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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미녀 그레이스 켈리의 ‘이창’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작품

 

 

 

 

 

 

 

그레이스 켈리의 청순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추억의 고전 스릴러영화, ‘이창’ !

영화 '이창'은 그레이스 켈리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몇안되는 희귀한 50년대 영화이며 아울러 서스펜스와 스릴감을 맛보면서 볼 수 있는 범죄스릴러 영화이다.

 

그레이스 켈리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함께 출현한 영화 ‘이창’은 미스테리 스릴러물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만든 허리우드 고전영화이다.

1954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연기력이 뛰어난 제임스 스튜어트와 한창 인기절정이었던 금발 미녀 그레이스 켈리를 주연으로 캐스팅하고 긴장감 넘치고 미스테리한 범죄스릴러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영화가 ‘이창’이다.

‘사이코’ ‘새’에 이어 또하나의 알프레드 히치콕감독의 걸작품이 만들어졌는데 역시 서스펜스 스릴러물의 창시자답게 사건의 발생과 위기의 전개와 그리고 반전을 거듭해가는 ‘이창’의 스토리 전개에 손에 땀을 쥐게하는 긴장감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뛰어난 연출기법을 실감할 수 있는 걸작이다.

 

 

 

 

영화 ‘이창’은 남의 사생활을 몰래 엿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인간의 내면의 심리를 소재를 하였다는 점이 이채롭고 무척 독특한 장르에 속하는 영화이다. 밖으로 노출시키기를 꺼려하는 관음증이라는 현대인들의 부정적이고 병적인 심리상태를 수면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과감히 영화의 주된 소재로 삼았다고 하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특이한 발상 자체가 정말 파격적아라고 느껴지는 영화이다.

 

주인공 제프리의 넓고 커다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전경은 서로 단절되고 각박한 현대 사회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로 왕래도 없고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아파트 세대에서 ‘단절’과 ‘무관심’이라고 하는 현대인들의 심리구조를 알프레드 히치콕은 ‘이창’이라고 하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이웃들을 숨어서 몰래 훔쳐볼 수 밖에 없는 주인공의 심리 표출을 통해서 풍자하고 고발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현대 아파트 세대들의 ‘단절’과 ‘무관심’은 작은 애완견의 죽음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만 정작 옆방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도 역시 ‘단절’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아파트사회를 실랄하게 풍자하고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주인공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가 숨어서 몰래 훔쳐보기를 통해서 이웃들의 동정이나 문제들을 발견해나가는 관음증 자체보다는 그러한 각박한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현대인들의 ‘무관심’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다.

결국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할 훔쳐보기가 오히려 살인사건의 단서를 포착하고 살인범을 잡는 순기능으로 작용함으로써 그 아파트의 평온을 되찾게 해주었다는 것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재치와 해학을 느끼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몰래 숨어서 이웃들을 훔쳐보는 행동이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도록 만든 현대 아파트 세대들의 소통이 없는 무관심과 단절이 풍자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훔쳐보기는 오히려 이웃들에 대한 또다른 관심의 표출이며 사건해결의 열쇠를 제공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하게 만든다.

‘즉, 몰래 숨어서 훔쳐보는 것이 단절이나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더 낫다. 그러므로 단절보다는 엿보기가 오히려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하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단절이나 무관심보다는 엿보기를 통한 관심이 오히려 더 낫다고 하는 메시지로 통해서 현대인들의 냉담하고 야박한 심리를 풍자하고 있다.

‘무관심한 단절보다는 엿보기를 통한 관심이 오히려 낫다?’

 

 

모든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관음증을 소재로 삼아서 이정도의 알차고 구성진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이며 역시 스릴러물의 대가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탁월한 연출기법이 돗보이는 영화이다.

영화 ‘이창’에서는 당시 인기가 한창 솟구치던 허리웃의 대표적인 미인 그레이스 켈 리가 출연했는데 긴박하고 공포스러운 스릴러물에 금발미녀를 출연시킴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알프레드 히치콕감독의 특유의 연출기법이기도 하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특히 금발의 미녀를 무척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가 만든 스릴러물에는 여지없이 금발의 미녀들이 출연한다.

