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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드의 우아한 미녀 잉그릿드 버그만, 카사블랑카, 서프라이즈 로셀리니감독




1940년대에서 50년대까지 허리우드 영화에서 수많은 명작들을 많이 남겼던 잉그릿드 버그만은 미모와 연기력을 모두 갖춘 스웨덴이 낳은 가장 뛰어난 여배우라고 할 수 있다.

잉그릿드 버그만의 영화를 보면 영혼이 들어가 살아 숨쉬는 듯 뛰어난 연기력에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율이 멈추지 않는 실감나는 연기력을 느끼게 하는 몇 안되는 탁월한 연기자였다.



영화 제목만 들어도 대단한 명성이 느껴지는 영화 ‘가스등’ ‘개선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카사블랑카’ ‘잔다르크’ ‘아나스타샤’ 등 허리우드 영화역사상 최고의 수작으로 불리워지는 명작들은 대부분 잉그릿드 버그만이 주연으로 출연해서 탄생된 영화들이다.

잉그릿드 버그만은 현실감이 살아있는 탁월한 연기력뿐만 아니라 그녀의 조각같은 빼어난 미모를 함께 갖추고 있어 그녀가 40~50년대의 허리우드영화에서 주름잡으며 명성을 높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신이 인간에게 선물로 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빼어나고 우아한 미모를 갖춘 잉그릿드 버그만! 거기에다가 뛰어난 연기력에 교양미까지 갖춘 그녀는 40~50년대 수많은 영화들에 출연하며 전세계의 관객들을 사로잡아 버릴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렸었다.



원래 스웨덴 출신으로 스웨덴에서 연기를 시작한 잉그릿드 버그만은 아름다운 용모와 타고난 연기력 덕분에 몇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큰 주목을 받자 그녀의 명성이 미국 허리우드에까지 전해지고 허리우드 파라마운트사는 잉그릿드 버그먼을 단번에 스카웃하고 1942년 ‘카사블랑카’에 출연시켰는데 이 영화가 엄청나게 히트하는 바람에 스웨덴에서 건너온 잉그릿드 버그만에 대한 선택이 옳았음을 만천하에 과시한다.


잉그릿드 버그만이 미국에 온 후 첫 번째로 크게 성공한 영화 ‘카사블랑카’는 잉그릿드 버그만을 사실상 스타덤에 오르게했던 그녀의 첫 흥행성공 작품으로 꼽힌다.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이별을 나누는 공항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전세계 수많은 관객들을 감동시켰던 명장면으로 유명하다.


험브리 보가드와 애절한 눈빛과 표정연기로 마지막 아쉬운 이별을 표현하는 그녀의 흡입력 있는 연기에 수많은 관객들이 그녀에게 흠뻑 빠져들어가 버렸던 것이며 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다른 여배우에게 돌아갈 뻔했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여주인공 자리가 잉그릿드 버그만에게 돌아오는 계기가 마련된다.

파라마운트사 창립 50주년 기념작품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전격 캐스팅되어 출연한 잉그릿드 버그만은 청순한 매력을 한껏 발산하면서 흥행 성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파라마운트사 창립 50주년 기념작품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전격 캐스팅되어 출연한 잉그릿드 버그만은 뛰어나고 청순한 매력을 한껏 발산하면서 흥행 성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1944년 그녀를 출연시킨 또다른 영화 ‘가스등’이 엄청난 대박을 터뜨리게 되고 잉그릿드 버그만은 단번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룬다. 미국 허리우드에 건너온 지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잉그릿드 버그만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 허리우드를 거의 석권한 것처럼 크나큰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 후 잉그릿드 버그만의 영화인생은 순풍에 돗단 듯 거침없이 인기행진을 이어갔다.


그런데 잉그릿드 버그만의 연기 절정의 시기에 커다란 스캔들이 터진다.

