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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적인 미녀스타 ‘그레이스 켈리’의 영화와 죽음 (★모나코왕비★)

 

 

 

 

허리웃여배우에서 일약 모나코왕비가 된 당대의 미녀스타,그레이스 켈리

 


미국 여배우, 모나코의 왕비
출생 1929년 11월 12일
사망 1982년 9월 14일
키 170cm, 체중 49kg

 

 

이름보다도 더 아름다웠던 금발의 우아한 미녀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는 헐리우드의 메이저 영화배우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손꼽히는 당대의 미녀스타였다. 그레이스 켈리가 출연한 영화 ‘백조’처럼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의 레니에 왕과 혼인함으로써 모나코왕비가 되었으니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현실이 되어 이루어지는 결코 흔치 않는 특별한 삶은 살다간 20세기의 가장 센세이셔널한 인물이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왕비가 되기전인 1951년부터 56년까지 약 5년 동안의 짧은 배우 생활을 하였을 뿐이지만 그녀가 허리웃 영화계에 남긴 족적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하이눈’ ‘모감보’ ‘이창’ ‘나는 결백하다’ ‘다이얼M을 돌려라’ ‘백조’ 등 그레이스 켈리가 출연한 영화들은 한결같이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고 허리우드를 대표하는 당대의 걸작이 되었다. 더욱이 55년 영화 ‘갈채’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여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의 톱스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던 그레이스 켈리!

그레이스 켈리는 완전무결한 미모와 고혹적인 매력 그리고 항상 미소를 머금은 외모와 침착하고 교양미 넘치는 매너로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상대 배우들과 주변 스텝으로부터도 찬사와 칭찬을 아낌없이 받을 정도로 미모뿐만 아니라 교양미도 갖춘 완전무결한 여배우였으니 어쩌면 그녀가 여성 최고의 지위인 모나코왕비가 된 것은 그녀의 타고난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된다.

 

영화 ‘이창’에서 그레이스 켈리와 함께 공연했던 제임스 스튜어트와 감독 앨프레드 히치콕은 그녀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고왔으며 모두에게 친절히 대하는 여성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지중해 연안의 작은 나라 모나코의 왕 레니에 3세는 아름다운 허리웃 미녀배우와 결혼하길 희망했는데 처음에는 마릴린 먼로와 지나 롤로브리지다를 대상으로 고려해보다가 마침 영화 ‘나는 결백하다’의 촬영차 프랑스를 방문한 그레이스 켈리를 보고 그녀를 결혼상대로 낙점했고 결국 그레이스 켈리와 결혼에 성공하였으며 모나코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는 어쩔 수 없이 영화배우의 삶을 버려야만 했으니 미국 허리우드 영화사들과 세계의 팬들에게 그녀를 다시 볼 수 없는 아쉬움과 미련만 남기게 되었다.


 


 

모나코의 레이니에 왕이 허리웃 미녀스타와 결혼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얘기들이 전해지는데 그 중 유력한 하나는 당시 모나코는 재정적인 위기가 닥치자 그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관광수입의 증대를 꾀하였는데 허리웃의 인기여배우와 결혼함으로써 지중해의 작은 나라인 모나코를 세계에 홍보하고 수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함으로써 재정수입의 증대를 도모하였으며 레이니에 왕과 그레이스 켈리의 세기적 결혼은 이러한 음모에서 비롯되었다고 미국 소설가 ‘로버트 레이시’가 주장하기도 하였다.

 

유럽의 약소국인 모나코의 국가 수익 증대를 위해서 일종의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된 그레이스 켈리는 결혼 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술과 남성편력에 빠짐으로써 모나코의 홍보대사로서의 품위를 잃자 결국 그녀는 모나코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전락해 버렸으며 그녀가 더 이상 모나코의 이미지의 상징의 가치를 상실해버리자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그녀를 모나코가 버렸다는 것이다. 즉, 모나코의 여름 별장에서 귀가하던 중 차량 사고로 숨진 사건도 역시 사전에 계획된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영국 황태자비 다이애나의 사건과 닮은 점이 너무 많다)

 

 

 

 

로버트 레이시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모나코왕비인 그레이스켈리를 왕실에서 사고로 위장해 죽였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사고 후 왕비가 장시간 방치됐고, 즉시 치워진 사고현장과 현장에 있지도 않은 목격자를 내세운 점 등을 들었다.