‘새’의 티미 헤드런, ‘싸이코’의 자넷트 리, ‘현기증’의 킴 노박, 그리고 ‘이창’의 그레이스 켈리 등 히치콕감독이 만든 영화의 대부분의 여주인공들이 모두 금발미녀들인데 이렇게 알프레드 히치콕감독이 금발미녀들을 기용하는데에 있어서 집착증을 보인 것은 그의 외모적 컴플랙스와 더블어 새디즘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 '이창'의 내용 -

 

사진작가인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는 사고로 당해서 다친 다리를 기부스하고 훨체어신세를 지게되자 책을 보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는데 그러다가 자신의 큰 창문을 통해서 보여지는 바깥 이웃들의 동정을 몰래 훔쳐보곤 하면서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는 창문밖으로 펼쳐지는 아파트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여러 가지 생활모습을 보면서 무료함을 달래면서 하루 하루를 보냈는데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의 그러한 훔쳐보기는 계속 반볶되면서 이웃들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 마치 하루의 일과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매일 발레를 연습하는 발레리나, 하루도 어김없이 피아노와 작곡연습을 하는 성실한 작곡가, 고독하게 혼자 살아가는 나이 많은 노처녀 등 자신의 엿보기 대상이 되는 그내들의 생활과 동정을 살피는 것이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의 관심거리가 되어갈 무렵 가끔 부부싸움을 벌이던 손월드 부부의 부인이 계속해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자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원래 작가였던 자신의 추리력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남편이 그녀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에게는 패션모델인 여자친구 리사(그레이스 켈리)가 있는데 그녀는 가끔씩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의 집에 들러 알콩달콩한 방안의 로맨스를 벌이면서도 가끔씩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와 사랑의 줄다리기를 벌인다.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가 손월드 부인의 실종에 대한 실마리를 풀기위해 더욱 더 훔쳐보기에 열중하게 되자 그를 종종 찾아오는 여자친구 리사(그레이스 켈리)는 제프리가 심한 관음증에 빠졌다며 그를 질책하면서 엿보기를 중지할 것을 종용한다.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가 손월드씨의 생활모습을 세밀하게 관찰하던 중 그 부인의 살해사건에 대한 단서를 포착하자 그를 힐책했던 리사(그레이스 켈리)는 제프리를 도와 훔쳐보기에 동참하게 되고 배일에 쌓여던 손월드부인 살인사건은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의 집중적인 관찰과 기지로 인해서 실마리가 서서히 풀려간다.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의 큰 창을 통해서 그너머로 보여지는 창안에서 손월드씨는 큰 가방을 배송인부들에게 넘겨주고 그리고 부엌에서 칼을 숨기는 장면등을 망원경으로 목격한 제프리는 그 실종된 손월드부인의 남편이 살인범이라는 확신을 갖게되고 그 손월드씨에게 전화를 걸어 밖으로 유인해낸 뒤 여자친구 리사(그레이스 켈리)를 시켜서 손월드씨의 방안을 수색하게 하고 증거를 잡아내는데 -----

 

이렇게 병적으로까지 심해진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의 훔쳐보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결국 미해결로 남을 수 있었던 한 가정의 살인사건을 해결해주는 긍정적인 요소로써 작용하게 되는 결말을 낳았다.

‘훔쳐보기를 통한 살인사건의 해결’이라는 영화의 소재와 전개가 참으로 특이하지 않는가? 이것이 알프레드 히치콕의 재치있는 사건해결 방법이다.

 

그럼 금발미녀 그레이스 켈리의 아름다운 이미지와 '이창'의 스틸 이미지를 한번 감상해보자.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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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웃의 청순미인 오드리 헵번의 영화같은 인생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신데렐라처럼 청순한 미모를 한껏 발산하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여배우가 바로 오드리 헵번이다. 오드리 헵번은 50,60년대 허리웃영화계에서 인기를 한몸에 모았던 청순미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영국출신의 여배우인데 그녀가 열연했던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을 단숨에 세계적인 톱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영원히 잊혀지지않을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긴생머리에 하얀브라우스를 입고 순진하게 웃는 오드리 헵번의 청초하고 청순한 미모는 전세계의 수많은 남성팬들의 가슴을 한없이 설레이게 했으며 오드리 헵번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50~60년대 허리웃 전성기에 수많은 미녀 여배우들이 있었지만 우리의 심금을 울릴 만큼 청초하고 청순한 이미지를 지닌 배우는 오드리 헵번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섹시하고 글래머스한 소피아 로렌이나 조각같은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리즈 테일러나 선굵은 미모를 지닌 에바 가드너 등 여배우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진한 감동을 자아내는 청순미만큼은 오드리 헵번을 따라가기 힘들다.

