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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소니 대 박두성의 대결, 시라소니의 싸움기술, 싸움실력



♦ 시라소니 박두성을 깨고 평안도 최고의 싸움꾼으로 등극

조선최고의 싸움꾼으로 불리우는 시라소니와 김두한 이전에 종로일대에서 큰 오야붕으로 이름을 떨치던 신마적이 중국 만주에서 대결을 벌이게 된 일화가 있다.

1938년 만주 봉천에서 벌어진 싸움천재 시라소니와 왕년의 종로오야붕 신마적의 대결을 전개하기에 앞서 시라소니가 어떻게 해서 평안도 아니, 북한 최고의 주먹으로 등극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1930년대 후반 당시 시라소니는 신의주를 주먹으로 평정하고 난후 평안도 최고의 주먹으로 알려졌던 안주의 박두성에게 도전장을 내밀며 북한 최고의 주먹을 가리게 된다.


1936년 평안도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박치기의 제왕 박두성에게 도전하기 위해 시라소니는 혈혈단신 혼자서 안주로 향했다.

시라소니는 신의주술집에서 동료들한테 경성 이북지역에서 가장 센 주먹이 안주의 박두성이라는 소문만을 듣고 박두성을 쓰러뜨림으로써 자신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안주를 찾아간 것이다.

시라소니라는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 싸움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어느지역이건 강하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반드시 찾아가서 그를 쓰러뜨려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안주역에 도착한 시라소니는 안주 뒷골목을 돌면서 몇몇 사람들에게 박두성의 거처를 수소문하게 되는데 뒷골목에서 만난 똘마니급 주먹들에게 박두성의 거처를 묻자 그들은 시라소니에게 시비를 걸어온다.

안주의 큰형님인 박두성의 소재를 알 필요없다고 하면서 시라소니에게 욕을 내밷은 것이다.

시라소니와 안주 똘마니 세명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뛰어난 싸움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시라소니에게는 사실 상대가 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주먹을 날리며 공격해 들어오는 그들을 시라소니는 가볍게 피해버리고 발차기로 한명을, 주먹으로 또다른 한명을 쓰러뜨리자 남은 한사람이 겁을 먹고 뒷걸음치며 달아난다.

시라소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달아난 그가 분명히 박두성을 데리고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에 달아났던 똘마니 한명이 박두성으로 보이는 덩치가 큰 어깨하나를 데리고 시라소니앞으로 다가왔다.

키가 육척이 넘는 거구의 어깨가 딱 벌어진 그 거한은 시라소니에게 말을 걸어온다. ‘네가 나를 보자고 했나, 너는 어디서 온 누구냐’


시라소니는 ‘나는 신의주에서 온 이성순인데 남들이 나를 시라소니라고 부르디, 내가 당신을 찾아온 이유는 당신과 한판 붙어서 승부를 가리기 위해서라우!’라고 맞받아쳤다.


이 말을 들은 박두성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생전 처음보는 놈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한판 붙자고 하니, 그것도 자신보다 휠씬 나이도 어리고 덩치도 자그마한 깡마른 자가 감히 자신에게 도전을 해오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박두성은 원래 씨름선수 출신이다. 평안도에서 열린 씨름대회에 나가서 황소를 수십마리나 차지하였을 정도로 완력이나 파워가 대단한 인물로 그의 싸움 주특기는 바로 박치기라고 

한다.


육척장신의 거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그의 박치기는 한방 맞으면 그대로 기절하고 만다.

평양이나 북한지역에서는 박치기를 기술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두성은 괴력의 힘과 박치기로 평안도일대의 많은 주먹들을 잠재우며 평안도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런 평안도 최고의 싸움꾼 박두성에게 감히 시라소니가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평안도 최고의 주먹을 가리기 위해서이다.

깡마르고 어린 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시비를 걸어오니 박두성은 너무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시라소니를 두손으로 확 밀어버렸다.

시라소니에 대해서 전혀 알지못했던 박두성은 시라소니를 평범한 양아치쯤으로 여기고 간단히 밀어버린 것인데 너무도 방심했던 박두성은 몇분 후에 일생일대의 큰 봉변을 당하게 된다.


박두성의 완력에 밀려났던 시라소니는 박두성에게 바로 박치기를 날렸다.