이에 대해 모나코 왕실에서는 사고 당시 동승했던 스테파니 공주의 증언을 들어 평소 뇌졸중을 앓아오던 왕비가 운전 미숙으로 사고사를 당했다고 논란을 일축한 바 있다. 그레이스 켈리의 죽음은 사고사인가 아니면 왕실의 음모에 의한 살해사인가? 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12년 올해로 그레이스 켈리가 죽은 지 30주년이 되는 해로서 팬들에게는 그녀에 대한 향수가 어느때보다도 각별하게 느껴지는 해이기도 하다. 

1982년 5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의 왕비’보다는 그냥 ‘은막의 여왕’으로 남는 편이 더욱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그녀를 사랑하는 세계의 수많은 팬들의 사랑과 성원 속에 더 많은 걸작영화들을 만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을 것이고 그녀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과 만나 결혼하여 행복한 여생을 즐기며 그녀를 흠모했던 수많은 팬들도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당대의 최고의 미녀배우였던 그레이스 켈리는 지중해의 작은 도시국가인 모나코를 위기에서 살려낸 모나코의 구원자였다.

그녀가 한창 허리우드에서 주가를 높여가며 톱스타로서 활동할 때 모나코는 사실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던 위태로운 나라였다. 사실 모나코는 나라라고는 하기에도 곤란한 세계에서 두번째로 작은 도시국가로서 크기는 서울보다도 작은 자치구만한 면적에다 인구는 고작 32,000명에 불과하며 국방과 경제는 프랑스에 의존하며 연명해가는 보잘것 없는 소국이었다.

더우기 47년 프랑스와 맻은 조약에서 후사가 없거나 자립 경제를 하지 못하면 프랑스와 합병한다고 협정을 맺은바 있어 경제난에 허덕이던 모나코의 레니에 3세는 당시 모나코의 돈줄을 쥐고 있던 그리이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의 제안에 따라 빅 이벤트를 하나 만들었다.

 

 

그 이벤트란 미국 허리웃의 미녀스타와 혼인함으로써 세계적인 이슈를 만들어서 모나코를 홍보하고 미국과 유럽의 부유한 관광객들 끌어들여 관광수입을 증대시켜 국가재정을 확충한다는 것이었으며 그 혼인 대상이 바로 그레이스 켈리였다.

그레이스 켈리는 56년에 레니에 왕과 혼인함으로써 모나코를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모나코의 관광수입 증대에 큰 몫을 담당함으로써 오늘날 모나코를 세계적인 부국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모나코는 국민소득 67.000달러로 세계 4위 국가이다)

 

그리고 프랑스로부터 모나코를 완전 독립시키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하였다. 세기적인 미녀배우였던 그레이스 켈리가 자신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였다. 미국과 유럽의 부호들은 그레이스 켈리의 명성을 듣고 모나코로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여기에 힘입어서 모나코는 카지노 사업과 관광사업, 자동차 경주 사업등을 유치하여 오늘날 지중해의 가장 유명한 휴양도시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작고 초라한 빈국이었던 모나코를 세계적인 부국으로 변모시킨 것은 그레이스 켈리의 값진 희생이 가져다준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뛰어난 아름다움이 모나코라는 작은 나라를 살린 셈이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하여 여인네의 아름다움이 나라를 망치는데 일조한다고 하지만 그레이스 켈리의 경우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위기에 빠진 나라를 살렸으니 흥국지색(興國知色)이 된 셈이다.

 

 

 

 

 

 

  

 

 

레이스 켈리가 27년간 거주했던 모나코 왕궁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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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적인 매력의 소피아 로렌 (Sophia Loren)

 

1934년 9월 20일생

출신지 이탈리아 로마

신체 174cm

 

  터질듯한 풍만한 몸매와 시골처녀의 섹시한 매력으로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과 헐리우드까지 공략한 소피아 로렌은 이탈리아출신의 세계적인 배우다
이탈리아의 실바나 망가노, 지나 롤로브리지다 등의 글래머형 여배우의 맥을 잇는 소피아 로렌은 볼륨있는 육체에서 뿜어져나오는 관능적이고 고혹적인 매력으로 전세계의 남성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AFI가 선정한 25명의 여배우 중 살아있는 다섯 전설 가운데 한 명이며 이탈리아인으로는 유일하다
 
