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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 싶다’ 946회, 애국가 작사가 윤치호, 안창호, 애국가 작사자 미스터리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구나 부를 줄 아는 노래, 당연히 불러야 되는 노래, 그리고 대한민국사람이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애국가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누구나 알고있는 애국가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익태 선생만을 떠올린다. 물론 애국가의 작곡가가 안익태선생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전혀 없는 상태이지만 애국가의 작사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의 작사가는 미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작가 미상으로 알려진 애국가의 작사가에 대해서 윤치호와 안창호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윤치호


7월 12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의 작사가에 대한 내용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과연 우리가 가장 많이 애창해 불러왔던 애국가의 작사가는 누구인가? 한번 심층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으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1945년 해방될 때 임시정부가 발행한 애국가 악보에는 '실명 작사'로 표기됐고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의 작사자를 밝히고자 위원회를 결성해 애국가 작사자 조사 자료를 펴냈으나 결국 애국가 작사자를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햇으며 이 자료에는 '작사자 미상'이라고만 명기되어 있다.


그동안 애국가 작사가 리스트에는 윤치호, 안창호, 김인식, 최병헌, 민영환, 그리고 윤치호와 최병헌 합작설 등이 올라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애국가 작사가는 윤치호와 안창호로 압축될 수 있다. 과거 오랫동안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로서 물망에 올라 있었으며 가장 강력한 후보였다. 일본외무성 자료에서 나온 ‘2010년 조사보고서’에서는 윤치호의 애국가로 나와있어서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가인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도산 안창호


또한 해방후 좌익운동가였던 박은용의 주장에 의하면 ‘서정주의 <자유보>에는 “독립협회 발족 당시에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윤기선의 집에 전해오는 윤치호의 필적 중에는 1907년 윤치호 작이라는 실명이 붙은 친필 애국가의 가사지가 있다’고 말하며 애국가의 작사가는 윤치호라고 강력한 주장을 펼쳤으나 그는 그 후 월북했으므로 그가 제시했던 근거들을 확인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윤치호는 16살에 신사유람단을 따라 나섰으며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을 했을 정도로 구한말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윤치호는 일본에 가있던 시기에 4개월 동안 영어를 배워 영어를 마스터하고 일본의 미국공사의 통역관으로 발탁되었을 정도로 똑똑했으며 이후 미국에 가서 유학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1998년도부터 영어로 일기를 써왔다.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윤치호는 나라의 비참한 상황을 비관하여 차라리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세계 열강들 중에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나라 발전에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윤치호는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고 일본의 남작이란 작위를 받고 일본귀족으로 편입되었고 대한제국 시절 중추원의 고위급 관리가 되었는데 중추원은 대한제국 황제의 자문기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왔던 최고의결기관으로서 사실상 일본의 친일기관이었다. 사실상 이 중추원은 구한말에 대한제국의 황제통치와 국정을 간섭하는 역할을 했고 일본에 긴밀하게 협력하는 대표적인 친일기관이었다. 즉, 윤치호는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것이다.


애국가 가사를 윤치호가 지었다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윤치호는 1893년 미국으로 가서 애모리대학에서 유학했다. 현재 미국 애모리대학 도서관에 오랫동안 보관되어온 윤치호의 사진과 함께 윤치호가 친필로 썼다는 애국가가 담긴 한 장의 종이가 보관되어 있다.

그 종이에는 애국가가 1907년도 윤치호의 작으로 되어 있으며 이 윤치호 친필 종이는 미국에 사는 윤치호의 후손들이 이 대학에 기증해서 보관해오고 있는 것이다.

