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 정도전과 정몽주의 관계




KBS 대하사극 드라마 ‘정도전’이 이제 본격적인 역성혁명의 궤도에 올라 더욱 박진감 넘치는 내용으로 치닫고 있다.

사극 드라마 ‘정도전’이 이성계의 위화도 출정과 회군의 분기점에서 과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정도전의 역할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또한 그들은 역신인지 아니면 영웅인지, 그들의 역사적 업적이 올바로 평가되는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주 일요일에 방영된 KBS 대하사극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는 자신이 반대하는 요동정벌을 고려국왕인 우왕과 시중 최영의 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요동정벌군 우도도통사로 임명되어 군사 5만을 이끌고 좌도도통사인 조민수와 함께 요동로로 출정하였다.


그러면 고려왕 우왕과 최영 시중의 요동정벌론은 정당한 정책이었을까?

당시 중국대륙에서 원나라(몽고족)를 물리치고 중국대륙을 차지한 명나라가 고려조정에 철령위 설치와 무리한 세공을 요구한 것이다. 즉,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원래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는 무리한 요구가 하였는데 이같은 요구는 고려로써는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명나라의 횡포인 것이다. 그러자 고려는 명나라와의 실력대결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고려땅의 일부와 요동땅 전체를 자기 것이라고 내놓으라는 명나라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 고려는 요동정벌을 감행했던 것으로 그 당시의 국제정세를 비추어 봐도 요동정벌은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중국에서 원나라와 한창 교전할 때에는 고려에 우호적이었던 명나라가 원나라를 완전히 제압하고 대국으로 커지고 난 후에는 고려에게 땅을 내놓으라면 횡포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요동정벌은 정당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계


훗날 조선을 개국한 후 재상이 된 정도전이 다시 요동정벌을 추진했던 것을 보아도 고려 우왕 때의 요동정벌은 정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와같은 국제정세 속에서 고려는 우리 고유의 땅을 지키고 요동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 요동정벌군 10만명을 출정시켰던 것이다.

8도도통사 최영은 평양성에서 총괄 지휘하였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임명해서 총 10만명의 군사를 동원해서 요동으로 출정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성계는 4불가소를 올려서 요동정벌에 반대하였는데 4불가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소국이 대국을 치는 것은 불가하다.

2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다. (농사에 지장을 주게 되므로)

3 지금 전국에서 군대를 동원해 출정하게 되면 후방의 왜구들이 그 틈을 노리게 될 것이다.

4 장마철에 군대를 출정시키는 것은 역병등 발생하게 되므로 불가하다.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치적 실권자였던 최영은 요동정벌을 강하게 밀어붙여 결국 10만명의 요동정벌군이 출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출정한 이성계와 병사들은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여름 장마비로 인해 강물이 불어서 발이 묶이게 되고 장기간 야영을 하며 대기하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성계 군사의 위화도 야영대기가 바로 이성계의 역성혁명 쿠테타를 불러일으키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당시 장마비가 오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이성계 군사의 위화도 야영대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패망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이 위화도에서 대기하는 일주일 동안에 군사 5만의 수장이 된 이성계의 머릿속에서도 별의별 그림과 정세들이 수없이 그려졌다가 지워지기를 반볶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성계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려군사 5만명의 든든한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서 미래의 출세와 최고 권력을 보장받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함으로써 개경으로 회군하게 되었고 개경을 함락함으로써 조선건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면 이성계가 언제부터 역성혁명을 꿈꾸었으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있어서 정도전의 자문과 역할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진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마치 정도전이 이성계가 요동출정하기 전부터 이성계에게 역성혁명을 충동질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에 부합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드라마에서 약삭 빠르고 간계가 뛰어난 정도전이 자신이 꿈꾸는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어느 정도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성계를 꼬득여서 위화도 회군을 하도록 종용하는 내용으로 나오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에서 나온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역사기록 어디에도 정도전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하도록 권유하는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으며 정도전이 이성계가 요동으로 출정하기 전에 이성계를 만났다는 내용도 역사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드라마 ‘정도전’에서처럼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도록 정도전이 권유 내지 종용하는 것은 드라마를 재미있게 하기위한 작가의 상상속의 산물이다.


