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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청나라의 전쟁, 역사저널 병자호란의 결과, 발생원인, 남한산성 전투, 청태종 홍타이지




16세기 후반, 만주지역에 흩어져 살고있던 여진족들은 누르하치가 부족들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웠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나갔던 후금은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청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군사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땅을 쳐들어와 조선을 굴복시켰던 조선으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패전의 역사가 바로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이미 후금(청)은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과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구실로 군사 3만을 조선에 출병시켜 평양까지 진출하는 등 조선을 위태롭게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당시에는 양국이 확전을 원치않아 강화가 쉽게 성립되어 전쟁은 조기에 종료됐다.


정묘호란은 후금을 세웠던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새롭게 후금의 황제가 된 태종 홍타이지가 후금과 전쟁을 벌이는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는 등 후금에 적대정책을 취하고 있는 조선에 경고와 위협을 보내기 위해 일으켰던 전쟁이었으며 조선이 후금과 ‘형제지교’의 관계를 맻고 배척하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고 군사를 되돌렸던 것이다.


광해군 집권시절에는 광해군은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강성해지자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여 광해군은 명나라와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펼쳐나가 후금과 큰 마찰없이 평온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1627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 집권세력은 광해군이 추구했던 실리위주의 중립 외교정책을 버리고 다시 친명배금 정책으로 복귀해서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는 등 후금(청)에 대한 적대정책을 추구하였는데 명나라와 전쟁을 한창 벌여나갔던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는 자신들의 배후에 또다른 적인 조선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조선은 당시 평안북도에 있는 가도에 명나라장군 모문룡을 주둔시키고 군사원조를 해주면서 명나라의 요동수복 작전을 도와주는 형국이었으니 후금의 강경파였던 태종 홍타이지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고 결국 청나라로 개칭하고 스스로 황제로 올라선 홍타이지는 청나라의 후방을 교란하는 조선을 쳐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직접 군사 12만 8천명의 철기병을 거느리고 1636년 12월에 조선으로 출병하였는데 이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의 새로운 국왕으로 등극한 인조와 서인 집권세력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국방강화에도 거의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1636경 당시 청나라로 개칭한 후금은 국력이 날로 신장되고 있었고 명나라가 점령했던 만주의 대부분을 모두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몽고에 있는 원나라 몽골세력까지 복속시켰을 정도로 국력과 군사력이 크게 강화되있는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명나라는 집권세력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이 등을 돌렸고 양자강 이남의 지방마다 봉기가 일어났으며 양자강 이남을 장악한 이자성이 명나라조정에 반기를 들고 명나라 조정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으로 명나라는 국력이 크게 약화되어 쇠락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발빠르게 파악했던 광해군은 후금과 좋은 관계를유지하여 후금(청)과의 전쟁을 막을 수 있었지만 청강명약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못하고 오로지 숭명정책의 대의명분에만 빠져있던 인조와 서인세력은 결국 청나라의 침공을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사태파악을 할 수 있는 전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인조와 서인세력은 국방력 강화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후금(청)나라와 약속한 친교정책도 소홀히하며 계속해서 후금을 오랑캐나라라고 얕잡아보며 배척하고 있었다.


과연 후금(청)이 조선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화수준이 떨어진 오랑캐, 야만족일까? 왜 조선은 개국 이래 오랫동안 만주에 사는 여진족 및 그들이 세운 후금을 오랑캐라고 얕잡아 본 것일까?



조선이 야만족이라고 생각하는 여진족은 실제로는 문화적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만주에 흩어져살고 있던 여진족은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어받아 계승·발전시켜서 17세기에는 조선을 거의 능가할 정도로 높은 문화수준을 지니고 있는 선진문명국가였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이 계속해서 만주의 여진족들을 평가절하한 것은 바로 명나라 때문이다.


조선은 유교와 성리학적 이념을 근간으로 해서 세워진 나라였고 조선을 지배했던 사대부들은 모두 성리학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신념은 오직 공자와 맹자, 주자가 교시하는 유교적 이념 안에만 묶여있었고 이로써 다양한 문화의 발전을 꾀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교적 속박으로 인해 조선은 서양의 발전된 신문화와 신기술의 도입이 불가능해 근대화를 이뤄내지 못했으며 결국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집권세력들은 오로지 최고의 스승인 공자와 맹자를 배출한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라고 여기며 숭배해왔고 조선자신을 중국의 작은 나라라고 여기는 ‘소중화주의’의 망상에 빠져있었다.