운동신경이 원체 뛰어났던 박두성은 시라소니의 첫 번째 박치기를 성급하게 피해버렸다. 첫 번째 박치기가 실패한 시라소니는 두 번째 박치기를 날렸는데 이번에도 박두성은 가볍게 피해버렸다. 박치기가 두 번이나 연거푸 실패한 시라소니가 잠시 주춤하자 이번에는 박두성이 공격해 들어왔다.




박두성은 시라소니를 붙잡고 집어던져 버렸다. 시라소니가 쓰러지자 박두성은 발로 시라소니의 복부를 가격했다.

시라소니는 잠시 머뭇거리던 사이에 완력이 강한 박두성의 두손에 낚아채여서 쓰러졌으며 쓰러진 상태에서 박두성의 오른발에 복부를 강타당해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시라소니를 잘 몰랐던 박두성은 시라소니가 쓰러져 배를 움켜잡고 고통스러워하자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박두성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시라소니를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시라소니는 복부를 가격당해서 잠시 누워있었으나 원체 체력이 뛰어난 시라소니는 금방 통증에서 회복하였고 1~2분 정도 휴식 후에 시라소니는 바로 뛰어올라 박두성의 이마를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라소니의 대단한 투쟁심이며 싸움본능인 것이다. 전혀 예상을 못한 상태에서 박두성은 시라소니의 솟구치는 박치기에 이마를 얻어맞고는 뒤로 밀려났다. 연이어 시라소니의 두 번째 박치기가 불을 뿜고 두 번이나 이마를 들이받친 박두성은 충격이 가중되어 비틀거리고 있었고 이를 놓치지 않고 시라소니는 세 번째 박치기가 작렬한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육척의 거구인 박두성이 드디어 쓰러져버린 것이다.


시라소니의 박치기 세 번의 공격으로 평안도 제일의 싸움꾼이었던 박두성이 그만 혼절해버리고 말았다.

시라소니가 신의주의 주먹세계를 평정하고 난 후 평안도의 최고주먹 박두성을 쓰러뜨리며 명실공히 북한 최고의 싸움꾼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1936년이었고 시라소니의 나이 21세였다. 박두성은 평양의 이화룡도 한 수 접하고 대하는 대단한 싸움꾼이었는데 북한 주먹의 거두였던 박두성을 시라소니가 혈혈단신을 찾아가 혼자서 쓰러뜨린 것이다.


평안도 최고의 주먹을 쓰러뜨렸으니 시라소니는 이제 북한 최고의 주먹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셈이었다.

그후 신의주로 다시 돌아온 시라소니는 한국인을 괴롭히는 일본형사를 두들겨 패고 난후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만주로 피신해버렸고 이로써 시라소니의 중국대륙에서의 유랑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남한지역에서는 김두한이 신마적을 쓰러뜨리고 경성최고의 주먹왕국을 세웠으며 같은 시기인 1936년에 북한지역에서는 시라소니가 박두성을 쓰러뜨리고 평안도 최고의 싸움꾼으로 등극하게 되는 주먹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김두한이나 시라소니가 같은 시기인 1936년에 각자 남한과 북한의 최고의 주먹자리에 오른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시라소니 대 신마적의 대결

신의주에서 체포령이 내려지자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게 된 시라소니가 먼저 찾아간 곳은 만주의 봉천지역이었다. 봉천은 지금의 심양으로 무역과 경제의 중심지이며 만주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심양에 시라소니는 신의주출신인 고향친구를 찾아서 봉천으로 들어온 것이다.


한편 1936년도에 신마적 엄동욱은 종로에서 김두한과 한판 대결을 펼쳤는데 그만 김두한의 발차기 세 번의 공격을 받고 김두한에게 패배하고 만다.

자신보다 나이가 한창 어린 김두한에게 패배한 신마적은 더 이상 경성에서의 미련을 버리고 동생들 일곱을 데리고 만주 봉천으로 지인을 찾아떠난다.

신마적은 1937년경 동생들을 데리고 만주 봉천에 정착하게 되었고 시라소니는 비슷한 시기에 만주 봉천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두사람은 머지않아 봉천에서 조우하게 된다.