윤치호의 손자에 따르면 이 윤치호 친필 애국가는 가족의 요구로 윤치호가 직접 썻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대학도서관에 보관되어 왔던 윤치호작이라는 자필 애국가지를 윤치호의 친필 일기와 그 필체를 전문가들에게 의뢰해서 대조해보았는데 전문가 4명중 3명이 필체가 일치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즉, 에모리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왔던 윤치호 친필 애국가지는 윤치호가 썼다는 것이 맞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이 에모리대학에 보관되어온 윤치호 친필 애국가지는 1907년이 아니라 1945년에 씌여진 것이라는 또다른 근거가 나왔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라는 노래집에도 ‘애국가’가 실려 있었는데 이것도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라는 근거가 되고 있다고 윤치호 추종자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윤치호가 썼다는 ‘찬미가’는 애국가 외에도 13개의 외국 찬송가들이 함께 실려있었다. ‘찬미가’에 수록되어 있는 글들은 모두 윤치호가 역술했다고 나와 있는데 역술은 번역을 의미하므로 ‘찬미가’에 있는 애국가를 비롯한 외국 찬송가들 모두가 남의 글을 번역해서 옯긴 번역본임을 의미한다. 즉, 윤치호는 애국가의 저자가 아니라 옮겨적은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윤치호가 만약 애국가의 저자라면 ‘역술’이라고 쓰지 않고 ‘저자’라고 쓰는 것이 옳다.


이처럼 윤치호가 애국가 가사를 지었다는 근거들은 많지만 그 근거라는 것들이 근거라고 말하기에도 매우 모호한 상황이다. 단지 윤치호가 저술한 책안에 애국가가 포함되어 있는 것 자체만으로 윤치호가 저저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남의 글이나 노래도 얼마든지 내가 쓴 책에서 인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안창호의 외손자 필리 안 커디씨


그럼 안창호선생이 애국가 가사의 지었다는 근거를 살펴보자.

도산 안창호의 외손자인 미국에 사는 필립 안 커디씨에 의하면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쓴 작사가라고 주장한다.

안창호의 외손자인 커디씨는 어머니이자 안창호의 친딸인 안수산으로부터 안창호선생이 생전에 애국가를 썼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커디씨는 많은 독립지사들로부터 외할아버지인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얘기들을 많이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독립운동을 할 당시 안창호의 비서였던 구익균씨로부터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구익균씨는 안창호선생에게 ‘선생님이 애국가를 직접 지으셨는가고 물어봤더니 안창호가 빙그레 웃으면서 자신이 지었다고 말씀하셨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안창호의 비서였던 고 구익균씨


1907년 3월 안창호선생이 평북 선천에 있던 교회에서 교화사업을 하고 있을 당시에 교회에서 안창호선생이 직접 찬송가 하나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 찬송가의 내용과 애국가의 내용은 거의 일치한다. 또한 1907년경 민족학교에서 애국조회를 안창호가 만들었을 당시에도 이 애국조회에서 안창호는 늘상 ‘애국가’를 부르게 했다고 전해지는 자료도 존재한다.


1908년에 안창호가 직접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에서도 ‘애국가’가 자주 불리워졌다는 자료도 있다.

평양 대성학교는 안창호가 설립한 민족학교로 안창호는 그 학교의 운영권자인 교장에 윤치호를 임명했다. 이 당시만 해도 안창호와 윤치호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다고 한다.


후에 윤치호는 ‘데라우치총독 암살사건’에 연루되어서 3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3년 후에 출소한 윤치호는 철저히 친일주의자로 변절해버리고 만다.

그당시 윤치호는 독립운동은 무모하고 어러석은 짓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윤치호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윤치호가 했던 어록을 살펴보면 ‘만세를 외친 어리석고 무지한 거지들이 조선에 독립을 가져다줄 수는 없는 것이다. 무지와 가난에 찌든 대중들에게는 독립을 유지해나갈 능력이 없다’고 하는 등 다분히 친일적인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윤치호는 윤봉길의사에게 비열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다른 윤치호의 어록을 살펴보면 ‘일본의 한민족에 대한 식민지배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며 원망하기도 보다는 오히려 축복받고 감사한 일이다.

잘 살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가능하며 어떤 수단이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러한 윤치호의 어록들은 그가 확실히 친일파였으며 한민족 독립에 반대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윤치호의 당시의 사상은 문명교화가 목표인데 문명교화가 일찍 이루어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이 조선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라는 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안창호선생도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윤치호와 달리 힘은 정의롭게 행사해야 하며 국제질서에 맞게, 그리고 도덕에 맞게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치호는 잘 살기 위해서라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주장했던 일본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했던 효율지상주의자였던 것이고 안창호는 잘 살기 위해서는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스스로 힘을 길러서 독립된 상태에서의 자력갱생을 해야한다고 외친 것이다.