정도전과 이성계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86년경 이성계가 함흥의 동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처음으로 만났는데 그 당시 정도전은 조정의 미움을 받아서 성균관학사자리에서 쫓겨난 후였으며 관리에서 파직당한 정도전이 군사들로부터 큰 신망을 얻고 있던 왜군토벌의 영웅 이성계를 먼저 찾아가서 만났던 것인데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간 이유는 그 당시 정도전의 정치적 입지가 너무 약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군사력과 정치력을 어느정도 보유하고 있었던 이성계로부터 정치적 후원(스폰서)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정치적으로 입지가 미약했던 정도전은 이성계의 도움을 받아서 결국 다시 성균관학사 자리를 얻어내었으며 이 때부터 정도전과 이성계의 정치적 교류와 연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파직당했던 자신의 재등용을 도와주었던 이성계와 정도전이 돈독한 정치적 연대를 맺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도전은 자신과 과거급제 동기인 정몽주와 성균관 학사들(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여러 젊은 신홍사대부들)을 이성계에게 소개하게 되고 이렇게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군사원로급 무장인 이성계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젊고 이상이 높았던 신흥사대부들의 정당이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정도전, 정몽주, 권근, 조준 등 신흥사대부들과 무관 이성계의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과연 이렇게 정치적으로 연대를 맺었던 정도전등 신흥사대부들이 불과 2년 후인 1388년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뒤에서 조종할 만큼 유대와 신뢰가 강했는가 하는 것이 요점이다.


사실 고려시대에나 조선시대에도 역성, 모반 등에 관련된 단 한마디의 말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비록 실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목 뿐만 아니라 삼족의 목숨이 날아가는 가장 큰 죄목이었다.

그런데 설사 정도전이 이성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성리학자 출신인 정도전과 평생 전쟁터에서 살아온 무관인 이성계는 신분도, 정치적 식견도, 사상과 철학도, 스타일도 전혀 극과극이라고 할 만큼 너무나도 다른 점이 많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학교 교수나 강사가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고지식한 군대의 군사령관과 친하게 지내고 연대를 맺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상대방이 밀고하거나 외부에 발설되면 그순간 목숨이 달아날 수 있는 역성을 논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드라마에서처럼 두사람이 처음 만난 지 2년 만에 역성혁명을 정도전이 제안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측면이 많다. 드라마상 극의 재미를 더하고 극의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서 작가가 임의로 집어넣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성계와 정도전이 이성계가 요동정벌군으로 출정하기 전에 혁명이나 쿠테타를 모의했다면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반대해서는 안된다.

왜냐햐면 요동정벌에 출정을 해야 자신이 쿠테타에 필요한 군사력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동정벌 출정 당시 이성계가 통솔했던 군사 5만 명 모두가 원래의 이성계의 군사가 아닌 것이다. 그 중 이성계의 실제 직할 군사는 4천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계가 함흥에서 도통사(함흥의 지역사령관)로 있을 때 이성계 휘하의 군사는 그 지역에 있는 군사 4천명 정도가 이성계의 직할 군대였다.

이 4천의 군대로는 당시 고려 조정의 중앙군을 대적하기에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우왕과 최영시중이 요동정벌을 명할 당시까지만 해도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계획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순리에 맞다. 아울러 이당시 정도전이 쿠테타를 권유했을 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결정하게 된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이성계가 쿠테타(군사반란)을 결정한 시점은 장마비로 발이 묶었던 위화도의 15일간의 시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 전까지도 이성계와 정도전은 쿠테타나 역성을 계획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위헤서도 언급했지만 이성계가 그 전부터 쿠테타를 꿈꾸었다면 요동정벌을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군사력을 얻을 수 있는 요동정벌을 찬성해야 앞뒤가 맞는다.


