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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간의 전쟁을 멈추게한 13세 소녀의 ‘서맨사 스미스의 편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610회)




1980년대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간 핵전쟁이 벌어질 일촉즉발의 위기의 순간에 13세 미국소녀의 한통의 편지가 전쟁을 멈추게 했던 사연이 공개되어 큰 감동을 주고 있다.

3월 30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미국소녀 ‘서맨사 스미스의 편지편’이 방영되었는데 어린 미국소녀 서맨사 스미스의 간절한 편지 한통이 자칫 세계 3차대전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당시 미국과 소련간의 전쟁국면을 평화국면으로 바꾸어 놓았던 일화가 있었다.





1982년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두나라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개발 및 경쟁 등 민감한 사안으로 인해 갈등을 겪게 되었으며 소련과 미국 양국이 서로에게 핵미사일을 겨누었고 언론에서는 연일 핵전쟁이 임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시민들은 매일같이 실시되는 공습 대비훈련으로 곧 전쟁이 벌어질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히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많은 미국시민들은 소련이 핵전쟁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했으며 가족과 친구, 동료들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렇게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전쟁의 대립과 갈등이 고조될 무렵 두나라 지도자들에게 한통의 편지가 전해졌다.

그 편지의 주인공은 미국의 13살 서맨사 스미스라는 평범한 어린 소녀였다.



서맨사 스미스가 자신이 보냈던 편지를 보여주고 있다


서맨사 스미스는 ‘소련과 미국이 핵전쟁으로 두 나라 핵전쟁을 할까바 무서워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인지 말해주세요’라고 애원하는 편지로 당시 소련의 서기장 유리 안도르포프에게 전달되었다.

그 어린 소녀 서맨사 스미스를 가상히 여긴 소련서기장은 ‘소련은 지구상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네 부모님이 허락한다면 소련으로 초대하고 싶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고 소련으로 서맨사 스미스를 초대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소녀 서맨사 스미스는 수많은 모스크바시민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국빈대접을 받으면서 소련 각 지방을 돌면서 평화를 전파했다.

13세 어린소녀 서맨사 스미스는 당시 서로에게 핵미사일을 겨누고 전쟁준비를 돌입했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를 평화체제(긴장완화)로 바꾸어 놓았던 최초의 평화사절이 되었다.


서맨사 스미스가 소련을 방문해서 선물받은 기념품


80년대 당시 서방진영에게는 무서운 나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소련이 평화를 원하는 평범한 국가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서맨사 스미스의 양국 방문을 계기로 세계정세는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의 시기가 정착되게 되었다. 소위 냉전체제에서 긴강완화 데탕트 체제로 변화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13살 밖에 안된 한 어린 소녀의 편지 한통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초강대국 지도자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줌으로써 핵전쟁 및 제3차 세게대전을 막을 수 있었으며 어린소녀 서맨사 스미스는 일약 평화의 아이콘이자 상징이 되었다.



이 후 초강대국 지위를 놓고 겨루었던 미국과 소련은 양국지도자들이 서로 방문하며 평화협정과 핵전략감축협정까지 맺으며 세계평화 정착에 노력하게 된다.

평화의 상징이자 평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어린 소녀 서맨사 스미스는 세계 각국을 방문하여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등 활발한 평화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서맨사 스미스는 1985년 갑작스러운 비행기 추락사고를 당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만 13살 때였다.



서로 오랫동안 적대관계에 있었던 미국과 소련에서는 한 소녀의 죽음에 애통해 했으며 레이건 미국대통령은 물론 고르바초프 소련서기장도 서면을 통해 안타까움과 슬픔을 표시했다.

나이어린 한 소녀의 죽음이 적대관계에 있었던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을 하나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후 미국과 소련에서는 서맨사 스미스의 동상을 세웠고 서맨사의 기념우표를 발행했으며 매년 6월 첫 번째 월요일을 ‘서맨사 데이’로 지정해서 지금까지도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과 소련의 양국에 세워진 서맨사 스미스 동상


어른들이 하지 못하는 전쟁방지와 평화정착이 한 어린 소녀의 간절한 애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한 어린 소녀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핵전쟁과 제 3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가 있었다.

