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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의 여주인공, 원나라의 ‘기황후’란 누구인가

 

 

 

10월 28일 첫 방영된 MBC 사극 드라마 ‘기황후’가 요즘 큰 화제가 되고 있다, 기황후역으로 하지원이 캐스팅되었고 충혜왕역은 주진모가 맡았으며 장영철과 정경순이 공동으로 각본을 쓴 역사 드라마 ‘기황후’는 총 50부작으로 편성이 되었는데 10월 28일 첫 방영된 ‘기황후’의 시청률이 뜻밖에도 11%로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사극 드라마 ‘기황후(奇皇后)는 방영되기 전부터 인터넷상에서 많은 논란을 가져왔고 특히 기황후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역사왜곡이라는 네티즌들의 질타와 논쟁이 치열했던 작품인데 그러한 인터넷상에서의 역사왜곡 문제로 인해서 논란이 크게 일어남으로써 결과적으로 역사드라마 ‘기황후’의 인지도를 크게 높여주었고 이로써 ‘기황후’의 시청률도 동반 상승하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를 낳은 작품이 되었다.

‘기황후’의 역사왜곡 논란이 결과적으로 ‘기황후’의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순기능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니 역사드라마 ‘기황후’ 연출진들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방영전부터 인터넷상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하였을 만큼 역사왜곡 논란을 가져왔던 역사드라마 ‘기황후’의 여주인공 기황후는 누구이며 기황후와 관련된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어떠했는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황후는 성이 기씨이며 나중에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되어 황세자를 낳았으므로 기황후라고 부른다. 기황후는 원래 고려의 여인이었다가 원나라에 공녀로 차출되어 원나라로 가게된 기구한 여인이었다.

기황후의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인데 고려시대에 음보라는 벼슬을 하였으며 그의 증조부인 기윤숙(奇允肅)은 고려문하시랑평장사라는 큰 벼슬을 하였을 정도로 기황후의 집안은 고려시대에 뼈대있는 귀족가문이었다.

기황후는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어났는데 위로 오빠가 다섯, 언니가 둘인 대가족의 막내였다가 원나라가 요구한 공녀로 뽑히게 되어 원나라로 가게된다.

 

기황후가 원나라 공녀로 끌려가게된 시점은 1333년인데 그시대에는 아시아전체가 온통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세상이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역사드라마의 소재가 된 ‘기황후’가 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으며 또한 어떻게 황후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는지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기황후가 스스로 자원해서 원나라에 가게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그 당시의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

그 시대에는 한사람의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던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라 즉,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의해서 한 개인의 운명이 좌우되던 그런 시대였다.

 

몽골초원에서 일어난 몽골제국은 징기스칸의 영도하에 기마병 특유의 뛰어난 기동력을 발휘하여 파죽지세로 주변의 나라들을 점령해 나갔다.

징기스칸의 뛰어난 전략전술과 몽골기마대의 뛰어난 기동력은 주변의 나라들을 차례로 병합시키면서 서쪽의 호라즘왕국을 무너뜨리고 중국북방의 맹주였던 금나라까지 멸망시키고 중원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기황후 역의 '하지원'

 

동북아의 황제국가였던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제국은 쿠빌라이칸에 이르러 국호를 원나라로 개명하고 동서남북으로 진격하여 서로는 이집트, 이란, 모스크바를 거쳐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유럽까지 진출하여 세계역사상 최대판도의 영토를 획득하였다.

몽골족의 원나라가 점령한 영토는 과거 로마제국이나 알렉산더대왕의 영토보다 훨씬 더 넓은 세계 최대판도의 유라시아대륙이었고 역사상 최대판도의 영토를 이룩했던 원나라는 유라시아의 중심국가로 우뚝 솟아있었다.

 

13세기경에 몽골제국이 점령했던 영토는 몽골, 중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이라크,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몰도바, 쿠웨이트, 독일, 폴란드, 헝가리를 포함하는 것이다. 아시아와 동유럽을 포함한 실로 엄청난 영토를 점령했으며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대기록이다.

 

원나라가 서쪽을 평정하고 중국 북방을 호령했던 금제국을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마지막 남은 중원대륙 남쪽의 남송과의 전쟁을 남겨놓고 있었는데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칸은 남송과 우호관계에 있던 고려에 의해서 자신들의 후방을 교란당할 것을 우려해 남송과의 본격적인 전쟁 전에 고려에 먼저 침공해들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나라는 서쪽으로 동유럽까지 정벌하였고 중원대륙의 3분의 2를 차지했을 정도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고려는 그러한 원나라대군과 맞서 30년 동안 7차례의 전쟁을 벌여나가고 있었으며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고 있었다.

 

결국 30년 항전 끝에 고려는 최씨무신정권과 김준이 피살된 후에 강화도에서 나와 원나라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만다.

원나라의 침공을 7차례나 막아낸 고려는 천도한 강화도에서 최의, 김준 등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난 후에 문신들의 주도로 강화도에 환도하여 원나라에 항복하고 원나라의 복속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최씨등 무신정권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아마 죽든 살든 끝까지 몽골군과 싸웠을 것이다.

