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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드의 우아한 미녀 잉그릿드 버그만, 카사블랑카, 서프라이즈 로셀리니감독




1940년대에서 50년대까지 허리우드 영화에서 수많은 명작들을 많이 남겼던 잉그릿드 버그만은 미모와 연기력을 모두 갖춘 스웨덴이 낳은 가장 뛰어난 여배우라고 할 수 있다.

잉그릿드 버그만의 영화를 보면 영혼이 들어가 살아 숨쉬는 듯 뛰어난 연기력에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율이 멈추지 않는 실감나는 연기력을 느끼게 하는 몇 안되는 탁월한 연기자였다.



영화 제목만 들어도 대단한 명성이 느껴지는 영화 ‘가스등’ ‘개선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카사블랑카’ ‘잔다르크’ ‘아나스타샤’ 등 허리우드 영화역사상 최고의 수작으로 불리워지는 명작들은 대부분 잉그릿드 버그만이 주연으로 출연해서 탄생된 영화들이다.

잉그릿드 버그만은 현실감이 살아있는 탁월한 연기력뿐만 아니라 그녀의 조각같은 빼어난 미모를 함께 갖추고 있어 그녀가 40~50년대의 허리우드영화에서 주름잡으며 명성을 높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신이 인간에게 선물로 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빼어나고 우아한 미모를 갖춘 잉그릿드 버그만! 거기에다가 뛰어난 연기력에 교양미까지 갖춘 그녀는 40~50년대 수많은 영화들에 출연하며 전세계의 관객들을 사로잡아 버릴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렸었다.



원래 스웨덴 출신으로 스웨덴에서 연기를 시작한 잉그릿드 버그만은 아름다운 용모와 타고난 연기력 덕분에 몇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큰 주목을 받자 그녀의 명성이 미국 허리우드에까지 전해지고 허리우드 파라마운트사는 잉그릿드 버그먼을 단번에 스카웃하고 1942년 ‘카사블랑카’에 출연시켰는데 이 영화가 엄청나게 히트하는 바람에 스웨덴에서 건너온 잉그릿드 버그만에 대한 선택이 옳았음을 만천하에 과시한다.


잉그릿드 버그만이 미국에 온 후 첫 번째로 크게 성공한 영화 ‘카사블랑카’는 잉그릿드 버그만을 사실상 스타덤에 오르게했던 그녀의 첫 흥행성공 작품으로 꼽힌다.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이별을 나누는 공항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전세계 수많은 관객들을 감동시켰던 명장면으로 유명하다.


험브리 보가드와 애절한 눈빛과 표정연기로 마지막 아쉬운 이별을 표현하는 그녀의 흡입력 있는 연기에 수많은 관객들이 그녀에게 흠뻑 빠져들어가 버렸던 것이며 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다른 여배우에게 돌아갈 뻔했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여주인공 자리가 잉그릿드 버그만에게 돌아오는 계기가 마련된다.

파라마운트사 창립 50주년 기념작품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전격 캐스팅되어 출연한 잉그릿드 버그만은 청순한 매력을 한껏 발산하면서 흥행 성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파라마운트사 창립 50주년 기념작품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전격 캐스팅되어 출연한 잉그릿드 버그만은 뛰어나고 청순한 매력을 한껏 발산하면서 흥행 성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1944년 그녀를 출연시킨 또다른 영화 ‘가스등’이 엄청난 대박을 터뜨리게 되고 잉그릿드 버그만은 단번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룬다. 미국 허리우드에 건너온 지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잉그릿드 버그만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 허리우드를 거의 석권한 것처럼 크나큰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 후 잉그릿드 버그만의 영화인생은 순풍에 돗단 듯 거침없이 인기행진을 이어갔다.


그런데 잉그릿드 버그만의 연기 절정의 시기에 커다란 스캔들이 터진다.

신은 인간에게 완벽함을 허락하지 않았나! 그 이유는 인간이 위대해져서 신의 영역에 침범하기를 꺼리기 때문이었으리라!

미모, 연기력, 교양미 등 모든 것을 거의 다 갖춘 잉그릿드 버그만이었지만 그녀의 영화에 대한 뜨거운 집념과 모험심 때문에 터진 스캔들로 인해 그녀에게 영원히 씻기지 않은 불명예가 그녀의 인생 앞을 가로막아 버렸다.