신은 인간에게 완벽함을 허락하지 않았나! 그 이유는 인간이 위대해져서 신의 영역에 침범하기를 꺼리기 때문이었으리라!

미모, 연기력, 교양미 등 모든 것을 거의 다 갖춘 잉그릿드 버그만이었지만 그녀의 영화에 대한 뜨거운 집념과 모험심 때문에 터진 스캔들로 인해 그녀에게 영원히 씻기지 않은 불명예가 그녀의 인생 앞을 가로막아 버렸다.



1948년경에 터진 잉그릿드 버그만과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셀리니감독과의 염문이 바로 그것이다. 잉그릿드 버그만은 그 당시 피터 린드스트롬과의 결혼해서 딸 피아까지 낳아 기르던 유부녀였는데 스스로 자초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인생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한창 인기절정이었던 48년경 잉그릿드 버그만은 이탈리아 사실주의영화 ‘전화의 저쪽’을 보고 큰 감명을 받고 영화감독이었던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셀리니감독에게 먼저 편지를 써서 보내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의향을 비친다. 단지 영화 때문이었을까 하고 의문이 드는 부분은 그녀가 보낸 편지의 맨 마지막째 줄에 ‘사랑한다’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타냈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 뿐만 아니라 조각같은 미모를 지닌 잉그릿드 버그만의 프로퍼즈를 마다할 병신을 이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감독과 영화를 같이 찍기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간 두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번에 사랑에 빠졌고 역사적인 동거에 들어간 잉그릿드 버그만은 결국 전남편과 딸을 무참히도 버리고 로베르토 로셀리니감독과 전격 결혼해버린다.

이와같은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킨 잉그릿드 버그만에게 허리우드와 미국의 매스컴은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으며 심지어 정치인까지 나서서 ‘미국의 명예를 더립힌 여자’라고 맹비난을 해대어 잉그릿드 버그만의 명예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이후 세계적인 불륜녀라는 꼬리표를 달았던 잉그릿드 버그만은 의연히 이탈리아로 넘어가 로셀리니감독과 동거하면서 로셀리니감독의 여러편의 실험영화들에 출연하면서 미국과 등을 지게 된다.

자신도 이혼하고 유부남이었던 로셀리니감독도 이혼시키고 두사람이 결혼한 후 함께 만들었던 이탈리아영화들이 모두 다 흥행에 실패하면서 두사람은 완전히 파산하게 된다.

‘세기적인 불륜녀’라는 비난을 받았던 잉그릿드 버그만은 그녀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도덕적으로도 엄청난 불명예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연이은 영화의 실패로 자신뿐만 아니라 로셀리니감독까지 파산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로셀리니감독과 뜨거웠던 8년간의 모험을 끝내고 미국 허리우드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잉그릿드 버그만은 사실상 거지가 다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잉그릿드 버그만의 영화에 대한 무서운 집념은 불리한 환경속에서도 꺾일 줄 몰랐으며 56년 오랜만에 출연한 허리우드영화 ‘아나스타샤’에서 혼신의 사력을 다한 불꽃같은 연기력으로 또다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녀의 건재함을 만천하에 과시하면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연극평론가 라스 슈미트와 세 번째 결혼을 하고, 또 다른 영화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그녀의 영화에 대한 집념을 또다시 불살라 나간다.

74년에 출연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살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타내는 쾌거를 이루고 뒤에도 ‘가을 소나타’ ‘골다라는 여인’ 등 그녀의 나이 60대에 접어든 시기에도 그녀의 영화출연은 계속되었고 그녀를 비난했던 미국사회도 그녀의 뜨거운 연기에 대한 열정에 환호갈채를 보내게 되었다.


평생을 불꽃같은 연기에 대한 열정을 갖고 살았갔던 잉그릿드 버그만은 유방암에 걸려 82년 그녀의 67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미국 영화협회에서는 그녀를 ‘가장 위대한 여배우 50인’ 중 4위에 올려놓으며 그녀의 뛰어난 연기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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