소피아 로렌은 아버지와 이혼한 홀어머니와 함께 나폴리 빈민가에서 자라났는데 17세때 그녀가 우연히 참가한 나폴리의 미인대회‘바다의 여왕’에서 2등으로 입상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180도 바뀌게 된다
 미인대회 심사위원 카를로 폰티의 눈에 띄게 되고 카를로 폰티는 이탈리아의 명망높은 영화제작자로 그녀의 미모와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녀를 배우에의 길로 인도하고 키워준 은인이면서 후일 그녀의 생애 유일한 남편이 되었다

소피아 로렌은 51년 영화 ‘쿼바디스’로 (단역)데뷔하였고 ‘나폴리의 황금’ ‘해녀’ ‘엘시드’ ‘두 여인’ ‘로마제국의 멸망’ ‘카산드라 크로싱’ ‘해바라기’등 100여편의 작품에 출연하였고 77세인 10년과 11에도 영화 룰티모 가토파르도: 리트라토, 영화 비커밍 버트스턴에 출연할 정도로 최근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61년 제작된 ‘두 여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그녀의 주가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올라갔고 그녀의 관능적인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이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셈이다
소피아 로렌은 섹시한 이미지와는 달리 ‘닥터 지바고’ ‘길’을 만든 이탈리아의 명제작자 카를로 폰티의 충실한 아내이자 영화인으로 성실한 삶은 살고 있는 모범영화인이다 

소피아 로렌의 이미지는 명랑하다기 보다는 이지적이고 글래머스하면서도 카리스마가 있는 고결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언뜻보면 건강한 시골처녀의 풋풋한 섹시미를 풍기지만 그녀가 출연한 블록버스터급 대작인 ‘로마제국의 멸망’ ‘엘시드’등에서는 관능적 매력보다는 우수에 젖은 여인의 고결한 아름다움과 청초함이 더욱 돋보인다
이렇게 대작에서 소피아 로렌은 ‘우수’ ‘애수’의 슬픔을 간직한 청초한 여인, 고고한 여인 이미지가 더욱 두드러지게 다가온다

‘로마제국의 멸망’에서는 몰락헤가는 로마를 되살리기 위해 고뇌하는 공주로, ‘엘시드’에서는 아버지의 원수로 변해버린 사랑하는 약혼자를 복수해야하는 자신의 운명 앞에 고뇌하는 한 여인으로, ‘해바라기’에서는 전쟁에서 죽었다는 전남편이 다시 돌아왔을 때 현실과의 괴리에서 오는 아쉬움과 미련속에서 역시 고뇌하는 연약한 여인의 이미지에서 그녀는 “우수에 젖은 고결한 아름다움”이 진하게 베어난다
‘엘시드’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카리스마있는 고결미의 절정을 보여준다
마치 세상의 희노애락을 초월한 신선의 모습처럼 ~

이렇듯 소피아 로렌은 외관상으론 터질듯한 육감적인 몸매에서 풍겨나오는 관능적인 매력보다는 우수에 젖은 청초한 고결미가 그녀의 진정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수상 내역

수상1958년 제22회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1961년 제15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1961년 제27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1961년 제14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1962년 제3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1974년 제22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1991년 제6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공로상
1994년 제4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명예금곰상
1995년 제5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평생공로상
2001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특별상 

 

 

 


 

(출연작품)

나인 (2009)
션쇼 (1994)
오로라 (1984)
불의 여인 (1979)
굴 없는 표적 (1979)
암호명 S 비밀 지령 (1978)
특별한 날 (1977)
안젤라 (1977)
산드라 크로싱 (1976)
코스마토스 . 여행 (1974)
밀회 (1974)
돈키호테 (1972)
레이디 리버티 (1971)
해바라기 (1970)
카운테스 프럼 홍콩 (1967)
베스크 (1966)
V2 3인의 첩보전 (1965)
이태리식 결혼 (1964)
로마 제국의 멸망 (1964)
보카치오 70 (1962)
엘 시드 (1961)
두 여인 (1960)
검은 난초 (1958)
잃어버린 전설 (1957)
자랑과 정열 (1957)
해녀 (1957)
소렌토의 염문 (1955)
나폴리의 황금 (1954)
쿼바디스 (1951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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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에 젖은 미녀 ‘비비안 리’

   

 

 

 

