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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TV 서프라이즈’ 620회 딸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복수’, 딸의 억울한 죽음




6월 29일 방영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620회에서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귀한 딸을 잃고 그 범인을 찾아내어 법정에 세운 한 용감한 아버지의 한이 맺힌 복수편을 다루어서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프랑스의 밤베르스키는 평범한 회계사 출신으로 아내와 딸과 함께 살고있었는데 1977년 아내와 예기치 않게 이혼을 하게 되는 바람에 자신의 애지중지하는 딸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자신의 딸 칼링카는 이혼한 아내가 양육하기 위해서 독일인 재혼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양육하게 되었고 밤베르스키는 사랑스러운 귀한 딸을 독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을 겪어야만 했다.



의붓아버지인 크롬바흐와 딸 칼링카 사진


밤베르스키는 애지중지했고 끔찍해 사랑했던 딸 칼링카를 독일로 보내고 딸을 그리워하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1982년 어느날 뜻밖의 소식이 독일로부터 날아들었다.

그 소식은 끔찍이도 사랑했던 딸 칼링카의 사망소식이었으며 밤베르스키는 청천벽력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평소에 한없이 밝고 명랑했던 딸 칼링카가 의문의 사망을 했다는 소식은 그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밤베르스키는 곧바로 딸이 사망했던 독일 아내의 집으로 달려갔다.



딸은 아버지와 헤이지고 난 후 독일로 건너가서 어머니와 독일인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독일로 한걸음에 달려온 친아버지 밤베르스키는 자신의 딸을 양육했던 전아내에게 딸이 사망한 이유를 물어보았는데 딸을 양육했던 전부인과 의붓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 방에 가보니까 딸이 숨져있었다며 그 사망원인을 자신들도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평소에 특별한 병도 없이 건강했던 아이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에 아버지 밤베르스키의 생각에는 아주 이상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원인도 없이, 특별한 병도 없이 갑자기 건강했던 아이가 죽었다는 것은 누구든지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래서 밤베르스키는 딸의 사망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딸의 장례도 미루고 딸의 시신에 대한 부검을 의뢰했다.


죽은 딸의 사신을 부검해보니 놀라운 사실이 들어났다. 딸의 오른쪽팔과 오른쪽발에 각각 하나씩 주사자국이 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딸에게 고의적으로 약물주사를 놓았던 흔적이었으며 또한 딸의 몸에서 희끄무레한 물질이 나왔다. 밤베르스키는 직감적으로 누군가가 딸을 살해했다고 단정하고 독일경찰에 정식으로 수사를 요청했다.



수사도중 밝혀진 사실은 의붓아버지 크롬바흐가 딸에게 영양주사를 놔주었다고 실토했는데 크롬바흐에 따르면 딸 칼링카가 평소에 많이 지쳐보여서 건강을 챙겨주기 위해서 여러번 철분제주사를 놔주었다고 실토했다.


크롬바흐가 딸에게 약물을 투여하고 의식을 잃은 딸에게 성폭행했음을 감지한 밤베르스키는 독일법원에 의붓아버지 크롬바흐를 살인죄로 고소했다. 그렇지만 1987년 독일법원은 크롬바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독일법원은 딸의 몸에서 나온 물질이 크롬바흐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무죄 선고의 이유였다.



그러자 밤베르스키는 자신의 조국 프랑스 법원에서 다시 크롬바흐를 고소했는데 독일인 크롬바흐는 프랑스법원의 출석요구를 거듭해서 거부했으며 어쩔수 없이 프랑스에서 피고인이 궐석중인 가운데 재판이 진행되었으며 프랑스법원은 크롬바흐에게 살인죄혐의로 징역 15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딸에게 투여했던 철분 성분을 계속 투여하게 되면 호흡곤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인데 30년간 의사활동을 지속해온 베테랑 의사출신인 크롬바흐가 이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지속적으로 약물을 투여해서 결과적으로 딸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 유죄선고의 이유였다.


