게 많이 모을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광해군을 폐위시켰던 인조반정의 진짜 이유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광해군이 배신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서인세력들이 정치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권력욕심이 두 번째 이유이며 서민들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양반사대부들에게는 손해가 되는 대동법 등 개혁정책들에 대한 양반사대부들의 반감이 인조반정의 세번째 이유인 것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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