 

오드리 헵번은 1929년 영국 은행가인 아버지와 네델란드 명문귀족가문인 어머니 사이에 벨기에에서 출생했으며 어린시절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는데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되고 전쟁의 참상과 후유증으로 전쟁기간중 다소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오드리 헵번은 소녀시절 발레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그녀의 너무나 큰 키(170cm)가 발레하는데에 큰 장애가 되어 결국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 했고 영국 런던으로 돌아와 모델로써 활동하게 된다.

 

그녀의 모델생활은 그녀의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창출하는데 큰 안목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것은 훗날 ‘로마의 휴일’같은 대작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은 모델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영화에도 출현하였는데 1949년 처음 영화에 단역을 맡아 출연하게 되고 그후 몇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지만 그녀가 맡은 역할은 단역이나 조연급에 한정되어 있어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3년간 무명배우로서 활동하게 된다.

오드리 헵번이 겪은 3년간의 무명배우 생활은 여배우로서는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오드리 헵벤같이 아름다운 여배우도 이렇게 긴 기간동안 무명배우로서 활동했다는 자체가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은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배우활동을 해나가던 중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지지’라는 연극에 주연으로 출현하게 되었고 ‘지지’에서의 오드리 헵번의 연기를 보고 그녀에게 반했던 유명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단번에 오드리 헵번을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차기작품의 여주인공감으로 낙점을 찍는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과 오드리 헵번의 만남은 오드리 헵번에게 일생일대의 최고의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고 세계 최고의 로맨스 영화의 탄생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벤허’같은 대작을 연출한 명감독으로 그가 만들려고 하는 차기작은 바로 ‘로마의 휴일’이었고 오드리 헵번의 청초한 이미지가 주인공 앤공주의 청순미에 딱 드러맞는다고 확신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판단은 적중했고 이로써 영원한 멜로영화의 명작 ‘로마의 휴일’이 탄생하게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로마의 휴일’은 대성공을 거두며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고 청순한 앤공주역을 맡은 오드리 헵번은 수많은 관객들의 열광적인 찬사와 갈채를 받으면서 신데렐라 오드리 헵번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오드리 헵번은 허리웃 첫 주연작인 ‘로마의 휴일’에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함께 이루게 되어 그녀는 ‘로마의 휴일’의 앤공주 보다 더한 새로운 신데렐라로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그녀의 세련된 패션스타일은 수많은 여성들의 따라하는 트렌드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런던 모델생활에서 익힌 뛰어난 패션감각 덕분이었다.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에서의 성공으로 인해 스타덤에 오르고 수많은 남성팬들의 로망의 대상이 된다.

그후 오드리 헵번은 계속해서 영화에 출연하는데 코미디 멜로영화인 ‘사브리나’를 비롯 ‘전쟁과 평화’(56년) ‘하오의 연정’(57년) 등에 출하며 자신의 인기를 계속 이어나갔으며 이영화들 역시 그녀의 청순미가 돗보이는 작품들이었다.

59년 출연한 ‘파계’에서는 오드리 헵번은 한층 더 성숙한 연기력을 보여줌으로써 미모뿐만 아니라 명실상부한 연기력을 겸비한 배우로써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고 이영화로 영국아카테미 여우주연상을 비롯하여 3개의 상을 휩쓸어버린다.

 

그녀는 또한 ‘티파니에서 아침을’(61년)에 출연한 후 64년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하게 되는데 이영화 주연자리를 놓고 쥴리 앤드류스와 경쟁을 벌이지만 결국 오드리 헵번이 주연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이영화에서 그녀는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며 그녀의 연기력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오드리 헵번이 100만달러의 개런티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녀는 사상최초로 출연료 100만달러를 돌파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60년대의 100만달러라고 하면 지금으로 따지면 거의 천억원에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오드리 헵번은 이미 60년대에 달성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오드리 헵번의 연기력과 상품성이 그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결혼생활은 화려한 은막생활과는 달리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68년 결혼한 맬 팰로와는 14년 후에 이혼하게 되고 70년 재혼했던 안드레아 도티와도 9년 후에 이혼하는 등 사적으로는 불운한 결혼생활을 하였으며 그 들사이에 두 명의 아들을 두고 있으며 79년 두 번째 이혼 후에는 93년 대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재혼을 하지않고 독신을 고집했다고 한다.