1948년경에 터진 잉그릿드 버그만과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셀리니감독과의 염문이 바로 그것이다. 잉그릿드 버그만은 그 당시 피터 린드스트롬과의 결혼해서 딸 피아까지 낳아 기르던 유부녀였는데 스스로 자초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인생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한창 인기절정이었던 48년경 잉그릿드 버그만은 이탈리아 사실주의영화 ‘전화의 저쪽’을 보고 큰 감명을 받고 영화감독이었던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셀리니감독에게 먼저 편지를 써서 보내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의향을 비친다. 단지 영화 때문이었을까 하고 의문이 드는 부분은 그녀가 보낸 편지의 맨 마지막째 줄에 ‘사랑한다’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타냈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 뿐만 아니라 조각같은 미모를 지닌 잉그릿드 버그만의 프로퍼즈를 마다할 병신을 이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감독과 영화를 같이 찍기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간 두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번에 사랑에 빠졌고 역사적인 동거에 들어간 잉그릿드 버그만은 결국 전남편과 딸을 무참히도 버리고 로베르토 로셀리니감독과 전격 결혼해버린다.

이와같은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킨 잉그릿드 버그만에게 허리우드와 미국의 매스컴은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으며 심지어 정치인까지 나서서 ‘미국의 명예를 더립힌 여자’라고 맹비난을 해대어 잉그릿드 버그만의 명예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이후 세계적인 불륜녀라는 꼬리표를 달았던 잉그릿드 버그만은 의연히 이탈리아로 넘어가 로셀리니감독과 동거하면서 로셀리니감독의 여러편의 실험영화들에 출연하면서 미국과 등을 지게 된다.

자신도 이혼하고 유부남이었던 로셀리니감독도 이혼시키고 두사람이 결혼한 후 함께 만들었던 이탈리아영화들이 모두 다 흥행에 실패하면서 두사람은 완전히 파산하게 된다.

‘세기적인 불륜녀’라는 비난을 받았던 잉그릿드 버그만은 그녀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도덕적으로도 엄청난 불명예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연이은 영화의 실패로 자신뿐만 아니라 로셀리니감독까지 파산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로셀리니감독과 뜨거웠던 8년간의 모험을 끝내고 미국 허리우드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잉그릿드 버그만은 사실상 거지가 다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잉그릿드 버그만의 영화에 대한 무서운 집념은 불리한 환경속에서도 꺾일 줄 몰랐으며 56년 오랜만에 출연한 허리우드영화 ‘아나스타샤’에서 혼신의 사력을 다한 불꽃같은 연기력으로 또다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녀의 건재함을 만천하에 과시하면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연극평론가 라스 슈미트와 세 번째 결혼을 하고, 또 다른 영화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그녀의 영화에 대한 집념을 또다시 불살라 나간다.

74년에 출연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살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타내는 쾌거를 이루고 뒤에도 ‘가을 소나타’ ‘골다라는 여인’ 등 그녀의 나이 60대에 접어든 시기에도 그녀의 영화출연은 계속되었고 그녀를 비난했던 미국사회도 그녀의 뜨거운 연기에 대한 열정에 환호갈채를 보내게 되었다.


평생을 불꽃같은 연기에 대한 열정을 갖고 살았갔던 잉그릿드 버그만은 유방암에 걸려 82년 그녀의 67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미국 영화협회에서는 그녀를 ‘가장 위대한 여배우 50인’ 중 4위에 올려놓으며 그녀의 뛰어난 연기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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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617회, 60년대의 육체파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의 웨딩스캔들’




60년대에 마릴린 몬로와 견줄 수 있는 세계적인 섹시육체파배우가 한 명 있는데 그녀는 바로 이탈리아 태생의 지나 롤로브리지다이다.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노틀담의 꼽추’라는 영화를 통해 전세계의 팬들에게 20세기 가장 섹시한 여배우라는 찬사를 들으며 허리우드에 입성했으며 그 후 ‘솔로몬과 시바여왕’을 찍으며 글래머스타로 확실히 자리메김했고 아름다움과 섹시함을 모두 갖춘 20세기의 모나리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리워졌던 전설적인 섹시글래머스타이다.





또한 60년대 마릴린 몬로와 더불어 세계적인 섹시심볼로 명성을 날렸는데 그런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2013년 늦은 나이에 때아닌 결혼소동이 벌어져서 큰 화제를 몰고왔다.


2013년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한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신문에 난 기사는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스페인부동산 사업가인 리 가우와 2010년 결혼했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결혼소식을 접한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즉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은 절대 리 가우와 결혼하지 않았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기자들의 질문에 지나는 한 때 리 가우를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결혼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던 것이다. 세기적인 스켄들로 기록된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리 가우의 관계는 3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모나코의 한 파티에서 리 가우를 처음 만났는데 당시 24세의 젊은 청년 리가우는 지나 롤로브리지다의 미모에 흠뻑 빠지게 되고 34살의 나이차에 불구하고 두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34년이라는 나이차를 초월한 두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전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


그리고 2006년 두사람은 결혼발표까지 하게 되었다가 돌연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결혼을 취소하고 말았다. 지나는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리 가우와 결혼생활을 영위해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2013년 리 가우는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스페인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외부의 노출을 극도로 꺼린 지나 때문에 8명의 하객들만 모아놓고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이다.