비비안 리 1913년생 인도 출생
국적 영국
신장 161cm
런던의 로얄 아카데미에서 연기 공부

역대 허리웃 여배우중 가장 고전적인 미인이자 미인의 원조격인 비비안 리는 허리우드 미녀 배우 하면 항상 떠오르는 여배우다
출연한 영화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비비안 리는 40~50년대 허리우드 영화에 가장 강렬한 족적을 남겼고 그리고 그녀의 영화처럼 54세 나이에 바람처럼 사라져갔다 비안 리가 출연한 명작은 4~5편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녀만의 아름다운 카리스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세계 팬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전세계 팬들의 심금을 울리며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애수’ ‘안나 까레리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름만 들어도 활홀한 이 영화들에 당당히 주연이라는 명함을 내걸고 출연한 비비안 리를 생각하면 ‘우수’ ‘고뇌’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우수에 찬 미인, 고뇌하는 미녀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떠오르는 건 비비안 리가 출연한 ‘애수’에서 보여준 청순하고 가련하고 슬픈 여주인공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각인되어서인가 보다

 

06년 영국의 버틀그린 음료회사가 조사한 역대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에 비비안 리가 1위에 뽑혔다고 하며 2위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이고 3위는 캐서린 제타존스가 뽑혔다고 하는데 비비안 리가 죽은 지 40년이 지난 후에도 미인 1위에 뽑힐 만큼 그녀의 미모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보다 더 아름답다고 평가를 받았다고 하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어렸을 때 형님이나 누님들에게 자주 듣던 말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00% 미인이고 데보라 카나 오드리 헵번은 99% 미인이라는 말이었다

비비안 리는 35년 ‘날 보고 웃어봐요’로 영화계에 데뷔하였고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의 눈에 들어 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스칼렛 오하라 역으로 출연하여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오른다 이 영화는 허리우드 역사상 다섯 손까락에 꼽힐 만한 대작중의 대작으로 이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해 뛰어난 연기력과 아름다운 미모를 동시에 인정받은 비비안 리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는다


깜찍하고 여우같으면서 애교스러운 연기는 오직 비비안 리만 가능한 연기력이었고 그녀를 스칼렛 오하라 배역을 위해 스카웃한 데이비드 셀즈닉의 안목과 예상은 적중했고 크라크 게이블과 더불어 호흡을 멋지게 맞추며 정열적으로 연기를 펼친 그녀로 인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불후의 걸작이 되었고 흥행에도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출연 1년 후 40년 영화 ‘애수’로 또한번 스타덤에 오른다


허리우드 미남스타인 로버트 테일러의 연인으로 나온 비비안 리는 청순하고 가련한 여인상을 아주 훌륭히 연기하며 전세계의 수많은 관람객들의 심금을 울렸고 이 영화 또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세겨진 명작으로 꼽는 작품이다

 

‘애수’의 마지막 장면에서 착하고 사랑스런 애인 로버트 테일러에게 자신의 직업(창부)를 밝히는 쪽지 한 장만 남기고 사라진 그녀는 워털루 다리위에서 달려오는 트럭에 몸을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남녀를 불문하고 진한 감동과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뛰어난 연기력은 오직 비비안 리만이 가능한 그녀만의 전유물이다
실제 이 영화는 6.25 동란 당시 우리나라 부산에서 개봉되어 수많은 젊은 남녀들을 울리고 울렸던 영화라고 한다

 

 

 

 

비비안 리는 런던에서 연극배우로 활동을 하였는데 세익스피어 연극무대에 서게 되고 여기서 만난 운명적인 연인, 로렌스 올리비에를 만나고 로렌스 올리비에와 많은 연극무대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하면서 그와의 사랑을 키워갔으며 결국 전남편과 이혼 후 40년에 올리비에와 재혼하게 된다

 

48년 영화 ‘안나 까레리나’에 출연하였고 51년에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하여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그녀의 탁월한 연기력을 다시 한번 재확인하였다 이 영화에서 허영과 환상에 사로잡혀 과거의 영광만을 상기하면서 살아가는 편집광적인 이혼녀의 연기도 훌륭히 해내었는데 자신을 상류사회의 교양미 넘치는 인기 높은 여자라는 착각속에 빠진 그녀를 그녀가 무식하고 천박한 남자라고 경멸하던 제부(동생의 남편)에게 강간당하고 마침내 실성한 여인이 되어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와중에도 초대장을 받고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환상에 빠진 여인의 연기 또한 훌륭히 해냈고 결국 또 한번의 아카데미 상을 거머 줘었다

 

이렇게 비비안 리는 여러 편의 대작에 출연하였지만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소수에 불과하다(14편) 오히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하는 가정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간간히 연극무대에도 오른다
60년 로렌스 올리비에와 이혼 후 그녀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갔고 67년 54세의 나이에 페렴으로 사망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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