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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군산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사고와 침몰원인, 사망자수, 실종자수




4월 16일 진도앞바다에서 발생한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로 300여명의 사망자 및 실종자를 낳은 선박대형 참사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는데 과거에도 이와 유사한 여객선 침몰사고가 1993년에 발생하여 수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적이 있었다.

바로 1993년에 발생한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가 그것으로 그당시 사망자수가 292명으로 ‘세월호’에 버금가는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여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대형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93년 위도 앞바다에서 쓰러지고 있는 서해훼리호 여객선 사진


그런데 이번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나 93년에 발생했던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몇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두 선박사고 모두 300여명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낳았다는 점과 그리고 자연재해라기 보다는 ‘인재’로서 발생한 대형참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즉, 선장이나 승무원의 운전조작과 선박회사의 안전관리가 부실했기 때문에 발생한 선박사고라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호에서도 항해사의 급격한 변침(선박 우회전)이 침몰사고의 한 원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해 훼리호의 침몰사고도 당시 기상조건이 나쁜 상황에서 항해사의 무리한 키조작이 침몰사고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서해 훼리호 여객선은 (주)군산서해훼리 여객선회사 소속으로 90년 건조되었고 전북 부안군 위도에서 육지로 왕복 운항하는 정기 여객선으로 위도섬에 있는 주민들을 육지로 실어나르는 해상교통 전용선박이었다.

서해훼리호는 초기에는 주로 섬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운항하였기에 하루 1회 운항으로도 승객이 적어 수익이 낮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국가보조금까지 받고 운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도가 낚시명소로 소문이 나면서 수많은 낚시애호가들이 전국에서 몰려들게 되는 바람에 서해 훼리호는 호황을 맞게 되었고 승선 수요가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승선인원의 수요초과가 발생하자 하루 1회 왕복 운항하는 서해훼리호 측에서는 증편을 요구하였지만 당국에서는 증편을 거절하였고 결국 서해 훼리호측에서는 무리하게 많은 인원을 여객선에 승선시켜서 운항했던 것이다.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의 첫 번째 원인으로 지목되는 무리한 초과승선이 발생하는 단초를 낳은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서해훼리호는 무려 89회나 초과승선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93년 10월 10일 9시 45분경,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당시 서해 훼리호는 정원 221명보다 141명이나 많은 초과인원을 무리하게 승선시킨 것이 여객선이 침몰한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110톤 밖에 안되는 작은 여객선에 141명이나 초과 승선시켰으며 또한 당시 위도 섬주민들의 젓갈 등 하중이 많이 나가는 해산물등을 배 앞부분에 집중 선적시킴으로서 당시 거센 강풍과 높은 파도를 만나 여객선이 중심을 잃고 뒤집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서해 훼리호 출항 당시 초당 10~14m의 강풍이 불었고 2~3m에 이르는 높은 파도가 치는 등 항해하기에는 기상상태가 악조건이었는데 불구하고 무리하게 운항시킨 것도 침몰사고의 또다른 원인으로 꼽고 있다.

서해 훼리 여객선회사의 지나친 수익추구로 인해서 선박이 운항하기 곤란한 악천후의 기상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출항한 점과 그리고 정원을 초과한 무리한 운항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여객선 침몰사고를 불러일으켰다.



또 한가지 원인으로는 서해훼리호가 출항 당시 항해사가 휴가중이라서 갑판장이 대신 항해를 맡았다고 하며 선장 또한 미숙한 운항관리로 인해 참사를 더 키웠다는 것이다. 전문 직종인 항해사를 단순히 갑판관리나 하는 갑판장이 대신 맡아 항해를 했다는 것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또한 강풍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악천후 상황에서 작은 여객선에 정원을 141명이나 초과해서 운항했으며 높은 파고가 밀려오자 무리한 키조작으로 배는 순간 기우둥거리며 옆으로 넘어져 버렸고 넘어진 배위로 바닷물이 급격하게 밀려들어왔다.


긴급한 상황에서 중요한 구명장비는 제대로 동작조차 하지 않았고 사고 직후 위급상황임을 알린 사람도 없었으며 구조 요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인명피해를 더욱 키운 원인이 되었다.


여객선은 옆으로 쓰러졌고 바닷물의 급격한 침투로 인해 미처 피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가거나 잠기게 되어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서해훼리호는 탑승객 총 362명 중 무려 292명이 사망하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서해 훼리호 침몰당시 선장은 승객들을 구조하려고 조타실에 들어가 구조요청을 하던 중 사망하여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승객을 구조하려 했던 ‘의로운 선장’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가 난 후 21년 뒤인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하는 여객선 참사가 또다시 발생했는데 선장은 승객들을 구조하지도 않고 제일 먼저 사고 여격선에서 탈출하는 일이 일어나서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고 있는데 서해 훼리호 침몰 당시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조타실에 끝까지 남아 분투히디기 사망한 서해 훼리호 선장과 너무도 비교되는 부분이다.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는 여객선회사의 안전관리 불감증과 관리부실이 부른 대형참사로 손꼽히는 사건이며 결국 군산서해훼리 상무가 선박안전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 이후에 이 항로의 여객선 운항횟수가 크게 증가했다. 사고 직후부턴 비록 카페리호가 투입됐지만 하루 왕복 2회로 증편되었다가 현재는 평일 왕복 6회, 주말에는 왕복 8회로 운항중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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