그녀는 88년 유니세프친선대사로 아프리카를 방문한 후부터 그녀의 남은 여생을 소외받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전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녀는 사망할 때까지 아프리카의 열도에서 기아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자선활동을 하고 돌보면서 자신의 여생을 마감했다. 쉬바이쩌박사가 그랬던 것처럼---

진정한 아름다움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실천해보였던 20세기 허리웃의 가장 아름다운 천사, 오드리 헵번 그녀는 외적인 아름다움 못지않게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그녀를 진정 잊지못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오드리 헵번의 청초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을 과연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인가? 오드리 헵번의 청순미를 사진으로 감상해보자!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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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적인 미녀스타 ‘그레이스 켈리’의 영화와 죽음 (★모나코왕비★)

 

 

 

 

허리웃여배우에서 일약 모나코왕비가 된 당대의 미녀스타,그레이스 켈리

 


미국 여배우, 모나코의 왕비
출생 1929년 11월 12일
사망 1982년 9월 14일
키 170cm, 체중 49kg

 

 

이름보다도 더 아름다웠던 금발의 우아한 미녀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는 헐리우드의 메이저 영화배우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손꼽히는 당대의 미녀스타였다. 그레이스 켈리가 출연한 영화 ‘백조’처럼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의 레니에 왕과 혼인함으로써 모나코왕비가 되었으니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현실이 되어 이루어지는 결코 흔치 않는 특별한 삶은 살다간 20세기의 가장 센세이셔널한 인물이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왕비가 되기전인 1951년부터 56년까지 약 5년 동안의 짧은 배우 생활을 하였을 뿐이지만 그녀가 허리웃 영화계에 남긴 족적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하이눈’ ‘모감보’ ‘이창’ ‘나는 결백하다’ ‘다이얼M을 돌려라’ ‘백조’ 등 그레이스 켈리가 출연한 영화들은 한결같이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고 허리우드를 대표하는 당대의 걸작이 되었다. 더욱이 55년 영화 ‘갈채’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여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의 톱스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던 그레이스 켈리!

그레이스 켈리는 완전무결한 미모와 고혹적인 매력 그리고 항상 미소를 머금은 외모와 침착하고 교양미 넘치는 매너로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상대 배우들과 주변 스텝으로부터도 찬사와 칭찬을 아낌없이 받을 정도로 미모뿐만 아니라 교양미도 갖춘 완전무결한 여배우였으니 어쩌면 그녀가 여성 최고의 지위인 모나코왕비가 된 것은 그녀의 타고난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된다.

 

영화 ‘이창’에서 그레이스 켈리와 함께 공연했던 제임스 스튜어트와 감독 앨프레드 히치콕은 그녀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고왔으며 모두에게 친절히 대하는 여성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지중해 연안의 작은 나라 모나코의 왕 레니에 3세는 아름다운 허리웃 미녀배우와 결혼하길 희망했는데 처음에는 마릴린 먼로와 지나 롤로브리지다를 대상으로 고려해보다가 마침 영화 ‘나는 결백하다’의 촬영차 프랑스를 방문한 그레이스 켈리를 보고 그녀를 결혼상대로 낙점했고 결국 그레이스 켈리와 결혼에 성공하였으며 모나코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는 어쩔 수 없이 영화배우의 삶을 버려야만 했으니 미국 허리우드 영화사들과 세계의 팬들에게 그녀를 다시 볼 수 없는 아쉬움과 미련만 남기게 되었다.


 


 

모나코의 레이니에 왕이 허리웃 미녀스타와 결혼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얘기들이 전해지는데 그 중 유력한 하나는 당시 모나코는 재정적인 위기가 닥치자 그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관광수입의 증대를 꾀하였는데 허리웃의 인기여배우와 결혼함으로써 지중해의 작은 나라인 모나코를 세계에 홍보하고 수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함으로써 재정수입의 증대를 도모하였으며 레이니에 왕과 그레이스 켈리의 세기적 결혼은 이러한 음모에서 비롯되었다고 미국 소설가 ‘로버트 레이시’가 주장하기도 하였다.