60년대의 대표적인 섹시육체파 여배우 마릴린 몬로와 지나 롤로브리지다


그렇지만 지나 롤로브리지다의 주장은 또 다른데, 리 가우가 가짜 신부를 만들어서 결혼식을 날조한 것이라고 지나는 주장했다. 리 가우의 변호사 또한 결혼식장에서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아닌 다른 신부를 보았다고 증언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 가우는 여전히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결혼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데 리 가우는 실제 결혼식을 올린 것 맞는데 지나가 세간의 눈을 의식해서 자신 대신 다른 여자로 하여금 신부역할을 시켜서 결혼식을 치르자고 제안했다고 주장한다.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자신보다 34살이나 어린 남자와 결혼하면 세상이 자신을 욕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대역을 써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리아 필라르라는 여성이 실제로 자신이 지나 롤로브리지다를 대신해서 리 가우와 결혼대역으로 나섰다고 증언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끝까지 자신은 리 가우와 결혼한 적이 없으며 모든 것이 리 가우가 꾸며낸 일이며 리 가우를 사기꾼으로 몰아갔다. 지나 롤로브리지다의 주장은 리 가우가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자신과 결혼을 거짓으로 꾸며서 나중에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전재산을 가로채기 위한 수작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 쪽에서는 결혼을 했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결혼을 안했다고 하는 희대의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사실인가!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리 가우가 맞받아치고 나섰다. 지나가 결혼을 부정한 이유는 바로 25살의 매니저 안드레아 때문이라고 리 가우는 주장했다. 지나의 매니저인 안드레아는 25살의 젊은 청년으로 3년 전부터 지나의 매니저를 담당했는데 매니저 안드레아가 지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는 수시로 지나와 안드레아의 관계를 방해했다고 한다.

그는 리 가우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고 지나 롤로지다에게 말하는 등 두 사람 관계를 이간질해서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미모와 섹시한 관능미를 동시에 겸비한 60년대 전설, 지나 롤로브리지다


즉 지나의 매니저 안드레아가 지나의 유산을 노리고 리 가우와 지나 롤로브리지다를 멀어지게 만들었고 지나를 뒤에 조종해서 지나로 하여금 결혼을 부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리 가우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지나의 매니저 안드레아는 한 동영상을 보여주며 이 영상이 리 가우가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 동영상은 2013년 최근에 찍은 것으로 리 가우는 결혼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자신은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지나와 리 가우의 결혼에 대한 공방은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오고 있어서 세상에 해프닝도 이런 해프닝이 또 없다.

결국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현재 리 가우를 명예훼손죄와 사기죄로 고소했다고 한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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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웃의 청순한 요정 ‘오드리 헵번’의 인생과 영화

 

 

 

(1929.5.4 출생 ~ 1993.1.20 사망)

 

청순한 미모와 천사와 같은 마음씨로 세계적으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허리우드의 요정 스타 오드리 헵번은 매년 미국 시사잡지사에서 뽑는 100대 미녀에 그것도 상위권 2위에 단골로 뽑히는 미녀스타이지요.

 

 

 

1950~60년대에 터질듯한 가슴과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는 글래머 여배우들이 인기를 끌던 시기에 한 마리의 청초한 백조를 연상시키는 청순한 이미지의 여배우가 나타나 전세계의 관객들의 시선과 관심을 집중시키며 새로운 스타의 출연을 예고하였는데 바로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청순한 미모와 연기력으로 열연한 신데렐라 요정 오드리 헵번이지요.

명감독 윌리엄 와일러가 메가폰을 잡고 그레고리 펙과 함께 출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요정 같은 공주 ‘앤’으로 분해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오드리 헵번은 ‘새로운 신데렐라가 나타났다’고 신문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만인의 연인으로 떠오르지요.

 

기존의 인기를 많이 끌었던 그레타 가르보, 에바 가드너, 마릴린 몬로 같은 풍만한 육체의 글래머들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가냘픈 몸매를 지닌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는 무척 청순했으며 우아했고 황홀했는데 이러한 비육감적 청순미가 오히려 다른 여배우들과 오드리 헵번과의 차별화를 도와줬으며 풍만한 육체파배우들에게서 이미 식상한 관객들은 오히려 비육감적인 오드리 헵번의 청순미와 순수함에 매료되기 시작했지요.