만주에 온 신마적일행은 봉천에 있는 지인이 운영하는 칭니주점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만주에서 가장 거대한 주먹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봉천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상대를 만나게 된다.


이상대는 원래 평양사람이었는데 평양에서 조선인처녀를 폭행하려던 일본학생패거리들을 두들겨패주고 역시 체포령이 내려지자 어쩔 수 없이 평양을 떠나 만주로 유랑하다가 봉천에서 조선인들을 모아 거대한 주먹조직을 만들었으며 봉천두라는 별명으로 봉천일대에서 가장 큰 주먹나와바리를 구축했던 오야붕이었다.

봉천두 이상대는 자신의 주먹조직을 계속해서 불려나갔으며 부하 300~400명에 이르는 거대한 주먹조직의 보스로서 행세하였는데 이상대조직은 무기도 소지하고 있어서 당시 만주에서 활개치고 있던 화적(마적)떼들을 물리치고 지역주민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에 진출한 일본경찰들도 이들의 활동을 묵시적으로 인정해주고 있는 셈이었다.

어떻게보면 이상대의 주먹조직은 일본경찰이 담당하고 있던 치안활동의 일부를 담당해주는 역할을 하였기에 일본경찰들도 이들이 큰 사고만 치지않은 경우에는 이상대조직을 눈감아주었던 것이다.


그런 이상대가 칭니주점에 방문했다가 그곳 주인으로부터 신마적을 소개받게 되었고 신마적의 인물됨을 알아차린 이상대는 신마적일행을 자기조직에 스카웃하게 된다.

이상대는 신마적에게 봉천의 유흥가인 유조구지역 관리권을 맡겼으며 신마적은 봉천 유조구를 기반으로 해서 자신의 독자적인 주먹조직을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이당시 신마적과 동생들이 봉천의 오야붕 이상대의 휘하에 들어간 것이지만 신마적은 자신의 주먹조직을 확장하고 난 후 이상대조직으로부터 어느정도 독자성을 용인받고 있었다고 한다.


신마적은 이상대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서 자신의 세를 크게 불려나갔으며 나중에는 이상대 주먹조직 다음으로 큰 만주에서 거대한 주먹조직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상대가 만주에서 황제라고 한다면 신마적은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는 제후국의 군주 정도의 관계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경성에서 김두한에게 쫒겨나다시피 했던 신마적과 동생들은 이상대의 지원을 받아서 만주 봉천에서 자신의 새로운 나와바리를 구축하고 제2의 주먹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마적의 관할구역에 느닷없이 싸움천재 시라소니가 나타난 것이다.

시라소니는 항상 조직도 없이 혼자서 활동하는 독불장군스타일의 싸움꾼이다. 또한 시라소니는 그 어떤 주먹조직에게서도 영향을 받기 싫어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혼자서라도 그 주먹조직에 맞서기를 꺼려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 주먹조직이 악행을 일삼거나 자신에게 시비를 걸게되면 시라소니는 혈혈단신 혼자서 그 조직에 쳐들어가서 상대가 몇 명이든 상관없이 싸움을 치르는 대단한 담력, 배짱 그리고 싸움실력을 지닌 인물이다.




♦ 시라소니와 김두한의 싸움실력

우리나라에서 시라소니 정도의 담력과 싸움실력을 지닌 인물은 과거든 미래이든 시라소니 이외에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싸움에 관한한 독보적인 실력과 기술을 지닌 시라소니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김두한이라고들 하지만 냉정히 판단해보면 김두한도 시라소니에게는 2%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 정답이다.


김두한이 구마적과 신마적을 쓰러뜨리고 초창기 자신의 주먹조직을 구축해나갈 때에는 싸움을 잘했지만 전국을 아우를 정도로 거대한 주먹조직을 만든 후에는 전면에 나서지않고 부하들이 대신 싸워나갔다.

이것이 김두한의 한계이다. 혼자서 적진으로 쳐들어가 많게는 40대1의 싸움을 벌여 제압했던 시라소니에 비해 김두한은 주로 1대1싸움에 능했고 조직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주먹세계를 가동했기 때문에 시라소니가 김두한과의 비교에서 비교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뭏튼 봉천의 유조구거리에서 주먹조직을 확장해나가고 있던 신마적의 구역에 시라소니가 나타났던 것이고 시라소니가 신마적의 부하들을 두드려패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사건으로 조선최고의 싸움꾼 시라소니와 과거 종로의 오야붕이었던 신마적이 조우하게 된다.