독일로 이사온 딸 칼링카, 의붓아버지 크롬바흐, 어머니


그렇지만 의붓아버지 크롬바흐를 현실적으로 처벌할 수는 없었다. 독일인인 크롬바흐를 프랑스로 강제로 데려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끔찍이 사랑했던 딸 칼링카의 복수를 다짐한 아버지 밤베르스키는 크롬바흐를 어떻게든 법정에 세우기 위해서 청부업자를 시켜서 크롬바흐를 프랑스로 강제로 납치해왔다. 결국 딸을 죽음에 이르게했던 의붓아버지 크롬바흐는 프랑스경찰에 체포되었고 살인죄의 죄목으로 프랑스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딸의 억울한 죽음에 한이 맺힌 아버지의 복수는 무려 30년이나 기다린 끝에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딸의 복수를 끝마친 아버지 밤베르스키 또한 법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었으며 그 또한 납치혐의로 인해 프랑스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하는 안타까운 사연이다.



독일법원에서 석연치않은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고 프랑스법원에서는 외교상 문제로 인해 체포하지 못한 살인범을 끝까지 추적해서 잡아왔던 용감한 아버지 밤베르스키는 딸의 복수를 위해서 자신도 범죄인이 되어야만 했던 얄궃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교도소에 수감되면서도 밤베르스키는 어린 나이에 고통속에 죽어간 딸의 고통에 비하면 자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당당히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만약 재판에서 밤베르스키에게 유죄가 선고되면 10년의 징역형에 처하게 된다고 한다.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범인을 직접 잡아온 밤베르스키를 프랑스인들은 파렴치범을 단죄한 용감한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켐페인을 계속 벌이고 있다고 한다.


딸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본인마저 10년간 옥살이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니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죽은 딸을 다시는 살아돌아올 수 없는 것이니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살아있던 아버지 밤베르스키 만큼은 남은 여생을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프랑스법원에서 정상을 참작해서 형을 경감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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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TV 서프라이즈’ 620회 9·11테러와 빈 라덴 제거작전(넵튠 스피어)




2001년 9월 11일 세계에 큰 충격을 몰고왔던 뉴욕 맨하탄 세계무역센타 건물 붕괴사건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 9·11테러사건은

미국의 건국된 이후 미국 본토가 외국으로부터 공격받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9·11테러는 4대의 여객기가 테러범들에게 나포되어 그 중 두 대의 여객기가 뉴욕 쌍둥이빌딩에 충돌하였으며 미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쌍둥이빌딩은 여지없이 무너져내려 3천여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또한 미국 국방부 펜타곤건물도 돌진하는 여객기와 충돌하여 많은 사상자를 낳기도 했다.





세계를 주름잡는 초강대국인 미국의 본토를 감히 공격한 테러범들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아랍출신들이었는데 이들의 배후에는 바로 오사마 빈 라덴이 있었다.

이들 테러범들은 당시 아랍 테러조직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으로부터 사주를 받고 9·11테러를 자행한 것이었다. 당시 오사마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조직 알 카에다를 조직하고 훈련시키면서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서방세계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9·11테러로 인해 세계의 초강대국 지위에 있던 미국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지고 망가졌는데 미국정부는 즉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미국정부는 테러범의 배후인물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응징하기로 결정하고 그 해 10월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전격적인 군사공격을 감행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으로 오사마 빈 라덴과 친교관계에 있던 탈레반정부는 전쟁에서 패퇴하여 아프가니스탄 남부 산악지대로 쫒겨갔으며 아프가니스탄에는 미국이 지원하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한 이후 거의 10년 동안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는데는 성공했지만 9·11테러의 배후인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는 데는 번번히 실패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군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해나갔으며 산악지대로 은신해 다니면서 미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2011년 5월 1일 드디어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오사마 빈 라덴 사살에 성공한다. 그런데 10년 넘게 실패했던 오사마 빈 라덴 제거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아마비백신 때문이었다.


