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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612회 ‘오드리 헵번’ 그녀의 악몽편, 아버지 나치당원




1950년 ~ 60년대 만인의 연인으로 세계적으로 큰 사랑과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허리우드여배우 ‘오드리 헵번’, 그렇게 청순가련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큰 인기를 누렸던 톱스타였던 오드리 헵번에게도 남들에게 말못할 고민과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서 알게되었답니다.





정말 오드리 헵번처럼 청순한 미모를 지닌 여배우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눈부신 미모는 전세계를 환히 비추어줄 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데요.

4월 13일에 ‘그것이 알고 싶다’ 오드리 헵번 편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드리 헵번의 말못한 고민과 콤플렉스를 다루어서 큰 화제를 뿌리고 있답니다.


오드리 헵번은 1953년 그레고리 펙과 함께 출연했던 ‘로마의 휴일’ 영화 한편으로 일약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 우뚝 솟았으며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인기의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었지요.

그러던 오드리 헵번에게 또다른 영화 ‘안네의 일기’ 출연제의가 들어왔답니다. ‘안네의 일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박해를 받았던 유태인소녀 안네 프랑코와 그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삶을 그리고 있는 영화인데요.

저도 이 ‘안네의 일기’를 과거에 책으로 읽은 적이 있으며 영화로도 본 적이 있는데 무척 감동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코가 가족들과 함께 독일 나치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몰래 은신처에 숨어 살게 된답니다. 어린 소녀였던 안네 프랑코가 성장해가면서 사랑과 자아를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랍니다. 나중에 나치당원들에게 그녀의 가족이 숨어살던 은신처가 발각이 나면서 가족 전원이 유태인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며 유태인수용소에서도 의연하게 행동했던 안네 프랑코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영화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는 추억의 영화이지요.


제가 당시 느꼈던 감동과 똑같은 감동을 오드리 헵번도 느꼈을 겁니다.

오드리 헵번은 영화 시나리오 ‘안네의 일기’를 보고 무척 감동을 받았으며 처음에는 영화출연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답니다.

당시 ‘안네의 일기’는 허리우드의 수많은 인기여배우들이 서로 출연하기를 희망했던 걸작품이라서 당시 인기의 절정에 서있었던 오드리 헵번의 출연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네요.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공주역으로 분한 오드리 헵번


그런데 오드리 헵번이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던 시점부터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고 말았지요. 오드리 헵번은 영화 ‘안네의 일기’ 시나리오를 받았던 첫날부터 무서운 악몽에 시달리게 된답니다. 그녀의 꿈속에서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나치당원이 계속 나타나서 그녀를 괴롭히고 위협을 가하곤 하였지요.


결국 오드리 헵번은 허리우드의 수많은 여배우들이 출연하기를 희망했던 영화 ‘안네의 일기’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답니다.

오드리 헵번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당원들의 횡포로 고통을 많이 받았던 어두운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안네의 일기’를 읽으면서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났기 때문에 밤마다 악몽을 꾸었던 겁니다.


또한 오드리 헵번에게는 남에게 숨기고 싶었던 더 어두운 과거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바로 나치의 열렬당원이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과거의 피치못할 이력들이 그녀에게 악몽과 컴플렉스로 남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오드리 헵번이야말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피해자라고 할만큼 고충을 많이 겪었답니다.

그녀의 아버지 안소니 헵번이 나치 당원이었지만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난 후 벨기에에 살고있던 오드리 헵번과 어머니를 매정하게 버리고 가출했던 장본인이었지요.

이렇게 아버지로부터도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오드리 헵번과 그의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기아와 굶주림, 그리고 전쟁의 공포와 나치의 횡포로 시달리면서 삶과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게 되었지요.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한사람이었던 오드리 헵번이었지만 세계적인 톱스타로 성장한 오드리 헵번에게는 아버지가 과거 나치당원이었으며 전범이었다는 사실과 전력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그녀의 인기와 이미지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되는 상황에 놓여있었답니다.


아내와 어린 딸을 버리고 이혼했던 비정한 아버지였지만 항상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했던 오드리 헵번은 어느날 아버지로부터 보고싶다는 편지를 받게 되었지요.

어머니가 딸 오드리 헵번의 장래에 피해를 줄까봐 숨겨왔던 아버지의 편지를 발견한 오드리 헵번은 아버지를 만나기를 열망했으며 그런 그녀를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렸지만 이세상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부모와 자식간의 혈육의 정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오드리 헵번은 과거 나치당원이었던 아버지의 신분 노출로 인해서 자신의 인기에 치명타를 주게되는 상황을 감수하면서 아일랜드 요양소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게 됩니다.

역시 천사의 마음씨를 지닌 오드리 헵번 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답니다.

그녀는 자신의 출세보다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의 안위가 더욱 소중했던 것이지요.


인기절정의 시기에 세계적인 톱스타로서의 이미지관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아버지의 과거전력이 노출되었는데도 그녀는 의연하게 받아들였고 결코 숨기려하지 않았으며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고 난 후 영화출연을 하면서도 세계의 빈곤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구호활동에 전념하게 된답니다.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의 친선대사가 되어 전세계 50개국을 돌아다니면서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는 빈곤한 이웃과 어린이들을 구호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답니다.





오드리 헵번의 이같은 구호활동에 대해 일부사람들은 그녀가 점점 식어가는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한 행사용 활동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하였지만 그녀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자신이 직장암에 걸려 사망선고를 받은 후에도 그녀의 구호활동과 선행은 멈추지 않았

답니다.


이 세상에는 최선을 다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답니다. 자신은 결코 단 한번의 선행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남을 비방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과 남들이 비방하는 그 순간에도 죽어가는 생명을 한명이라도 더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그것이지요.


그녀는 1993년 직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아프리카의 열도에서 기아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어린이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이러한 그녀의 박애정신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전세계에서 구호자금이 쏟아져 들어오기도 하였지요.



그녀가 구호활동 하러간 나라들은 에디오피아, 수단,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국이 넘을 정도로 많지요. 이렇게 오드리 헵번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로 세계 여러 곳의 소외된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굶주린 어린이들을 돌보다가 자신의 몸은 점차 쇠약해질 데로 쇠약해져만 갑니다.

그렇게 남을 위해서 헌신하던 오드리 헵번은 자신을 혹사시킨 대가로 결국 직장암에 걸리게 되었으며 1993년 스위스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그녀는 죽기 직전에 남은 두아들에게 명언을 남기고 죽었답니다.


오드리 헵번의 명언1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네가 더 나이가 들면 두 번째 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명언2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

입니다’


오드리 헵번은 93년 63세의 나이에 명언을 남기고 사망했답니다.

그녀가 약해진 자신의 몸을 조금이라도 더 돌보았더라면 아프리카를 돌며 강행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더 오래 살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녀가 사망한 63세의 나이는 평균수명보다도 훨씬 짧지요.


진정한 아름다움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실천해 보였던 20세기 허리웃의 가장 아름다운 천사, 오드리 헵번!

그녀는 외적인 아름다움 못지않게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그녀를 진정 잊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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