시라소니와 신마적의 대결은 지면상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 연재하게 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 뵙겠습니다.


- 계속 -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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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시대 시라소니 싸움실력, 감격시대 신정태역 김현중 연기




시라소니 역할을 맡은 ‘감격시대’ 김현중과 ‘야인시대’ 조상구가 새롭게 눈길을 모으고 있다.

전에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나왔던 시라소니가 KBS2 수목드라마 ‘감격시대’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다.

KBS2 수목드라마 ‘감격시대:투신의 탄생’에서 김현중이 맡은 신정태가 다름아닌 시라소니에서 모티브를 얻어 설정한 배역이라고 하니 ‘감격시대’의 신정태는 다름아닌 박치기의 제왕 시라소니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월 26일 방송된 수목드라마 ‘감격시대’에서 신정태(김현중 분)는 일본낭인의 습격을 받게 되는데 칼을 든 일본낭인과 결투를 벌이는 신정태(김현중 분)는 일본낭인의 칼에 찔리거나 스치면서도 끝까지 용감하게 싸워서 낭인을 물리쳐버리자 이를 지켜본 왕백산(정호빈 분)으로부터 시라소니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왕백산은 ‘늑댄줄 알았더니 시라소니’라며 신정태의 실력을 인정하면서 극중 처음으로 시라소니라는 이름이 언급됐다.


지난 2002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등장한 시라소니 역은 조상구가 맡았는데 당시 조상구는 고독하면서도 강렬한 눈빛과 함께 북한 말투, 뛰어난 액션연기로 시청자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었다.


본명이 이성순인 시라소니는 1916년생 평북 신의주 출신으로 신의주를 비롯한 평안도, 만주, 북경 등 중국일대를 주먹 하나로 평정하고 ‘싸움천재’ ‘싸움기계’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던 전설적인 불세출의 박치기제왕이다.




특히 시라소니는 일제강압기에서 만주와 북경, 상해로 진출해서 일본야쿠자들을 주먹과 박치기로 제압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달래곤 하였는데 시라소니의 뛰어난 싸움실력은 만주 폭력조직과의 ‘1대 40의 대결’에서 큰 빛을 발한다.


당시 시라소니는 억류되어 있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혼자서 만주 폭력조직 아지트로 침입해서 40여명의 일본야쿠자 패거리들과 혈투를 펼치는데 40여명의 패거리들과의 목숨 건 싸움에서 그들 대부분을 물리치고 결국 두목의 항복을 받아내어 붙잡혀있던 친구를 구해낸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시라소니의 ‘1대 40의 대결’의 승리는 시라소니를 ‘싸움의 천재’라는 닉네임이 붙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실제 대결로 유명하며 시라소니가 이룩한 ‘1대 40의 대결’의 승리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간적인 업적으로서 기록되고 있으며 시라소니를 얘기할 때면 항상 따라다니는 시라소니의 수식어가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의 뛰어난 싸움꾼이었던 김두한, 신마적, 구마적, 김기환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싸움의 업적을 시라소니만이 이룩한 것이다.

해방 후 서울로 월남한 시라소니는 1946년에 서울 종로회관에서 우미관의 오야봉 김두한과 조우하게 되는데 이 때에도 김두한과 시비가 붙어 김두한 부하 김관철을 박치기공격 하나로 KO시켜 버리고 김두한으로부터 형님칭호를 받게 된다. 다음 포스팅에서 시라소니에 대해서 집중 탐구해볼 예정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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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한국 태권도액션영화, 한용철의 용호대련

 

(※ 페이지 하단 부분에 용호대련 동영상이 있습니다.)

 

 

한국형 마카로니 웨스턴 스타일의 태권액션 영화의 묘미를 보여준 한용철의 용호대련!

용호대련 출연자 - 한용철, 우연정, 김문주, 배수천, 김홍지, 장일식, 최재호

 

한용철이 출연한 ‘용호대련’은 서양의 웨스턴영화와 동양의 무술액션영화를 절묘하게 혼합해놓은 한국판 태권도 영화이지요.