 

가냘픈 육체와 청순한 미모를 간직한 오드리 헵번이지만 그녀의 연기는 활화산같이 뜨겁고 영혼을 울리는 정열과 심금을 적시는 감동을 만들어주기에 우리는 오드리 헵번의 청순한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녀의 정열적인 연기력에 감동을 받게 된답니다.

 

영혼을 울리고, 감동과 환희를 가져다주는 오드리 헵번의 뛰어난 연기력은

‘로마의 휴일’에 이어 ‘전쟁과 평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용서받지 못할 자’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불후의 명작들을 계속 만들어내며 전세계의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찬사와 사랑을 받게 되지요.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오드리 헵번의 또 다른 기념비적 작품이지요. 고급 콜걸인 홀리역을 깜찍하고 우아하게 연기한 오드리 헵번은 이 작품에서 ‘문리버’를 직접 불러 또다른 그녀의 매력을 발산했으며 연기 못지않게 뛰어난 그녀의 노래실력은 공인되었지요.

 

 

최고의 걸작품 ‘로마의 휴일’ 못지않게 흥행에 성공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는 오드리 헵번의 뛰어난 연기력을 또한번 조명하게 하는 걸작이지요.

1964년 이미 나이가 전성기를 지날 무렵인 36세의 중년의 나이에 출연한 영화 ‘마이 페어 페이디’에서 중년의 오드리 헵번은 여전히 우아함과 청순함을 간직한 미모로 세계의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줬으며 불꽃과도 같은 그녀의 정열적인 연기력은 또한번 수많은 관객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선사하지요.

 

64년에 제작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는 몇가지 에피소드가 전해지는데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연후보 자리를 놓고 쥴리 앤드류스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사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이미 쥴리 앤드류스가 연극에서 먼저 연기한 경험이 있어서 처음에는 쥴리 앤드류스가 낙점이 되었었지만 오드리 헵번의 우수한 연기력을 높이 산 제작진의 결정으로 결국 주연 자리는 오드리 헵번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하지요.

뮤지컬 영화인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은 뛰어난 노래실력을 유감없이 과시했으며 역시 농익은 능숙한 연기를 보여주어 그녀의 연기력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확인시켜 주었지요.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포스터

 

저는 개인적으로 ‘마이 페어 레이디’로 오드리 헵번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탈 수 있는 명연기를 보여주었다고 생각되어지는데요. 정말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는 뛰어났지요. 오드리 헵번의 팬 분들이라면 반드시 권하고 싶은 영화가 바로 ‘마이 페어 레이디’랍니다.

또한 ‘마이 페어 레이디’는 오드리 헵번에게 100만 달러의 개런티를 만들어준 영화라고 하지요. 오드리 헵번이 영화 출연사상 최초로 1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영화 출연료로 100만 달러를 받은 건 오드리 헵번이 최초라고 합니다.

60년대에 100만 달러라고 하면 대단히 큰 금액인데 지금 시세로 환산하면 거의 1000억 원에 육박할 정도의 거금이지요!

이 거금의 출연료는 당시 오드리 헵번의 높은 인기도를 상징하는 바로미터가 되지요.

 

오드리 헵번은 이후 ‘뜨거운 포옹’과 67년 ‘언제나 둘이서’ 등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하면서 인기를 이어가다가 68년부터 한 9년 동안 공백기를 갖게 되지요. 그리고 1976년 다시 영화 ‘로빈과 마리안’ 출연을 계기로 영화계에 복귀해서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하게 됩니다.

 

 

 

♣ 오드리 헵번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이혼

오드리 헵번의 삶은 그녀의 파란만장한 영화 인생 못지않게 정말 파란만장했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생애 총 2번의 결혼을 했었지요. 그리고 두 명의 아들을 두었지요.

오드리 헵번은 6세 때 아버지가 가출해버려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며 살아왔던 경험이 있어서 부성애를 풍기는 그런 남성을 원하고 있었지요.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에 출연한 그 이듬해에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 상대는 영화 ‘전쟁과 평화’에 함께 출연한 배우 멜 페러(Mel Ferrer)였고 첫남편 맬 페러는 12살 연상으로 제작자를 겸한 당대의 인기 영화배우였지요.

 

영화 ‘로마의 휴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던 인기절정의 오드리 헵번과 동료배우 멜 페러와의 결혼생활은 처음에는 순조로운 듯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갈등은 점점 깊어만 갔지요.