 

원나라와의 강화조약을 주도한 세력은 문신들이었으며 그들은 원나라와 평화관계를 맺후 이후 자신들의 안위와 사리사욕에만 집착하였고 고려조정의 권세를 손에쥐고 좌지우지한 권문세력이 되었으며 원나라에는 충성을 다하고 아첨하는 부원세력이 되었다.

 

 

 

이렇게 13세기의 동아시아 판도는 원나라에 의해 평정되었고 고려는 원나라의 복속국가가 되어서 비록 국호와 왕실은 보존되었다고 하지만 원나라의 끊임없는 정치적 간섭과 통제에 따라야만 하는 불행한 국가가 되고 말았다.

또한 고려영토의 북쪽지역 즉, 함경도지역과 청천강 이북의 영토는 원나라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으며 고려는 원나라가 요구하는 공물헌납과 전쟁물자 제공 등의 신하국가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패자로 우뚝 선 원나라는 고려에 대해 공녀를 바치라는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고려 정사의 기록된 공녀요구는 원나라의 간섭기간인 80년 동안 무려 50회에 이르고 있을 정도로 그당시 원나라의 공녀요구는 도를 넘는 수준이었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 이유는 원나라의 몽골족은 본래 유목민족으로서 부녀자가 턱없이 부족했으며 그들은 전쟁들을 통해서 부족한 부녀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원나라 제국의 지지기반인 막강한 군사집단을 유지하려면 필요한 만큼 많은 여자들을 그들에게 제공해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는 고관, 군인 등에 필요한 여자를 공급해줄 필요가 있었고 나라가 커지고 왕실규모가 커짐에 따라 시중드는 궁녀들을 많이 충원하기 위해서도 많은 수의 여자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고려에게는 엄청 큰 국가적 시련이었다.

공녀는 비단 하층민들에게서만 차출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집안에서도 많이 차출되어 갔는데 그것은 원나라 왕실에 상응하는 수준에 부합되는 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며 이렇게 끌려간 공녀들은 원나라의 고관대작이나 군인들의 처첩으로 들어가거나 왕실의 궁녀로도 발탁되었고 운이 나쁜 경우에는 기생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나라는 해마다 수만명의 공녀를 요구해왔고 원나라에 아첨해서 권력을 거머줬던 부원세력들은 고려왕을 회유 또는 겁박해서 공녀 요구에 순순히 응해줬던 것이다.

 

원나라 요구로 이뤄진 고려의 공녀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원나라로 간 것이 절대 아니었다. 공녀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한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으며 원나라 조정과 고려의 부원세력들의 농간에 의해서 원치도 않는 공녀로 원나라에 넘겨진 것이었다.

근본적으로는 원나라에 항복을 자청했던 고려 문신들과 그들의 후손인 부원세력들에 의해서 이같은 불행이 초래되었다고 본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나라의 어린 딸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이역만리 야만스러운 몽골족에게 권문세가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대가로 어린 딸들을 넘겨주었던 것이 바로 공녀제도이다.

 

 

기황후도 이러한 고려 공녀 중 한명이었다. 기황후도 다른 공녀들과 함께 원나라로 넘겨진 후에 1333년 고려출신의 환관이었던 고용보(高龍普)에 의해서 원나라 황실에 궁녀로 발탁되었다.

원나라 황실에 궁녀로 들어간 기황후는 당시 원나라의 황제였던 원순제의 눈에 들어서 제2황후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고려출신이었던 고용보는 기황후를 차를 따르는 궁녀로 황제의 곁에 머물게 해서 황제인 순제의 눈에 들게 하였다.

원나라황제인 순제는 고려출신인 기황후를 엄청 총애하였고 자신의 곁에 두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이사실을 안 제1황후였던 타나시리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기황후를 엄청나게 핍박했다.

기황후에게 수시로 핍박을 일삼았던 제1황후 타나시리는 불행하게도 1335년 타나시리의 형재들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서 벌을 받아 죽게 된다.

 

원나라 황제 순제는 기황후를 황후로 봉하려 했지만 몽골족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원나라 조정대신들의 반대로 황후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1338년 기황후는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았고 자신의 황후책봉을 반대하던 반대파들이 실가되고 난 후 드디로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기황후는 황후가 되고 난 후 순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나간다.

기황후는 자신을 천거했던 고려출신 고용보를 재정책임자로 임명하고 원나라 재정을 손아귀에 쥐었으며 막강한 재정권을 바탕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사작한다.

기황후는 같은 고려출신인 박불화(朴不花)를 군사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에 봉하면서 군사권도 장악하였고 황제를 압박해서 자신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만드는데에 성공함으로서 기황후는 사실상 원나라의 최고의 실권자가 되었다.

 

 

기황후가 이처럼 원나라의 실권자가 되고 자신의 아들인 황태자가 되자 고려에 남은 기황후의 가족들도 덩달아서 고려에서의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과 기원은 원나라의 강요에 의해서 고려에서는 덕성부원군, 덕양군으로 봉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후 기철과 기원은 여동생인 기황후의 권세를 이용해서 고려에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갖가지 만행을 일삼았지만 고려의 조정은 기철과 기원의 후견인 역할을 하는 원나라의 기황후가 두려워서 오히려 기철, 기원형제의 눈치를 보는 형편이었다.