 

유럽의 약소국인 모나코의 국가 수익 증대를 위해서 일종의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된 그레이스 켈리는 결혼 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술과 남성편력에 빠짐으로써 모나코의 홍보대사로서의 품위를 잃자 결국 그녀는 모나코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전락해 버렸으며 그녀가 더 이상 모나코의 이미지의 상징의 가치를 상실해버리자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그녀를 모나코가 버렸다는 것이다. 즉, 모나코의 여름 별장에서 귀가하던 중 차량 사고로 숨진 사건도 역시 사전에 계획된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영국 황태자비 다이애나의 사건과 닮은 점이 너무 많다)

 

 

 

 

로버트 레이시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모나코왕비인 그레이스켈리를 왕실에서 사고로 위장해 죽였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사고 후 왕비가 장시간 방치됐고, 즉시 치워진 사고현장과 현장에 있지도 않은 목격자를 내세운 점 등을 들었다.

이에 대해 모나코 왕실에서는 사고 당시 동승했던 스테파니 공주의 증언을 들어 평소 뇌졸중을 앓아오던 왕비가 운전 미숙으로 사고사를 당했다고 논란을 일축한 바 있다. 그레이스 켈리의 죽음은 사고사인가 아니면 왕실의 음모에 의한 살해사인가? 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12년 올해로 그레이스 켈리가 죽은 지 30주년이 되는 해로서 팬들에게는 그녀에 대한 향수가 어느때보다도 각별하게 느껴지는 해이기도 하다. 

1982년 5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의 왕비’보다는 그냥 ‘은막의 여왕’으로 남는 편이 더욱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그녀를 사랑하는 세계의 수많은 팬들의 사랑과 성원 속에 더 많은 걸작영화들을 만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을 것이고 그녀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과 만나 결혼하여 행복한 여생을 즐기며 그녀를 흠모했던 수많은 팬들도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당대의 최고의 미녀배우였던 그레이스 켈리는 지중해의 작은 도시국가인 모나코를 위기에서 살려낸 모나코의 구원자였다.

그녀가 한창 허리우드에서 주가를 높여가며 톱스타로서 활동할 때 모나코는 사실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던 위태로운 나라였다. 사실 모나코는 나라라고는 하기에도 곤란한 세계에서 두번째로 작은 도시국가로서 크기는 서울보다도 작은 자치구만한 면적에다 인구는 고작 32,000명에 불과하며 국방과 경제는 프랑스에 의존하며 연명해가는 보잘것 없는 소국이었다.

더우기 47년 프랑스와 맻은 조약에서 후사가 없거나 자립 경제를 하지 못하면 프랑스와 합병한다고 협정을 맺은바 있어 경제난에 허덕이던 모나코의 레니에 3세는 당시 모나코의 돈줄을 쥐고 있던 그리이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의 제안에 따라 빅 이벤트를 하나 만들었다.

 

 

그 이벤트란 미국 허리웃의 미녀스타와 혼인함으로써 세계적인 이슈를 만들어서 모나코를 홍보하고 미국과 유럽의 부유한 관광객들 끌어들여 관광수입을 증대시켜 국가재정을 확충한다는 것이었으며 그 혼인 대상이 바로 그레이스 켈리였다.

그레이스 켈리는 56년에 레니에 왕과 혼인함으로써 모나코를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모나코의 관광수입 증대에 큰 몫을 담당함으로써 오늘날 모나코를 세계적인 부국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모나코는 국민소득 67.000달러로 세계 4위 국가이다)

 

그리고 프랑스로부터 모나코를 완전 독립시키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하였다. 세기적인 미녀배우였던 그레이스 켈리가 자신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였다. 미국과 유럽의 부호들은 그레이스 켈리의 명성을 듣고 모나코로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여기에 힘입어서 모나코는 카지노 사업과 관광사업, 자동차 경주 사업등을 유치하여 오늘날 지중해의 가장 유명한 휴양도시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작고 초라한 빈국이었던 모나코를 세계적인 부국으로 변모시킨 것은 그레이스 켈리의 값진 희생이 가져다준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뛰어난 아름다움이 모나코라는 작은 나라를 살린 셈이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하여 여인네의 아름다움이 나라를 망치는데 일조한다고 하지만 그레이스 켈리의 경우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위기에 빠진 나라를 살렸으니 흥국지색(興國知色)이 된 셈이다.

 

 

 

 

 

 

  

 

 

레이스 켈리가 27년간 거주했던 모나코 왕궁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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