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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43회 허균의 모반사건의 진실, 능지처참, 역성혁명




허균(許筠, 1569~1618)



9월20일에 KBS 1TV에서 방송된 ‘역사저널 그날’ 43회에서는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장가이자 개혁사상가였던 허균을 다루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허균은 조선중기 1618년 광해군 10년 시절에 역모죄로 몰려 처형당하고만 불운한 사상가였다.



허균은 조선시대의 사상가이자 대문장가, 그리고 뛰어난 시인이자 또한 혁명가이다. 일반사람들에겐 허균이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상 허균은 조선시대의 모순과 부패상을 비판하고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대개혁을 꿈꾸었던 획기적인 사상가이자 혁명가에 더욱 더 가까운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은 허균에 대해서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편에 보면 허균에 대한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허균에 대해서 ‘천지간의 괴물’ ‘악 중의 모든 악을 지닌 인물’ 등 조선사대부들은 허균을 상당히 안좋은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과연 조선왕조실록데로 허균은 괴물이나 극악한 인물, 게 돼지만도 못한 인물일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허균은 역모사건에 몇 번 휘말렸던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운좋게도 살아났지만 광해군 10년에 일어난 모반사건 때에는 허균은 역모집단의 수장으로 몰리게 되어 결국 능지처참당하고 이세상을 하직한다.


그럼 허균이 왜 역모죄로 처형당했는지, 또한 허균이 과연 진짜 역모를 도모했는지, 그리고 허균은 진정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허균은 조선시대 선조 때 명망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이었는데 허균의 아버지는 동인의 우두머리이자 경상도 관찰사였던 허엽이며 허균의 두 형들 또한 당대의 뛰어난 시문장가였으며 허균의 누나는 너무나도 유명한 조선사상 최고로 뛰어난 여류시인 허난설헌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허균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인텔리가문 출신이다.


많은 학자들이 허균을 최고의 문장가, 천재 문장가라고 극찬하고 있는데 허균은 9살 때부터 뛰어난 시를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를 가르켰던 스승이나 동네어른들이 허균을 신동이라고 부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어린 시절부터 허균은 이미 주변 사람들로부터 장차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장가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어왔던 것이다.


허균은 조선중기 선조 시절부터 관직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많이 수행해왔던 관리였다. 허균은 10대 후반부터 과거시험에 응시했는데 문과 초시, 정시, 중시에 모두 합격했을 정도로 학문과 문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왔다.

특히 허균은 20대 중반에 과거시험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과거시험 중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인 문과 중시에 합격하면 바로 정3품의 벼슬이 주어지는 게 관례인데 허균은 바른 말을 잘하고 자유분방한 그의 성품으로 인해서 사대부들의 경계를 받아 정3품 대신 종3품의 벼슬을 얻게 된다.



또한 허균은 관리들이 겨루는 시문장을 짓는 시험에서 한 해에 세 번이나 수석으로 합격했던 적이 있는데 이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불가능한 일로서 허균이 평소에 얼마나 시문장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과거시험 장원급제와 시문장 짓기 대회에서 3회 연속 수석합격 등의 그의 경력을 보더라도 허균이 조선시대 천재문장가, 최고의 시문장가라는 허균의 명성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또한 허균은 공주목사, 순천목사, 부안목사 등의 지방수령을 두루 역임했으며 동부승지, 좌승지, 우승지 그리고 광해군 때에는 예조판서라는 벼슬까지 지냈는데 경력면에서 보아도 허균은 남들에게도 전혀 딸리 것이 없을 만큼 풍부한 정치경륜을 쌓아왔다.


이렇게 지방관이나 중앙정계에서 고관대작을 두루 역임했던 허균은 바쁜 정사에도 틈틈이 책을 쓰거나 시문장을 짓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허균이 지었던 유명한 책만 해도 22권이 넘는다고 한다. 이 외에는 수많은 시를 썼으며 허균을 가장 많이 알렸던 홍길동전 외에도 다섯편의 소설을 더 집필했는데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산인전, 장생전, 남궁선생전 등이 모두 허균이 쓴 소설들이다.


시나 가사(일종의 수필)같은 문학들은 조선중기에도 많이 있었지만 소설같은 창작물은 아무도 생각해 내지도 못했던 조선중기에 전혀 생소했던 이야기형식의 소설을 무려 여섯권이나 써냈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며 허균의 뛰어난 재능을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예이다. 오늘날의 소설을 가장 먼저 개척해냈던 인물이 바로 허균인 것이다.