 

그 후 고려에 공민왕이 즉위하고 난 후 원나라가 내분에 휩쌓이게 되었고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는데 자주의식이 강했던 공민왕은 원나라의 세력약화를 알아채고 그틈을 이용해서 기철과 기원을 제거해 버렸다.

자신의 오빠들을 잃은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하고 덕흥군을 왕위에 세우기 위해서 원나라군대를 파견했으나 고려의 군대는 용감하게 맞서 싸워서 원나라군대를 물리쳤다.

 

원나라는 14세기 들어오면서 즉위한 순제가 문치주의를 표방하였는데 이러한 문신우월주의 정책은 군인계급을 소외시켰고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또한 원나라의 통치에 반대하는 한족 군사집단인 홍건족들이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어서 그들을 진압하는데에 많은 군사를 동원함으로서 상대적으로 고려에 대한 군사파견은 그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공민왕을 징벌하기 위해 파견한 원나라 군사규모는 1~2만 규모의 소수였다. 일각에서는 같은 고려출신인 기황후가 다른 이민족을 칠 때 보다 적은 수의 군대를 고려에 파견한 것은 고려를 진짜로 공격하기 보다는 엄포만 놓기 위한 의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자신의 오빠들을 죽인 원수이기에 징벌은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고려는 자신의 조국이기에 그 강도를 상당히 낮춤으로써 고려의 공민왕을 회유하기 위한 엄포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중원을 집어삼킨 원나라의 군대가 고작 1~2만을 전쟁에 파견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물론 홍건족들과 전쟁중이라고 해도 한 나라의 도성을 정벌하는 군대를 그정도의 소수의 병력만 파견한다는 것은 너무 비상식적인 일이다.

전쟁을 하자는 건지 단지, 겁만 주고자하는 건지 ----

 

기황후가 제1황후가 되어 원나라의 실권자가 되고 난후에 고려에게 유익한 부분도 있었다.

고려의 가장 큰 시련이었던 공녀제도가 사라진 것과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삶고자했던 원나라조정의 계획도 완전히 없어졌다.

충렬왕때부터 시작되어 무려 80년간 이어온 공녀제도가 기황후의 결단으로 없어진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황후가 되고난 후 자신의 과거의 불행했던 전철을 고려의 여인들에게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하겠다는 기황후의 결단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다.

 

기황후 초상화

 

1364년 기황후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의 황제계승 문제로 인해서 원나라에서 반대파와 지지파들간의 내전이 발생하였고 이 내전에서 기황후 지지파들이 승리하고 난 후 홍건적들이 반란이 일어나게 되면서 원나라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이렇게 원나라의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가는 와중에 주원장이 한족세력들을 규합해서 명나라를 세우고 난 후 몽골족의 원나라와 한족의 명나라간 전쟁이 벌어진다. 이미 군사력이 많이 약화되어있던 원나라는 명나라군사에 밀리어 결국 1368년에 수도 대도가 함락되고 기황후를 비롯한 원나라 황실은 북쪽으로 피신하고 만다.

 

명나라에 패한 원나라는 북쪽 응창부로 수도를 옮기고 원나라황실은 피신하였는데 그와중에 순제는 사망하고 기황후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는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우리나라 야사에는 기황후의 묘가 연천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과연 원래 고려출신이었던 기황후가 원나라가 북쪽땅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조국이었던 고려로 되돌아온 것일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아들이 북쪽땅으로 이주한 북원에서 왕이 되었는데도 기황후가 꼭 고려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원나라 공녀로 끌려가 원치도 않았던 당시의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처세를 잘 해서 황후자리까지 올라갔던 기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혹자는 원나라를 패망으로 이끌었던 요부라고도 하고 혹자는 공녀라는 최하위 신분에서 여성의 최고위직인 황후가 된 입지전적인 여장부라고 한다.

 

또한 기황후가 당시 고려에 대한 정책에 있어서도 엇갈린 평가가 나온다.

기황후가 고려에 심한 내정간섭을 하였던 해악을 끼친 인물이라는 퍙가와 기황후로 인해서 고려에 대한 무리한 공물이나 공녀 요구가 사라진 점과 고려의 자주성이 더 강화되었던 시기와 기황후 통치 시기가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기황후가 오히려 고려에 유리한 정책을 추구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분명한 것은 기황후가 탄생한 것은 원래 기황후가 스스로 선택한 길은 아니라는 것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나은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점이다.

나라의 힘이 약해서 한 여린 여인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던져버린 셈이다.

 

그리고 해가 되든 이익이 되든 당시 기황후가 선택한 길과 행적은 기황후가 어쩔 수 없이 그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는 것과 기황후는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점이다.

그시대의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안위와 권력유지를 위해서 희생양으로 탄생시킨 시대의 모순된 현상을 단순히 한 여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인가?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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