먼저 한용철의 ‘용호대련’을 소개하기에 앞서 한용철이 활동했던 70년대 영화계 상황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죠.

 

 

 

1970년대는 영화계에 있어서 격동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지요. 홍콩,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영화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며 세계적이 톱스타로 떠올랐던 이소룡이라는 거물이 사망함으로써 홍콩영화계에는 이소룡의 대타를 찾기 위해 비상이 걸렸지요.

이소룡식 쿵푸무술영화를 만들면 흥행의 대성공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이소룡에 버금가는 무술스타 발굴에 혈안이 되었던 시기가 70년대 중후반이었죠.

 

우리나라 영화계에서도 무술액션영화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두용감독이 이소룡 못지않은 태권도고단자들을 대상으로 포스트이소룡 찾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두용감독이 찾아낸 태권도고수가 바로 한용철이라는 재미교포였지요. 그의 미국식 이름은 챨리 셸(혹은 챠리 셀)이랍니다.

 

 

1970년대 이두용감독이 추구하는 영화는 한국적인 색채가 강한 태권도영화였지요. 이두용감독은 1974년 한용철이라는 태권도사범을 내세워서 태권액션영화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장르를 개척합니다.

이두용감독에게 스카웃되어 ‘용호대련’과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등 여러 편의 한국무술영화에 출연했던 재미교포 한용철은 70년대 한국형 태권도영화의 무술스타로 각광을 받게 되지요.

 

이두용감독은 미국에서 태권도사범으로 활동하던 재미교포 한용철을 주연으로 기용해서 이소룡의 홍콩식 쿵푸영화에 맞설 수 있는 한국형 태권도영화를 많이 만들었으며 이두용감독과 한용철이 콤비로 만들었던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돌아온 외다리(속)’ ‘배신자’등은 그당시 흥행에도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면서 70년대 태권액션무술영화의 붐을 일으키면서 한동안 태권도 액션영화가 큰 유행을 타게 되었지요.

 

 

74년에 이두용감독과 한용철이 손을 잡고 만들었던 영화 ‘용호대련’은 한국형 태권액션영화의 효시이자 원조가 되었던 작품이라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이소룡이 붐을 불러일으켰던 무술액션영화를 이소룡이 죽은 후 한국의 한용철이라는 무술스타가 그 대통을 이어받아서 태권액션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면서 무술액션영화의 인기를 계속 이어나갔던 것이지요,

 

70년대 활화산처럼 불이 붙었던 무술액션영화들이 이소룡의 영향으로 우후욱순처럼 수없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대부분의 무술액션영화들이 이소룡의 짝퉁 흉내를 내는 수준이하의 작품들이 많았지요.

7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소룡스타일의 인기와 흥행을 노리고 여러명의 무술배우들을 앞세워서 수많은 무술액션영화들이 탄생하였지만 그 영화의 대부분이 영화의 완성도나 질이 떨어지는 수준 이하의 영화들이라서 저질영화라는 딱지가 붙으면서 한국 무술액션영화의 이미지만 크게 흐려놓았으며 흥행에도 실패하곤 했었지요,

 

박종국, 강대희, 바비킴, 거룡, 여소룡, 등 무술배우들이 이시기에 많은 무술액션영화들에 출연하면서 이소룡영화의 인기와 붐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졸속제작으로 질과 완성도가 떨어지는 B급영화들로 추락하여 대부분 흥행에 실패하였지요.

 

 

그런 와중에 이두용감독이 스카웃한 한용철은 대부분의 짝퉁 무술스타들과는 달리 70년대에 가장 성공한 무술스타로서 각광을 받았던 유일한 무술배우라고 할 수 있지요.

한용철은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등에 출연하면서 한국형 태권액션영화의 스타일을 완성했으며 다른 액션영화들과는 달리 흥행에도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수많은 태권영화 메니층들을 양산시킨 장본이랍니다.

즉, 한용철이 출연한 태권액션영화는 다른 저질의 액션영화들과 다르게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그당시 젊은 메니아층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멋지고 뛰어난 무술스타로서 각인되고 있지요.