한 나라의 고관대작들이 다른 이웃나라를 ‘어버이의 나라’, ‘조상의 나라’라고 부르고 섬긴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국치’에 해당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조선지배층의 ‘소중화주의’ ‘사대주의’는 일본과 여진족들로 하여금 조선을 얕잡아보고 침략해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집권사대부들은 실제로 그랬으며 -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인 이이와 이황이 집필한 기자실기, 기자집기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 그들은 조선 건국 이래부터 조선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명나라 등 중원 한족들을 조선의 어버이, 조상의 나라라고 숭배해왔는데 이것을 ‘사대’라고 표현했고 결국 조선 지배층들이 지녔던 ‘사대주의’는 바로 큰 스승이자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공자, 맹자, 주자의 철학적 이념만을 받들어 뫼시고 공자, 맹자가 태어난 나라인 명나라는 스승의 나라이자 조상의 나라로 승격시켜서 조선을 영원한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중국 주나라의 사람인 기자마저도 기자조선의 시조로 만들어놨으며 기자조선을 건국했던 기자가 중국 주나라 사람이니, 주나라의 후손들이 세운 명나라는 우리의 조상의 나라로 떠받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니 명나라 이외의 다른 족속들, 즉, 만주의 여진족이나 몽골족 등 이민족들은 모두 야만인 취급을 하며 외교관계의 예를 다히지 않고 계속해서 멸시만 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 지배층의 편협하고 어리석은 이념 때문에 조선은 국제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없었고 임진왜란이나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은 전쟁과 참화를 스스로 불러일으킨 것이다.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광해군을 몰아낸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즉, 광해군이 북방에서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후금의 강성함을 파악하고 명나라와 후금사이에 중립외교를 표방해서 실리외교를 편 것을 두고 조상의 나라이자 스승의 나라인 명나라를 배반했다고 해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낸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조선의 사대부들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나라를 섬기기 위해서 자신들의 왕을 몰아내는 이러 어처구니 없는 일을 조선의 사대부들은 서슴없이 행했으며 이러한 사대부들의 편협된 행동들이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같은 참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조선에 철기마병을 이끌고 출병했던 청(후금)나라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 출병의 이유를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과 조선의 명나라 군사지원을 이유로 들었다는 것을 보아도 조선이 얼마나 국제정세에 어두웠는지를 알 수 있다.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넜던 홍타이지가 인솔한 청나라 군대는 불과 5일 만인 12월 14일에 한양에 도착하는 엄청난 속도를 보여준다.

5일 만에 한양(서울)에 도착할 정도로 빠른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 군대가 모두 기마병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청나라군대는 국경지대에 있는 조선의 수비성들을 모두 우회하는 전략을 펼쳤고 압록강에서 한양까지 길목에 있는 수비성들과 공성전을 벌이지 않고 오로지 인조가 있는 도성만을 목표로 해서 진군해왔다.


완행버스가 아닌 직행버스를 타고 오직 왕성(한양성) 탈취만을 목표로 해서 진격함으로써 5일이라고 하는 최단 시일 내에 한양에 도착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가 부산 동래성을 출발해 한양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 24일에 비하면 엄청난 진군속도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 국왕인 인조와 대신들은 원래 강화도로 피신할 생각이었으나 청군이 이미 한양부근까지 쳐들와 있어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조선 국왕 인조와 대신들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937년 1월 30일까지 한달 반 동안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버텨냈다.

남한산성에서 수비태세에 돌입한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을 지키는 수비군대 1만 2천명의 병력으로 남한산성의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청군의 집요한 공격을 오랫동안 방어해 내지만 군량미의 부족상태와 엄청난 추위, 그리고 조선병사들의 사기저하로 한달 반 만에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사실 병자호란 당시 군량미의 부족상태는 청나라군대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고 후방의 성들을 우회해서 오직 조선왕이 있는 남한산성만을 공략했던 청나라 군대도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우회했던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 등지에는 적지않은 조선군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이들 조선병력들을 공략하지 않음으로써 청나라 군대는 후방과 전방에 모두 적군들에게 둘러쌓인 불리한 상황이었으며 나중에 본국으로 귀환할 때 퇴로가 막힐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조선국왕과 조정이 한달 정도 더 버텨냈더라면 식량이 바닥이 난 청나라군대가 철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조선은 갑자기 왜 한달 반 만에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게 항복한 것일까?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천자총통과 조총으로 진격해오는 청나라군사들을 집요하게 괴롭혔으며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의 철통같은 방어를 뚫지못해 한달 동안 고전을 면치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에 군사파병을 내려 모집한 조선의 근왕군(속오군)들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 큰 문제였다.