강릉에 있는 허균과 허난설헌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


이렇게 시문장과 집필에 있어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면서 수많은 역작들을 쏟아내었던 허균이자만 정치적으로는 정말 우여곡절을 많이 겪어왔던 사람이 바로 허균이었다.

허균은 관리로 임용된 후에 무려 8번이나 파직을 당했으며 세 번이나 유배를 당했던 파란만장한 정치경력을 갖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정치사가 결코 순탄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8번이나 파직된 후에도 그는 모두 1년 안에 바로 복직되는 행운이 뒤따른다. 허균이 관직 수행중에 파직된 이유는 대부분의 그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허균은 황해도 도사로 파견되었는데 파견된 지 7개월 만에 사헌부로부터 탄핵상소를 받게 되었고 결국 파직당하고 만다. 파직당한 이유는 허균이 황해도 도사로 부임할 때 한성부의 기생을 데리고 갔다는 이유와 관헌에서 기생을 데리고 놀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후 복직되었던 허균은 어머니 상중에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이유로 또다시 파직을 당하기도 했으며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또다시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유교를 국시로 삼고 있는 조선시대에서는 유교나 성리학 이외의 종교나 사상을 갖는 것을 철저히 금기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종교나 사상에 얽메이기를 싫어하는 자유로운 사상가였던 허균과 유교성리학에만 집착했던 조선 사대부들간의 사상적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허균은 또한 유교나 성리학적 지식에도 엄청 통달해 있었다.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이들을 접견하는 접견사로 나갔던 허균은 명나라 사신앞에서 사서오경을 한순간에 줄줄히 외었으며 성현들의 시문장 수백 편을 막힘없이 외어서 명나라 사신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한번 시문장을 쓰기 시작하면 수천마디를 순식간에 써내려가는 탁월한 글재주를 선보여서 명나라 사신들로부터 하늘이 낸 문장가라는 칭송을 두루 받았을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풍부한 학식과 뛰어난 글솜씨를 발휘했던 허균이 어떻게 하다가 역모사건에 휘말리게 된 걸까?

허균은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획기적인 사상을 가진 개혁가이자 정치사상가였다. 허균은 단순히 사랑방에 앉아서 공자왈 맹자왈만 부르짓는 일반 백면서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천하고 행동하는 양심적인 사상가이자 조선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정치개혁가였던 것이다. 이점에서 허균은 다른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과 판이하게 다른 파격적인 행태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허균이 평소에 성리학적 지식이나 사상에 머무르지 않고 불교, 도교, 그리고 천주교에까지 관심을 두고 사상의 폭을 넓혀나가자 성리학적 근본주의에만 전념했던 당시 사대부지배층들은 허균의 이러한 다양한 사상추구를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허균을 위험스런 이단아로서 판단했던 것이다. 기독교도인들이 불교인들을 심하게 배척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이다.


이렇게 오직 유교적인 틀만을 고집하는 조선사회의 이념적 틀에 염증을 느낀 허균은 자신의 사상을 유교적인 틀안에만 가둬두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사상적·정치적 갈등을 야기시켰던 것이고 수많은 정적들을 양산해 내었던 것이다.

사실 허균은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던 것인데 당시 앞뒤가 콱막힌 유교사대주의자들은 오로지 공자왈, 맹자왈 그리고 주자왈만 외쳐대고 있었으니 시대를 수백년 앞서나갔던 천재 허균과 사상적 궁합이 맞을 리가 없었다. 허균은 이미 400년 전에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허균이 8번 넘게 파직당했던 이유의 대부분이 기생놀음 아니면 불교나 도교를 믿는다는 이유에서 였다는 것만을 보더라도 그시대의 양반사대부들이 유교이외의 사상에 얼마나 배타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갖는다는 이유로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재한 뛰어난 인재를 단번에 파직한 것만 보아도 그당시 유교제일주의나 성리학제일주의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지배층들이 목숨처럼 신봉하는 유교와 성리학적 이념 때문에 나중에 조선이 엄청난 당쟁에 휘말리게 되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어리석고 편협했던 사대부 지배층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꼿꼿하게 자신의 주관을 지키면서 소신있게 살아가던 허균이 광해군 때에 이르러 갑자기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허균은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광해군의 오른팔이자 최고의 실세인 이이첨에게 부탁해서 다시 벼슬길에 올라서게 된다. 허균은 원래 8번의 파직을 당했지만 곧바로 다시 관직에 복직되었으며 허균이 빠르게 관직에 다시 복직되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그의 관직생활이 비록 파란이 많았지만 그래도 허균은 꾸준히 관직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광해군 즉위 후에 허균이 이이첨에게 아첨해서 관직에 올랐던 것은 매우 큰 변화라고 본다. 또한 허균은 광해군이 원하는 인목대비 폐위를 앞장서서 주장하고 나섰다. 이것은 나중에 허균에게 엄청난 정치적 변고를 가져다 줄 시한폭탄으로 작용하고 만다.