윤치호와 안창호는 여기에서 차이가 났다. 윤치호는 식민지배를 통해서 문명개화를, 안창호는 독립과 자주적인 힘에 의해서 문명개화를 제창했던 것이다 ----------

한때 천재적인 개혁가이자 지식인이라고 불리워졌던 윤치호를 친일파로 보는 여기에 이유가 있다.


애국가의 작사가에 대한 결론


윤치호는 일본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 숭배주의자였던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 있는 것이다.

윤치호는 수시로 일본 천황을 찬양하였고 일본을 우수한 민족으로 섬겼으며 조선은 스스로 발전할 수 없는 저급한 민족이라고 비난했던 윤치호가 우리민족의 정기와 민족성과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는 애국가의 가사를 직접 지었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애국가의 작사가로서 윤치호와 안창호를 놓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으며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윤치호 추종자들이 내놓은 윤치호 작사가로서의 근거나 안창호 추종자들이 내놓은 안창호 작사가로서의 근거, 양쪽의 근거와 증언들이 현재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어떻게 보면 양쪽의 근거들이 모두 맞는 것도 갖지만 결정적인 근거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구체적인 물적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논리적·사상적 근거로서 애국가의 논리와 이념이 윤치호와 안창호, 두사람 중 누구의 사상과 논리에 더욱 가깝냐 하는 것이다.

애국가 가사에 내재되어있는 논리와 이념이 두사람 중 평소의 사상과 논리에 더욱 가까운 쪽이 작사가라고 보면 거의 정답이다. 어차피 구체적인 물증은 없으니까~


그런데 애국가에 깃들어 있는 정신과 의미를 살펴보면 윤치호보다는 안창호에게 더욱 근접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평소에 윤치호가 말했던 그의 사상과 어록은 애국가의 내용과 사상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윤치호가 만일 애국가의 가사를 직접 썼다면 그 내용에는 윤치호의 평소의 사상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즉, 일본천황을 찬양한다든지, 우수한 일본을 본받자 든지 등등의 내용이 들어가야 앞뒤가 맞는 것이다. 그런데 애국가에는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 등 친일적인 내용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민족과 한반도의 드높은 정기와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윤치호의 평소 사상과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윤치호가 애국가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맞는 말이다.


일제시대 당시 오랫동안 우리민족의 자강혁신과 자주독립을 외쳐왔으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며 무수한 고초를 겪어왔던 안창호선생의 사상과 이념이 애국가 가사내용과 부합되는 측면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운동가들을 거지 내지는 비열한으로 매도해왔던 윤치호보다는 안창호선생이 애국가를 지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 논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등 우리민족의 정기와 민족성을 강조하고 독립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이러한 자주적인 사상과 이념이 일본에 아첨해서 천황과 일본인들을 찬양하고 있던 윤치호의 사상과 이념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으로 윤치호가 썼을 가능성은 바닷가 백사장의 모래알 하나보다도 그 가능성이 적다.


1920년 미국과 만주지역에서 3·1운동 기념식을 했을 당시에, 그리고 연해주와 중국 등 해외의 많은 지역에서 우리동포들이 애국가를 광범위하게 불렀으며 우리동포들은 그 당시에 눈물을 흘리면서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일제 식민통치의 암울했던 시기에 우리민족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우리민족의 민족정기와 연속성을 이어주었던 애국가로 인해서 우리민족은 중국, 만주, 미주, 연해주등을 떠돌면서도 한민족으로서의 정기를 잃지않고 강력한 일제에 맞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왔으며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애국가는 흩어져있던 우리민족을 하나로 결집시켜주었던 구심점이었던 것이다.


애국가를 부르면서 우리들 자신을 추스르고 위로하면서 끝까지 일제에 항전했던 우리 한민족의 정기와 민족정신이 있었기에 우리민족은 결국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본다.


위에 열거한 여러 근거들과 증언들, 그리고 윤치호와 안창호의 평소의 사상과 이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았을 때에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다.

우리민족의 정신과 영속성을 이어주었던 애국가를 악덕 친일주의자였던 윤치호가 썼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전혀 말이 되지 않으며 애국가의 진짜 작사가는 애국가 가사말에 배겨있는 민족정신을 참작해 보더라도 안창호선생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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