조선조정은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항전하는 동안에 전국 각지에 파발을 보내 지방군들이 파병하여 청군의 포위망를 뚫어줄 것을 기대하였지만 지방에서 모여든 근왕병들은 통일적인 지휘체계가 서지 않은 상태에서 따로 움직이는 바람에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충청도에서 파병한 근왕병은 죽산에서 진격을 멈추었고 강원도 근왕병은 12월 27일에는 검단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청나라 군대에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었던 전라도 근왕병은 전투에서 이기고도 탄약부족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져서 청군에게 포위되었던 남한산성은 지방 근왕병들의 원조를 받지못하고 다시 고립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더욱이 도원수로 임명된 김자점은 군사 2만여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면서도 청나라의 철기군의 기세에 겁을 먹고 성문을 걸어 잠그고 싸우기를 거부한 것도 전쟁패전의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남한산성을 한달 반이나 지켜냈던 인조와 조정은 시간이 갈수록 근왕병들이 패배하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주전파의 입김이 약해지고 주화파의 입김이 더욱 강해져갔고 결국 세자빈과 봉림대군이 피신해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의를 완전 상실했고 주화파 최명길의 주선으로 결국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문서를 전달하고 말았다.


조선은 정묘호란이 발발한 이후 또다시 전쟁이 터질 것을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전국에 전쟁준비를 하달하는 등 나름대로 방비를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감이 있었다.

청나라는 이미 내몽고 지역까지 진격하여 여러 몰공족들을 복속시켰으며 북경지역까지 공략하는 등 군사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는데도 조선은 우물안 개구리처럼 명나라와의 의리와 명분에만 사로잡혀서 국제정세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터진 도화선은 1936년 청나라 태종이 황제로 칭제를 개칭한 후 파견한 청나라 사신을 조선국왕이 만나주지 않는 등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청나라 황제의 국서도 받지 않았던 것이 청황제 홍타이지가 쳐들어온 가장 큰 시발점이 되었다.

사실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명나라와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청나라의 후방의 적을 평정해서 안정화시킬 목적이었으며 또한 명나라와 교역이 끊어져 부족해진 물자를 조선으로부터 조달받기 위함이었다.


강화도가 청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전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면서 항복의 예를 거행했다.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다.



조선과 청나라가 맻은 항복협약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행할 것.

조선은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헌납할 것.

조선은 왕의 장자(세자)와 제2왕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청이 명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내외 여러 신하와 혼인하고 사호(私好)를 굳게 할 것.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물품 20여 종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성절·정삭·동지·경조 등 사신은 명 구례를 따를 것.

가도(假島)를 공격할 때는 병선 50척을 보낼 것.

포도(逋逃)를 숨기지 말 것.

일본과 하는 무역을 허락할 것.


조선 인조의 항복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고, 그리고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포로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조선의 항복으로 청나라와 맺은 항복협정의 내용은 조선이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또한 조선은 해마다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수십만포의 세포등 엄청난 양의 세폐(조공)를 바치는 것이며 명나라와의 전쟁에 군사지원을 해주는 것등 청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엄청난 조공세금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다.


조선을 굴복시키고 난 후 청나라는 명나라 본토를 총공격해 들어가서 명나라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당시 청나라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명나라는 내부의 반란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바로 양자강 이남에서 봉기한 이자성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명군을 대파하고 몰고들어가 북경의 윈난성이 함락되면서 명나라는 1644년에 사실상 멸망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땅을 차지한 이자성군대와 청나라 군대가 하북지방에서 대전투를 벌였고 명나라 장수인 오삼계를 회유해서 귀화시킨 청나라 군대는 총 18만 대군으로 이자성군대를 압박공격해서 결국 이자성군대는 대패하였고 이로써 청나라는 명나라 도성을 점령하면서 중국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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