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허리웃의 청순미인 오드리 헵번의 영화같은 인생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신데렐라처럼 청순한 미모를 한껏 발산하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여배우가 바로 오드리 헵번이다. 오드리 헵번은 50,60년대 허리웃영화계에서 인기를 한몸에 모았던 청순미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영국출신의 여배우인데 그녀가 열연했던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을 단숨에 세계적인 톱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영원히 잊혀지지않을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긴생머리에 하얀브라우스를 입고 순진하게 웃는 오드리 헵번의 청초하고 청순한 미모는 전세계의 수많은 남성팬들의 가슴을 한없이 설레이게 했으며 오드리 헵번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50~60년대 허리웃 전성기에 수많은 미녀 여배우들이 있었지만 우리의 심금을 울릴 만큼 청초하고 청순한 이미지를 지닌 배우는 오드리 헵번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섹시하고 글래머스한 소피아 로렌이나 조각같은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리즈 테일러나 선굵은 미모를 지닌 에바 가드너 등 여배우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진한 감동을 자아내는 청순미만큼은 오드리 헵번을 따라가기 힘들다.

 

오드리 헵번은 1929년 영국 은행가인 아버지와 네델란드 명문귀족가문인 어머니 사이에 벨기에에서 출생했으며 어린시절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는데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되고 전쟁의 참상과 후유증으로 전쟁기간중 다소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오드리 헵번은 소녀시절 발레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그녀의 너무나 큰 키(170cm)가 발레하는데에 큰 장애가 되어 결국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 했고 영국 런던으로 돌아와 모델로써 활동하게 된다.

 

그녀의 모델생활은 그녀의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창출하는데 큰 안목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것은 훗날 ‘로마의 휴일’같은 대작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은 모델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영화에도 출현하였는데 1949년 처음 영화에 단역을 맡아 출연하게 되고 그후 몇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지만 그녀가 맡은 역할은 단역이나 조연급에 한정되어 있어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3년간 무명배우로서 활동하게 된다.

오드리 헵번이 겪은 3년간의 무명배우 생활은 여배우로서는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오드리 헵벤같이 아름다운 여배우도 이렇게 긴 기간동안 무명배우로서 활동했다는 자체가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은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배우활동을 해나가던 중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지지’라는 연극에 주연으로 출현하게 되었고 ‘지지’에서의 오드리 헵번의 연기를 보고 그녀에게 반했던 유명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단번에 오드리 헵번을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차기작품의 여주인공감으로 낙점을 찍는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과 오드리 헵번의 만남은 오드리 헵번에게 일생일대의 최고의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고 세계 최고의 로맨스 영화의 탄생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벤허’같은 대작을 연출한 명감독으로 그가 만들려고 하는 차기작은 바로 ‘로마의 휴일’이었고 오드리 헵번의 청초한 이미지가 주인공 앤공주의 청순미에 딱 드러맞는다고 확신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판단은 적중했고 이로써 영원한 멜로영화의 명작 ‘로마의 휴일’이 탄생하게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로마의 휴일’은 대성공을 거두며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고 청순한 앤공주역을 맡은 오드리 헵번은 수많은 관객들의 열광적인 찬사와 갈채를 받으면서 신데렐라 오드리 헵번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오드리 헵번은 허리웃 첫 주연작인 ‘로마의 휴일’에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함께 이루게 되어 그녀는 ‘로마의 휴일’의 앤공주 보다 더한 새로운 신데렐라로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그녀의 세련된 패션스타일은 수많은 여성들의 따라하는 트렌드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런던 모델생활에서 익힌 뛰어난 패션감각 덕분이었다.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에서의 성공으로 인해 스타덤에 오르고 수많은 남성팬들의 로망의 대상이 된다.

그후 오드리 헵번은 계속해서 영화에 출연하는데 코미디 멜로영화인 ‘사브리나’를 비롯 ‘전쟁과 평화’(56년) ‘하오의 연정’(57년) 등에 출하며 자신의 인기를 계속 이어나갔으며 이영화들 역시 그녀의 청순미가 돗보이는 작품들이었다.

59년 출연한 ‘파계’에서는 오드리 헵번은 한층 더 성숙한 연기력을 보여줌으로써 미모뿐만 아니라 명실상부한 연기력을 겸비한 배우로써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고 이영화로 영국아카테미 여우주연상을 비롯하여 3개의 상을 휩쓸어버린다.

 

그녀는 또한 ‘티파니에서 아침을’(61년)에 출연한 후 64년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하게 되는데 이영화 주연자리를 놓고 쥴리 앤드류스와 경쟁을 벌이지만 결국 오드리 헵번이 주연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이영화에서 그녀는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며 그녀의 연기력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오드리 헵번이 100만달러의 개런티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녀는 사상최초로 출연료 100만달러를 돌파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60년대의 100만달러라고 하면 지금으로 따지면 거의 천억원에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오드리 헵번은 이미 60년대에 달성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오드리 헵번의 연기력과 상품성이 그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결혼생활은 화려한 은막생활과는 달리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68년 결혼한 맬 팰로와는 14년 후에 이혼하게 되고 70년 재혼했던 안드레아 도티와도 9년 후에 이혼하는 등 사적으로는 불운한 결혼생활을 하였으며 그 들사이에 두 명의 아들을 두고 있으며 79년 두 번째 이혼 후에는 93년 대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재혼을 하지않고 독신을 고집했다고 한다.

그녀는 88년 유니세프친선대사로 아프리카를 방문한 후부터 그녀의 남은 여생을 소외받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전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녀는 사망할 때까지 아프리카의 열도에서 기아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자선활동을 하고 돌보면서 자신의 여생을 마감했다. 쉬바이쩌박사가 그랬던 것처럼---

진정한 아름다움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실천해보였던 20세기 허리웃의 가장 아름다운 천사, 오드리 헵번 그녀는 외적인 아름다움 못지않게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그녀를 진정 잊지못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오드리 헵번의 청초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을 과연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인가? 오드리 헵번의 청순미를 사진으로 감상해보자!

 

 

 

 

 

 

 

 

 

 

 

 

 

 

 

 

 

 

 

 

 

Posted by 프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