빈 라덴이 미국의 오랜 추격에도 잡히지 않고 미군을 따돌리고 은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파키스탄 북부를 점령하고 있던 탈레반 때문이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칸에서 미군에게 패했지만 미군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파키스탄 북부지역으로 넘어와서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이지역은 파키스탄의 영역이어서 미국으로서도 군사공격을 감행하기 곤란한 지역이다.



2010년 미국정부는 빈 라덴이 파키스탄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탈레반의 보호를 받으며 파키스탄의 북부지역에 자신의 은신처를 마련하고 은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빈 라덴의 구체적인 은신처는 찾아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미국정부가 아프카니스탄 전쟁을 일으킨 지 10년이 넘도록 빈 라덴을 잡아내지 못하자 미국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국민들의 여론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파키스탄 북부지역에 숨어있는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위해 미국정부는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결국 미국 CIA가 빈 라덴의 소재를 찾아내기 위한 묘안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바로 소아마비백신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소아마비백신이 10년 동안 찾아내지 못했던 빈 라덴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방법은 파키스탄 어린이들에게 소아마비백신을 투여하면서 몰래 아이들의 혈액을 채취해서 빈 라덴의 여동생 DNA와 대조하는 방법을 써서 빈 라덴의 자녀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빈 라덴은 자녀들, 가족과 함께 파키스탄 북부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 라덴의 소재는 쉽게 파악할 수 없지만 자녀들의 소재를 먼저 파악하면 빈 라덴의 소재는 자동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미국 CIA는 파키스탄의 아프리디의사를 매수해서 그를 이용해서 빈라덴 제거작전(넵튠 스피어작전)을 수행했다. 파키스탄의 저명한 의사였던 아프리디의사는 파키스탄 북부지역을 누비고 다니며 수천명의 어린이들에게 소아마비백신을 투여했고 동시에 이들의 혈액을 채취해서 미국 CIA에게 보냈다.

2011년 4월 드디어 빈 라덴의 여동생과 일치하는 혈액샘플을 채취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 혈액샘플과 그 주소지는 바로 미국 CIA로 보내졌고 드디어 빈 라덴이 숨어있는 은신처 소재를 파악하는데 성공했으며 그곳은 아보타바드시에 있는 넓은 대지를 갖춘 대저택이었다.



빈 라덴의 저택은 넓은 들판이 있는 대지위에 있는 거대한 저택이었는데 두께 5.5m의 두꺼운 콘크리트 강화벽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마치 요새와도 같았다. 빈라덴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서 2층에도 차단벽을 설치하는 등 철옹성과도 같은 저택이었고 마당에는 경호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2011 5월 1일 드디어 빈 라덴 제거작전인 넵튠 스피어작전이 전개되었으며 아프칸에서 촐동한 특수부대요원(네이버씰요원)들이 4대의 헬기에 나눠타고 파키스탄으로 출격했으며 파키스탄군의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미군헬기는 저공으로 비행하였다.



마침내 4대의 미군헬기는 빈 라덴 저택에 착륙했으며 미특수부대원들은 빈 라덴의 경호인들과 40분간의 총격전을 벌였으며 이들을 모두 제압하고 2층 서제에 있던 빈 라덴을 사살함으로써 10년간 지속되어 온 빈 라덴 추격전은 끝이 날 수 있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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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TV 서프라이즈’ 618회, 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의 사랑이야기와 채플린의 콘크리이트 무덤


단 한사람을 위한 사랑 -




6월 8일 방송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세계적인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과 그의 네 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부인인 우나 오닐의 뜨거운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다루었다.


1942년 뉴욕에서 찰리 채플린은 한 감독의 소개로 당시 신인배우였던 우나 오닐을 만나게 되었다. 챨리 채플린은 우나 오닐의 청순한 모습과 다정다감한 마음씨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나 오닐도 자신보다 나이가 36살이나 많은 챨리 채플린에게 이상하리만큼 빠져들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우날 오닐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야만 했었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항상 마음속에 묻어두고 살아야만 했다.