당시 적장자 출신이 아닌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상태에서 자신의 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인목대비의 폐비를 그의 최측근 이이첨이 제기하는 상황이었는데 허균이 앞장서서 인목대비 폐비를 주장했던 것이며 이로인해 허균은 정치적으로 수많은 정적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목대비 폐비론을 광해군의 최측근인 이이첨보다도 허균이 더욱 앞장서서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반대하는 인목대비 폐비를 왜 하필이면 허균이 앞장서서 주장한 것인가? 이점이 가장 미스터리한 부분이다. 그렇게도 총명하고 영특했던 허균이 패륜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인목대배 폐비를 주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613년 광해군 5년 때 서자 7명이 주도한 모반사건(칠서의 난)이 발생하는데 명문가 출신 서자 7명이 남한강변에 토굴을 파서 아지트를 만들고 무륜당이라는 패거리를 만들고 무사를 양성해서 모반을 획책했다는 모반사건이다.

이 모반사건의 주동자들은 모두 강변칠우라고 불리는 7명의 서자들인데 이들 중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등이 평소에 허균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던 인물들이어서 허균은 이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의심 받게 되었으며 정치적으로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허균은 과거부터 오랫동안 서자출신이었던 서양갑, 심우영과 자주 왕래하면서 가깝게 지내왔기 때문에 이들이 주동이 된 모반사건에 연루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허균은 당시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온 직후라서 광해군의 배려로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하게 된다. 사실 이 칠서의 난은 단순한 상인 살해사건이었는데 이이첨등이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반사건으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한차례 큰 정치적 곤경에 처했던 허균은 이후부터 광해군 정권의 실세였던 이이첨에게 접근해서 정치적 결연관계를 맺으며 이이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목대비 폐비론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인모대비 폐비론은 허균의 본심이 아니며 이이첨의 농간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앞장서게 된 것이다.

1617년 허균은 형조판서와 예조판서에 오르는 등 정치적으로 크게 부상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허균은 이이첨과 같은 당인 대북당에 입당하여 이이첨과 정치노선을 함께 한다.


이렇게 광해군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최고의 실세인 이이첨과도 가깝게 지냈으며 예조판서로서 남 부러울 게 없었던 허균이 돌연 1618년 8월 역모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체포되기에 이른다.


♣ 허균의 역모사건


광해군 10년인 1618년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 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러한 남대문 격문은 광해군을 몰아내자는 반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붙였다고 한다. 허균과 정치적으로 반대파였던 기준격은 이것을 빌미로 허균이 모반을 획책했다는 상소를 올렸다.



허균의 모반행위에 대해 상소를 올렸던 기준격은 원래 허균의 문하생(제자)이었는데 허균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하자 허균과 등지게 되었으며 당시 소북파의 거두이자 영의정이었던 기자헌이 인목대비 폐모론에 결사적으로 반대했으며 이로서 허균과 기자헌은 서로 적대관계에 서게 되었으며 허균이 페모론에 반대하던 기자헌을 비판하던 상황에서 결국 기자헌이 유배당하게 되자 기자헌의 아들인 기준격은 허균의 모함으로 자신의 아버지 기자헌이 유배당했다고 판단함으로써 한때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허균과 기준격은 졸지에 원수지간으로 변해 버린다.


허균의 문하생이었던 기준격은 허균의 평소 사상인 적서차별 폐지, 평등사상, 신분제도 폐지 등의 사상을 잘 알고 있었다. 허균에 반감을 갖고 있던 기준격은 허균의 이와같은 반유교적이고 급진적 과격사상을 빌미로 삼아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상소를 올린다. 이것은 기준격이 자신의 아버지 기자헌을 구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조작극이었다.