두 사람의 갈등 이유는 오드리 헵번은 당시 최고의 스타로 인기절정인 데 반해 맬 페러는 배우로서 내리막길을 걷던 상황이었기에 배우로서 톱스타 오드리 헵번에 대한 맬 페러의 시기심과 열등감이 주된 원인이었고 또한 멜 페러의 잦은 외도가 갈등의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 멜 페러와 아들 숀, 오드리 헵번

 

안정된 가정을 꾸리기를 원했었던 오드리 헵번은 둘 사이의 아들 숀의 장래를 위해서도 이혼만은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썼었지만 한 번 벌어진 두사람의 소원한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으며 결국 68년 오드리 헵번과 멜 페러는 파경을 맞게 되지요. 그 때 오드리 헵번이 40세가 되던 해였지요.

 

오드리 헵번의 두 번째 결혼 상대는 이탈리아의 정신과의사 안드레아 도티라고 합니다. 9살 연하였던 안드레아 도티는 오드리 헵번이 이혼한 후 그 충격에서 방황하던 시기에 오드리 헵번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며 위로해주던 좋은 친구였었다고 하지요.

오드리 헵번이 이혼한 후 두사람의 우정은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고 친절을 베푸는 안드레아 도티에게 오드리 헵번은 마음의 문을 열게 되지요.

 

오드리 헵번과 안드레아 도티는 이탈리아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이혼 경력을 가진 오드리 헵번은 이제 은막의 화려한 스타보다는 평온한 가정의 주부로써의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하지요.

더욱이 첫 번째 결혼이 자신의 화려한 영화배우 활동으로 인해서 기인한 바가 큰 만큼 오드리 헵번은 영화배우보다는 가족을 돌보는 주부생활에 더 충실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것은 오드리 헵번의 큰 오산이었지요. 두 번째 남편 안드레아 도티는 처음부터 평범한 오드리 헵번을 원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휴일’의 신데렐라 같은 스타 오드리 헵번에게서 매력을 느꼈었던 사람이라 가정만 지키는 주부 오드리 헵번에게서는 ‘로마의 휴일’의 앤공주 같은 매력을 더 이상 느낄 수가 없게 되었지요.

 

 

더 이상 화려한 스타가 아닌 나이 들고 평범한 주부 오드리 헵번에게서 옛날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자 안드레아 도티는 외도를 일삼게 되지요. 더욱이 바람기 많기로 소문난 이탈리아 남자인 안드레아 도티의 잦은 외도가 메스컴에 도배되다시피 하자 이미 공인이 되어버린 오드리 헵번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요.

 

오드리 헵번의 두 번째 이혼의 결정적인 계기는 남편 안드레아 도티가 오드리 헵번의 친구인 올리비아와의 외도 때문이라고 하지요.

오드리 헵번의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올리바아는 오드리 헵번이 예쁘고 춤도 잘 추는 것에 대해 어렸을 적부터 시기와 질투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오드리 헵번이 허리웃의 톱스타가 되자 질투심은 더욱 커져만 갔고 급기야 오드리 헵번의 남편인 안드레아 도티를 유혹해서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야 맙니다.

이렇게 해서 오드리 헵번은 바리지도 않았던 두 번째 이혼을 하게 됩니다.

이후 오드리 헵번은 결코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두 번의 결혼 실패로 겪은 충격 때문에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내면서 살았지요.

 

 

 

♣ 오드리 헵번의 여생과 사망

오드리 헵번은 88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아프리카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오드리 헵번은 그녀의 남은 여생을 소외받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유니세프가 아프리카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을 돕기위한 기금 구호활동에 오드리 헵번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며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달려가 구호활동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면서 그녀의 말년은 아프리카의 천사 오드리 헵번의 아름다움으로 수놓게 됩니다.

 

그녀가 구호활동을 위해 간 곳은 수단, 에디오피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을 정도로 많지요. 이렇게 오드리 헵번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세계의 수많은 소외된 지역을 다니면서 굶주린 어린이들을 돌보다가 자신의 몸은 점차 쇠약해질 데로 쇠약해져만 갑니다.

 

오드리 헵번은 1993년 직장암으로 스위스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지요.

오드리 헵번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맞이한 크리스마스 때 남은 두 아들들에게 명언을 남겼다고 하지요.

 

자식들에게 말한 오드리 헵번의 명언 1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네가 더 나이가 들면 두 번째 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기자들에게 말한 오드리 헵번의 명언 2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실천해 보였던 20세기 허리웃의 가장 아름다운 천사, 오드리 헵번!

그녀는 외적인 아름다움 못지않게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그녀를 진정 잊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오드리 헵번의 청초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을 과연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요? 오드리 헵번의 청순미를 사진으로 한번 감상해보도록 하죠!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는 오드리 헵번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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