나이가 들은 후 우날 오닐은 이성을 상대할 때에도 나이가 자신과 비슷한 이성에게는 호감을 느끼지 못했으며 마치 아버지처럼 나이가 많이 든 남자들에서 호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아버지같이 훈훈한 마음과 자애로운 친절을 베풀던 찰리 채플린에게서 무한한 호감과 연정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이 한창 만남을 즐기면서 가까워져가고 있었지만 찰리 채플린은 우나 오닐과 가까워질수록 더욱 조심하는 행동을 보였는데 그이유는 채플린의 과거의 이혼의 아픔 때문이었다.

채플린은 과거에 3번의 결혼을 하였으나 또다시 3번의 이혼을 한 경력이 있었고 과거 채플린과 결혼했던 여자들은 모두 채플린의 유명세와 그로부터 후광과 지원을 얻기 위해서 결혼했던 여배우들로 가정을 지키지 않았던 여자들이었다.


채플린의 마지막 부인으로서 채플린을 끝까지 사랑했던 우나 오닐


밀드레드 해리스, 리타 그레이, 폴레트 고다드, 찰리 채플린의 이 세명의 여성들과 결혼했지만 모두 결혼생활 4년을 넘긴 상대는 없었고 세명의 여자 모두 찰리 채플린의 높은 명예와 돈, 그리고 채플린의 후광을 노리고 결혼한 여성들로서 결혼생활도 짧게 끝났으며 채플린은 이용만 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많이 얻었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만난 여성 우나 오닐은 과거의 여성들과 완전히 달랐다. 18세의 우나 오닐은 과거의 여성들과는 달리 채플린에게서 그 어떤 후광이나 도움을 바라지도 않았으며 오직 헌신적인 사랑 하나만으로 채플린에게 다가왔던 것이며 그녀의 진정한 사랑은 채플린이 죽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채플린의 무덤가를 지켜오면서 슬퍼했던 우나 오닐의 행동을 보아서도 증명되었다, 그녀가 찰리 채플린을 얼마나 진정으로 사랑했었는가를!





인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배필감을 만난 찰리 채플린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 못지않게 세상의 비난거리가 두려웠고 나이 어린 여자를 꼬셔서 이용한다는 사람들의 조롱거리를 우려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나 오닐의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의 마음은 찰리 채플린의 얼음짱같이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제꼈고 결국 채플린과 우나 오닐은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을 약속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런데 두사람의 결혼 앞에 뜻하지 않은 방해물이 나타났다. 첫째는 우나 오닐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였고 둘째는 찰리 체플린의 사생아 문제였다.

사실 우나 오닐은 챨리 채플린보다 36살이나 어린 당시 18살의 나이였으므로 그녀의 친아버지인 유명한 극작가 유진 오닐은 결사적으로 그들의 결혼을 반대했는데 우니 오닐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찰리 채플린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국 두사람은 1944년 36세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또한지 채플린의 발목을 잡았던 사건은 조안 배리라는 채플린의 과거의 연인이었던 여성이 채플린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조안 배리는 채플린과 1942년 잠시 사귀었었는데 채플린의 원래 계획은 이여성을 자기회사의 여배우로 만들기 위함이었는데 조안 배리는 정신이상증세를 자주 보여 채프린이 바로 관계를 끊었던 여성이었다.


 

그런데 조안 배리가 갑자기 채플린의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걸고 나섰던 것이다. 유전자검사를 실시했지만 그 아이가 채플린의 친자가 아닌 것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법원에서는 채플린이 친아버지라고 거짓 판정을 내렸고 채플린은 억울하게도 남의 자식에게 21년 동안 부양비를 지급해야 했다.