물론 허균의 평소의 사상인 신분제도 폐지나 반상의 차별 폐지 같은 사회개혁 사상은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과격한 사상으로 양반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체제를 부정하는 모반사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준격은 자신의 아버지 기자헌을 유배시키는데 기여를 한 허균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모반 상소를 올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기준격의 계속된 모반 상소가 올라오는 와중에 1618년 10월 남대문 벽서사건이 갑자기 터지자, 그동안 모반상소를 당해왔던 허균이 그 벽서사건의 주동자로 몰려서 체포되고 만다. 남대문에 붙여진 벽서는 허균의 심복인 현응민이 붙였다고 하며 벽서를 쓴 사람은 바로 허균이라는 것이다.

허균은 바로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그리고 3일만에 형신도 받지않고 광해군에게 ‘아뢸 말씀이 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의 심복들과 함께 곧바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허균은 조선사회의 적서차별과 신분제에 강한 회의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후에 서자들과 접촉해서 불만세력들을 모았으며 적서차별과 반상의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모의를 하고 역성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허균은 심복을 시켜 도성 내외에 유구국인들이 쳐들어온다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소외되었던 서얼들과 불교계를 끌어들여 봉기 모의를 진행하던 중 일당 하나가 불심검문으로 붙잡힘으로써 사전에 봉기 계획이 탄로나게 되었으며 결국 심복들과 함께 의금부에 압송된 지 3일 만에 능지처참으로 처형당했다.



진짜 허균이 역성혁명을 계획했었는가? 매우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허균의 모반사건은 조선왕조실록의 일방적인 기록이다.

허균의 모반이 발각되었던 시기는 1618년인데 그 시기에 허균은 형조판서, 예조판서등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남부럽지 않게 큰 권세를 누리고 있던 시기로 광해군과 이이첨의 신임 또한 크게 받고 있었던 시기인데 굳이 허균이 이같은 만족스러운 지위와 권세를 누리던 시기에 목숨을 걸고 소외계층을 모아서 모반을 일으킬 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허균은 평소 서자 차별과 반상제도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부르짖었던 인물이다.

또한 성리학적 유교사상에 집착하지 않고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폭넓게 수용했던 허균의 자유분방한 사상이 당시 유교성리학만을 국시로 추구했던 양반사대부들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로 비쳐졌을 것이며 또한 소외된 계층인 서자들, 불자들과 친분을 쌓아갔던 허균이 장차 이들 소외된 세력들을 규합해서 불괴를 도모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인물로 판단했기에 역모라는 모함을 씌워 미리 허균을 처단해서 후한을 없앤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그당시 사대부 지배세력들은 유교성리학에 위배된다고 판단하면 왕 또한 페위시키던 시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허균이 처형되고 5년 후 광해군 또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는데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렸다는 것과 인목대비를 페위시켰다는 것이 폐위의 가장 큰 이유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지배층 사대부들한테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나라의 실리를 지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던 시기로 광해군 페위에서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분차별이 심했던 조선 중기의 사대부 지배계층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허균이 역도라고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허균은 시대를 훨씬 앞서갔던 뛰어난 사상가이며 지금보다 300년 앞선 시기에 이미 민주주의의 이상을 추구했던 뛰어난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


허균이 주장했던 서얼차별 철폐나 반상제도, 신분제도의 모순 철폐와 백성의 복지증진 사상은 바로 현대 사회의 민주주의의 근본이념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균이 쓴 논문인 호민론과 유재론을 보면 허균이 추구했던 백성들의 복지사상과 평등사상이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호민론·유재론사상은 허균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호민론 -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 지금의 백성의 원성은 고려말보다 훨씬 심하다.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만일 임금과 지배세력이 백성을없신여기고 착취해서 궁예나 견훤 같은 호민이 나온다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오직 백성을 위해서 정치를 해야하며 그들의 불만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유재론에서는 신분재도 철폐에 대한 허균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유재론 - 서얼이라고 해서 관직을 주지 않고 어머니가 개가했다고 해서 그 자식의 재능이 뛰어난데도 쓰지 않는 것은 하늘이 낸 인재를 쓰지 않는 것으로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는 누구에게나 재능을 골고루 주었는데 남녀나 신분에 따라 차별을 두는 것은 하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다.


홍길동전에도 허균의 개혁사상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 허균은 홍길동전을 통해서 신분차별이 없고 백성들이 행복한 평등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정말 시대를 300년 이상 앞서갔던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 허균이 진짜 역성혁명을 도모했는지는 허균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허균이 진정으로 역성혁명을 도모했었다면, 그리고 그의 혁명이 성공했었더라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국민복지는 300년 이상 앞서서 실현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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