 

용호대련의 우연정과 한용철

 

70년대에 유행했던 수많은 무술액션영화들보다 질적으로 우수했던, 한용철이라는 이름 석자를 뚜렷하게 각인시킨 작품이 바로 ‘용호대련’이며 ‘용호대련’은 한국 태권무술영화의 효시로 평가받는 수작이지요.

 

‘용호대련’에서 한용철은 화려하고 멋진 발차기액션을 보여줌으로써 젊은 관객들의 환호와 갈채를 많이 받았던 무술배우이지요.

한용철의 긴 다리에서 뻗어나오는 멋지고 빠른 발차기액션은 정말 환상적이었고 작품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매력이 있었지요.

70년대 활동하던 수많은 무술배우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한용철만의 독특한 연기와 화려하고 뛰어난 태권도액션은 이소룡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요.

 

 

이소룡의 발차기는 주로 옆차기와 날라차기 위주로 빠르고 절도가 있지만 다양성이 결여되어 있지요. 그렇지만 한용철이 보여준 태권액션은 이소룡이 보여준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다양한 태권도의 묘기를 볼 수가 있었던 점에서 이소룡의 아쉬움을 달랠수 있는 대리만족을 충족시킨 인물로서 손색이 없었지요.

 

 

1974년~70년대 후반까지 70년대 중후반은 한국 무술액션영화에 있어서 한용철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한용철의 영화들은 한용철의 화려한 발차기연기로 인해서 흥미와 볼거리를 많이 보여주었답니다.

 

한용철이 74년과 75년경에 10여편의 태권도영화를 찍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난후 한용철이라는 걸출한 무술스타가 부재한 상황에서 한국 무술액션영화계에는 바야흐로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지요.

이소룡식 쿵푸영화에 더하여 한용철식 태권영화를 모델로 삼아 수많은 무술배우들이 출연해서 B급 무술액션영화들이 활개를 치게 되었으며 이소룡이나 쿵푸를 모방하거나 배끼기에 혈안이 되었던 이 당시 B급 무술액션영화들은 영화의 질적인 저하로 인해서 흥행에도 실패하게 되고 관객들을 무술액션영화들에게서 멀어지게 만든 요인이 되었지요.

 

 

이후 80년대에는 한국의 무술액션영화는 저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며 한국의 무술액션영화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을 잃고 대신 멜로영화가 그 빈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지요.

 

80년대 유행했던 신파조의 멜로영화들도 수준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소룡 짝퉁

스타일의 B급 무술액션영화들보다는 그런대로 비교우위가 있어서 인지 한동안 붐을 타게

됩니다.

아뭏튼 70년대 중반 한용철의 출연으로 인기를 끌었던 한국형 태권무술영화는 한용철의 은퇴로 인하여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그를 대신한 많은 짝퉁 무술배우들의 질낮은 연기로 인해서 80년대에는 한국 무술액션영화 자체가 안타깝게도 사장되고 맙니다.

 

중국으로 건너가서 성공을 거둔 황정리만이 잠깐동안 흥행에 성공한 듯 보였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고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거의 한국무술영화가 제작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무술액션영화라고 하면 그 기반을 다져놓았던 한용철(챠리 셀)만이 그 명암을 내놓을 수가 있게 되었지요,

 

영화 ‘용호대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용철이 내뻗는 빠르고 화려한 발차기는 한편의 예술과도 같고 다른 무술배우들에서는 볼 수 없는 통쾌함과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지요.

영화 ‘용호대련’에서는 반가운 얼굴이 보입니다. 바로 우연정이지요. 70년대 한국의 킴노박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한국의 글래머 여배우이지요.

 

 

우연정은 70년대에 멜로영화와 액션영화에서 많이 출연했던 매력적인 여배우로서 남성들에게 그 섹시하고 요염한 미모로 인해 인기를 많이 끌었던 여배우지요.

나중에 결혼하고 난 후 우연정은 다리에 종양이 생겨서 두다리를 절단하는 불행한 일이 겪게 된 정말 안타까운 여배우랍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지요. 한용철의 ‘용호대련’ 동영상을 감상하면서 70년대 추억의 시대로 돌아가 보도록 하죠!

 

 

한용철의 용호대련 1부 하이라이트 동영상 

 

 

  

 

 

한용철의 용호대련 2부 하이라이트 동영상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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