사실 이 조안 배리라는 여성은 완전히 정신병자다. 제 정신이 아닌 정신이상자를 당시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버린 찰리 채플린에게 불이익과 경고를 주기위해서 미국 정부에서, 정확히 말하면 FBI국장이었던 후버가 음모를 꾸며서 채플린을 국재적으로 망신주기 위해서 만들어낸 조작극이었다.

소송에서 조안 배리가 이겼지만 그 후 53년 정신병증세가 악화되어 버린 조안 배리는 정신병원에 강제로 감금 조치되어 버리고 만다.


조안 배리 사건이 터졌는데도 우나 오닐의 채플린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었고 더욱 깊어져만 갔다.

찰리 채플린은 우나 오닐의 아버지인 유진 오닐보다 겨우 1살 적은 나이였지만 이미 사랑의 감정이 절정에 다다랐던 두사람에게는 나이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고 한다.

진정한 사랑은 ‘지위와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다시한번 상기시켜 주었던 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의 사랑과 결혼은 당시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화제거리가 되고 있었다.


결혼에 성공한 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은 미국에서 잠시 생활하다가 스위스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미국정부에서 찰리 채플린을 사회주의자로 몰아갔으며 그의 시민권마저 박탈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채플린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했던 영화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옹호하는 내용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1940년대 당시 미국사회에서도 일부 엘리트계층을 위시로해서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꽤나 존재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직 사랑과 가정 밖에 모르는 천상여자, 우나 오닐과 채플린은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스위스의 브베에 있는 저택에서 꿈같은 결혼생활을 이어갔으며 채플린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우나 오닐은 채프린과 사이에 딸 다섯, 아들 셋의 무려 8명의 자식을 낳았다. 


채플린과 가족들, 뒤편이 부인 우나 오닐과 아들, 우측이 큰딸 제럴딘이다. 큰 딸 제럴딘 채플린은 65년 영화 '닥터 지바고'에 출연해서 오마 샤리프와 호흡을 맞추어 명연기를 펼쳤다.


채플린의 마지막 동반자였던 우나 오닐은 1944년 장녀 제럴딘을 낳았으며, 그후 장남 마이클(1946), 차녀 조세핀(1949), 삼녀 빅토리아(1951), 차남 유진(1953), 사녀 제인(1957), 오녀 아넷(1959), 삼남 크리스토퍼(1962)까지 채플린의 역대 부인들 중 가장 많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것은 두사람의 금슬이 굉장히 좋았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우나 오닐은 채플린의 다른 부인들과는 달리 채플린이 죽을 때까지 33년 동안을 헌신적으로 채플린 곁을 지켰으며 채플린 사후에도 그의 무덤을 돌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지고지순한 우나 오닐의 헌신적인 사랑이 아닐 수 없으며 그녀가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77년 찰리 채플린은 스위스의 저택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묘지는 스위스 저택 부근에 마련했는데 누군가가 채플린의 묘지를 몰래 파내어 채플린의 시신을 도굴해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채플린의 아내 우나 오닐은 채플린이 죽은 후 매일같이 그의 묘지를 방문하며 묘지를 돌봐왔었다. 그런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며칠 출타한 사이에 채플린의 묘지가 도굴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우나 오닐은 큰 충격에 빠졌으며 결국 채플린의 시신은 한 농부가 자기의 옥수수밭에서 발견하여서 다시 그의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우나 오닐은 찰리 채플린의 묘지를 도굴꾼들이 도굴해갈 것을 우려해서 방공호 수준의 두꺼운 콘크리이트로 씌워졌다.


우나 오닐은 채플린이 죽은 후 14년을 더 살았고 그녀는 채플린의 무덤가를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서 채플린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여배우로서의 성공을 꿈꾸지도 않았고 채플린에게서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으며 오직 사랑 하나만으로 채플린을 대했으며 채플린이 죽은 후에도 그의 묘지가 있던 스위스의 저택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며 89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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