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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웃의 청순한 요정 ‘오드리 헵번’의 인생과 영화

 

 

 

(1929.5.4 출생 ~ 1993.1.20 사망)

 

청순한 미모와 천사와 같은 마음씨로 세계적으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허리우드의 요정 스타 오드리 헵번은 매년 미국 시사잡지사에서 뽑는 100대 미녀에 그것도 상위권 2위에 단골로 뽑히는 미녀스타이지요.

 

 

 

1950~60년대에 터질듯한 가슴과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는 글래머 여배우들이 인기를 끌던 시기에 한 마리의 청초한 백조를 연상시키는 청순한 이미지의 여배우가 나타나 전세계의 관객들의 시선과 관심을 집중시키며 새로운 스타의 출연을 예고하였는데 바로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청순한 미모와 연기력으로 열연한 신데렐라 요정 오드리 헵번이지요.

명감독 윌리엄 와일러가 메가폰을 잡고 그레고리 펙과 함께 출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요정 같은 공주 ‘앤’으로 분해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오드리 헵번은 ‘새로운 신데렐라가 나타났다’고 신문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만인의 연인으로 떠오르지요.

 

기존의 인기를 많이 끌었던 그레타 가르보, 에바 가드너, 마릴린 몬로 같은 풍만한 육체의 글래머들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가냘픈 몸매를 지닌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는 무척 청순했으며 우아했고 황홀했는데 이러한 비육감적 청순미가 오히려 다른 여배우들과 오드리 헵번과의 차별화를 도와줬으며 풍만한 육체파배우들에게서 이미 식상한 관객들은 오히려 비육감적인 오드리 헵번의 청순미와 순수함에 매료되기 시작했지요.

 

가냘픈 육체와 청순한 미모를 간직한 오드리 헵번이지만 그녀의 연기는 활화산같이 뜨겁고 영혼을 울리는 정열과 심금을 적시는 감동을 만들어주기에 우리는 오드리 헵번의 청순한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녀의 정열적인 연기력에 감동을 받게 된답니다.

 

영혼을 울리고, 감동과 환희를 가져다주는 오드리 헵번의 뛰어난 연기력은

‘로마의 휴일’에 이어 ‘전쟁과 평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용서받지 못할 자’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불후의 명작들을 계속 만들어내며 전세계의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찬사와 사랑을 받게 되지요.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오드리 헵번의 또 다른 기념비적 작품이지요. 고급 콜걸인 홀리역을 깜찍하고 우아하게 연기한 오드리 헵번은 이 작품에서 ‘문리버’를 직접 불러 또다른 그녀의 매력을 발산했으며 연기 못지않게 뛰어난 그녀의 노래실력은 공인되었지요.

 

 

최고의 걸작품 ‘로마의 휴일’ 못지않게 흥행에 성공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는 오드리 헵번의 뛰어난 연기력을 또한번 조명하게 하는 걸작이지요.

1964년 이미 나이가 전성기를 지날 무렵인 36세의 중년의 나이에 출연한 영화 ‘마이 페어 페이디’에서 중년의 오드리 헵번은 여전히 우아함과 청순함을 간직한 미모로 세계의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줬으며 불꽃과도 같은 그녀의 정열적인 연기력은 또한번 수많은 관객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선사하지요.

 

64년에 제작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는 몇가지 에피소드가 전해지는데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연후보 자리를 놓고 쥴리 앤드류스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사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이미 쥴리 앤드류스가 연극에서 먼저 연기한 경험이 있어서 처음에는 쥴리 앤드류스가 낙점이 되었었지만 오드리 헵번의 우수한 연기력을 높이 산 제작진의 결정으로 결국 주연 자리는 오드리 헵번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하지요.

뮤지컬 영화인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은 뛰어난 노래실력을 유감없이 과시했으며 역시 농익은 능숙한 연기를 보여주어 그녀의 연기력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확인시켜 주었지요.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포스터

 

저는 개인적으로 ‘마이 페어 레이디’로 오드리 헵번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탈 수 있는 명연기를 보여주었다고 생각되어지는데요. 정말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는 뛰어났지요. 오드리 헵번의 팬 분들이라면 반드시 권하고 싶은 영화가 바로 ‘마이 페어 레이디’랍니다.

또한 ‘마이 페어 레이디’는 오드리 헵번에게 100만 달러의 개런티를 만들어준 영화라고 하지요. 오드리 헵번이 영화 출연사상 최초로 1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영화 출연료로 100만 달러를 받은 건 오드리 헵번이 최초라고 합니다.

60년대에 100만 달러라고 하면 대단히 큰 금액인데 지금 시세로 환산하면 거의 1000억 원에 육박할 정도의 거금이지요!

이 거금의 출연료는 당시 오드리 헵번의 높은 인기도를 상징하는 바로미터가 되지요.

 

오드리 헵번은 이후 ‘뜨거운 포옹’과 67년 ‘언제나 둘이서’ 등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하면서 인기를 이어가다가 68년부터 한 9년 동안 공백기를 갖게 되지요. 그리고 1976년 다시 영화 ‘로빈과 마리안’ 출연을 계기로 영화계에 복귀해서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하게 됩니다.

 

 

 

♣ 오드리 헵번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이혼

오드리 헵번의 삶은 그녀의 파란만장한 영화 인생 못지않게 정말 파란만장했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생애 총 2번의 결혼을 했었지요. 그리고 두 명의 아들을 두었지요.