자기아집과 자기당착에 빠져있던 우리 어른들과 기성세대에게 크나큰 경종과 반성을 일깨워주는 한 어린 소녀의 값진 희생에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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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루이16세 사형과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3월 30일 방영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는 프랑스대혁명 시기 공포정치의 대명사인 루이16세와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의 악연을 소개하고 있다.

루이16세는 프랑스국왕으로서 독재정치와 공포정치를 감행했던 악덕군주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며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는 이러한 루이 16세의 독재통치를 타도하고 프랑스대혁명을 주도했던 급진파 혁명지도자로서 두사람은 결국 똑같은 방식으로 파리 콩고드광장의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두사람의 정치적 견해와 이상은 달랐지만 같은 방식으로 처형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는 평민출신으로 성장해서 검사가 되었던 자수성가형의 인물로 18세기 당시 평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탄압하는 프랑스국왕 루이 16세의 전제통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며 더욱이 온갖 특혜와 면세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귀족계급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구조는 성지자와 귀족, 그리고 평민으로 나눠어져 있었는데 98%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평민층만에게만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있었고 온갖 특혜와 대토지를 보유한 귀족계급은 세금을 전혀 내지않아 사회의 불굥평이 심화되었다.


1789년 평민들이 주축이 되어 국민의회를 만들고 평민들의 권리 회복에 나서자 당시 프랑스국왕인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진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평민들은 국왕의 횡포에 맞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고 도망치는 루이 16세를 체

포했다.



프랑스대혁명 시기 왕정을 무너뜨리는데 앞장섰던 인물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였는데 로베스피에르는 국왕을 유페한 뒤 국민공회를 만들고 자코뱅파의 대표가 되어 혁명정부를 이끌

었다.

그런데 루이 16세의 공포정치에 항거해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프랑스대혁명을 이끌었던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주체인 국민공회의 수장이 되자 또다른 형태의 공포정치와 독재정치를 만들어냈다.


로베스피에르는 국왕의 권한을 폐하는 것으로 족하며 굳이 처형할 필요는 없다는 온건파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내 처형시켰으며 1794년 온건파인 조르주 당통 등 당내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1인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혁명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매우 과격하고 독단적인 통치력을 발휘해서 또다른 공포정치를 낳았고 반혁명 혐의, 부패혐의 등의 죄목을 붙여 2,085명을 단두대로 보내는 등, 대량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혁명정부의 수장 로베스피에르는 처음에는 부패한 귀족세력을 숙청하는 등 혁명수행으로 도시빈민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1인 독재체제를 확립하고 난 뒤 반대파와 정치적 동지들마저 혁명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탄압을 하는 등, 또다른 독재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둬들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


과격한 독재스타일로 또다른 공포정치를 감했했던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 의원들의 지지와 신망을 잃어갔으며 결국 또다른 반대파를 숙청하려던 계획을 세웠던 로베스피에르는 의원들의 조직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되고 국민공회에서 체포되었으며 1794년 7월 28일 루이 16세 처형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번에는 자신이 단두대에 의해서 처형당했던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을 주도하여 왕정을 무너뜨렸던 혁명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와 어렸을 적부터 악연이 있었는데 1774년 프랑스 왕립학교에 재학중이던 시절 평민이라는 이유로 루이 16세에게 모욕과 멸시를 당했던 과거가 있었는데 나중에 자신이 혁명정부의 수장이 되어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온건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의 사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변호사 시절 가난한 평민들에게만 적용되는 불합리한 사형제도를 비판하였는데 ‘불공정한 사형제도는 악법이다’라고 외치며 사형재도 폐지를 주장했으며 인권변호사로서 명성을 쌓았던 인물이다.


젊은시절 인권을 외치며 사형재도 폐지를 주장했던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대혁명이 성공하고 자신이 권력을 잡자 자신이 반대했던 단두대사형을 중요한 권력수단으로 즐겨 활용했고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이는 등, 대량학살의 도구로 사용했으며 프랑스 역사상 ‘공포정치’의 대명사로 오명을 남기는 우를 범하고 말았으며 결국 자신도 자신이 즐겨 사용했던 단두대에 의해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한번 흥한 것은 10일도 안되어 반드시 쇠하게 된다.

‘권력은 무상하며 권력은 사람을 부패하게 만드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라는 전리를 몰랐던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초심을 잃고 지나친 독선과 집권욕으로 인해서 ‘공포정치’ ‘대량학살의 주범’이라는 치명적인 오점을 낳았던 것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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