오드리 헵번은 6세 때 아버지가 가출해버려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며 살아왔던 경험이 있어서 부성애를 풍기는 그런 남성을 원하고 있었지요.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에 출연한 그 이듬해에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 상대는 영화 ‘전쟁과 평화’에 함께 출연한 배우 멜 페러(Mel Ferrer)였고 첫남편 맬 페러는 12살 연상으로 제작자를 겸한 당대의 인기 영화배우였지요.

 

영화 ‘로마의 휴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던 인기절정의 오드리 헵번과 동료배우 멜 페러와의 결혼생활은 처음에는 순조로운 듯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갈등은 점점 깊어만 갔지요.

두 사람의 갈등 이유는 오드리 헵번은 당시 최고의 스타로 인기절정인 데 반해 맬 페러는 배우로서 내리막길을 걷던 상황이었기에 배우로서 톱스타 오드리 헵번에 대한 맬 페러의 시기심과 열등감이 주된 원인이었고 또한 멜 페러의 잦은 외도가 갈등의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 멜 페러와 아들 숀, 오드리 헵번

 

안정된 가정을 꾸리기를 원했었던 오드리 헵번은 둘 사이의 아들 숀의 장래를 위해서도 이혼만은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썼었지만 한 번 벌어진 두사람의 소원한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으며 결국 68년 오드리 헵번과 멜 페러는 파경을 맞게 되지요. 그 때 오드리 헵번이 40세가 되던 해였지요.

 

오드리 헵번의 두 번째 결혼 상대는 이탈리아의 정신과의사 안드레아 도티라고 합니다. 9살 연하였던 안드레아 도티는 오드리 헵번이 이혼한 후 그 충격에서 방황하던 시기에 오드리 헵번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며 위로해주던 좋은 친구였었다고 하지요.

오드리 헵번이 이혼한 후 두사람의 우정은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고 친절을 베푸는 안드레아 도티에게 오드리 헵번은 마음의 문을 열게 되지요.

 

오드리 헵번과 안드레아 도티는 이탈리아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이혼 경력을 가진 오드리 헵번은 이제 은막의 화려한 스타보다는 평온한 가정의 주부로써의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하지요.

더욱이 첫 번째 결혼이 자신의 화려한 영화배우 활동으로 인해서 기인한 바가 큰 만큼 오드리 헵번은 영화배우보다는 가족을 돌보는 주부생활에 더 충실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것은 오드리 헵번의 큰 오산이었지요. 두 번째 남편 안드레아 도티는 처음부터 평범한 오드리 헵번을 원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휴일’의 신데렐라 같은 스타 오드리 헵번에게서 매력을 느꼈었던 사람이라 가정만 지키는 주부 오드리 헵번에게서는 ‘로마의 휴일’의 앤공주 같은 매력을 더 이상 느낄 수가 없게 되었지요.

 

 

더 이상 화려한 스타가 아닌 나이 들고 평범한 주부 오드리 헵번에게서 옛날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자 안드레아 도티는 외도를 일삼게 되지요. 더욱이 바람기 많기로 소문난 이탈리아 남자인 안드레아 도티의 잦은 외도가 메스컴에 도배되다시피 하자 이미 공인이 되어버린 오드리 헵번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요.

 

오드리 헵번의 두 번째 이혼의 결정적인 계기는 남편 안드레아 도티가 오드리 헵번의 친구인 올리비아와의 외도 때문이라고 하지요.

오드리 헵번의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올리바아는 오드리 헵번이 예쁘고 춤도 잘 추는 것에 대해 어렸을 적부터 시기와 질투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오드리 헵번이 허리웃의 톱스타가 되자 질투심은 더욱 커져만 갔고 급기야 오드리 헵번의 남편인 안드레아 도티를 유혹해서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야 맙니다.

이렇게 해서 오드리 헵번은 바리지도 않았던 두 번째 이혼을 하게 됩니다.

이후 오드리 헵번은 결코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두 번의 결혼 실패로 겪은 충격 때문에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내면서 살았지요.

 

 

 

♣ 오드리 헵번의 여생과 사망

오드리 헵번은 88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아프리카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오드리 헵번은 그녀의 남은 여생을 소외받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유니세프가 아프리카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을 돕기위한 기금 구호활동에 오드리 헵번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며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달려가 구호활동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면서 그녀의 말년은 아프리카의 천사 오드리 헵번의 아름다움으로 수놓게 됩니다.

 

그녀가 구호활동을 위해 간 곳은 수단, 에디오피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을 정도로 많지요. 이렇게 오드리 헵번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세계의 수많은 소외된 지역을 다니면서 굶주린 어린이들을 돌보다가 자신의 몸은 점차 쇠약해질 데로 쇠약해져만 갑니다.

 

오드리 헵번은 1993년 직장암으로 스위스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지요.

오드리 헵번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맞이한 크리스마스 때 남은 두 아들들에게 명언을 남겼다고 하지요.

 

자식들에게 말한 오드리 헵번의 명언 1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네가 더 나이가 들면 두 번째 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기자들에게 말한 오드리 헵번의 명언 2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실천해 보였던 20세기 허리웃의 가장 아름다운 천사, 오드리 헵번!

그녀는 외적인 아름다움 못지않게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그녀를 진정 잊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오드리 헵번의 청초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을 과연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요? 오드리 헵번의 청순미를 사진으로 한번 감상해보도록 하죠!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는 오드리 헵번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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