위화도에서 발이 묶였던 시기에 이성계가 회군(군사바란)을 결정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 때부터 이성계가 역성혁명 즉,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고도 보지 않는다.

이 당시만 해도 이성계는 대국인 명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것만을 반대한 것이며 즉, 친명을 지지한 것이며 이러한 친명정책에 반대하는 최영 등 친원파들을 제거하는 것이 당시의 목표였고 또한 자신이 권력의 중심세력이 되고자했던 것이 이성계의 원래의 목표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도 고려와 국왕은 그대로 둔 채 무신들이 권력을 잡은 예는 무수히 많다. 고려 의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6명의 왕 시대에 고려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던 적이 있었다. 무신 정중부, 이의민, 경대승, 최충헌과 그의 자손 3대까지 모두가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고려의 정체성이나 국왕들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다만 무신들이 모든 국가정책을 좌우했던 것이다.


위화도회군 당시만 해도 이성계는 이러한 선배무신들의 전철을 머릿속에 그려가면서 회군을 감행했던 것이고 역성혁명까지는 꿈꾸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여러 정황을 보더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무신선배들처럼 고려의 정체성과 국왕의 존재는 그대로 유지한 채, 자신은 선배들처럼 권력의 총수자리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위화도회군 후 정치적으로 반대파였던 시중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귀양보냈으며 새로운 왕인 창왕(우왕의 아들)을 옹립하고 난 후 과거부터 교류를 해왔던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들의 정치적 연대가 더욱 깊어지고 강화되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정치적 실권을 잡자 그동안 이성계와 한다리 건너 교류를 해왔던 신흥사대부들이 이성계의 주위로 더욱 바짝 다가왔고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들과 연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 후 이성계가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조민수를 제거하고 새로운 왕 공양왕을 옹립한 후에는 이성계에는 더 이상 맞설 수 있는 정치적 라이벌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시기가 1389~1390년 경으로 이성계가 자신의 최고의 라이벌인 조민수를 제거한 후 모든 권력이 이성계에게 집중된 것이다.


이 시기 이성계와 관계가 돈독했던 정도전도 함께 지위가 상승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이성계가 최고의 권력인 시중자리에 오른 이 시기에 이성계 일파에겐 새로운 정적이 출현하게 

된다.

그는 바로 이색과 정몽주였다. 원래 이색과 정몽주는 이성계와 정치적으로 함께 했던 같은 친명파이자 같은 개혁파였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 전부터 이색, 정몽주와 교류를 가져왔으며 위화도회군 후에도 한동안 동일한 정치노선을 공유하며 함께 보조를 맞추어왔다.

그런데 공양왕이 즉위한 후부터 같은 개혁파 내에서 분란이 생긴 것이다. 친명파이면서 개혁파 내부에서 파벌이 두 개로 나누어진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성계의 지나친 권력독점과 개혁의 속도 때문이었다.



정도전 초상화


정치적 라이벌들을 모두 제거한 이성계는 모든 권력을 손에 넣고 국가권력을 지나치게 독점하였는데 이러한 이성계에게 아첨하는 정도전과 조준, 권근 등 급진개혁파들로서 이성계에게 왕의 권한을 초월하는 초유의 권한을 몰아주고 있었고 보다 합리적이고 온건한 개혁을 추구하는 이색, 정몽주, 길재등 온건개혁파로써 이성계와 급진개혁파들의 정치행태를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하게 된 것이다.


즉, 이색, 정몽주 등 온건개혁파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고려 왕실에 충성하고 고려의 존속을 전제로 한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으나 이성계와 급진개혁파들은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과격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으니 이 두 개의 파가 대립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귀결

이었다.


이 때부터 조정의 중요한 정책수립자였던 정몽주와 정도전은 사사건건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정몽주 등 온건개혁파들은 정도전등 급진개혁파들의 속샘을 눈치챘었다고 보면 된다. 이 때가 시기적으로 1990~1991년경으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퇴위되기 약 1년 전부터 정몽주와 정도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고 본다.


고려왕실과 고려의 정체성의 보존을 강력히 바랐던 정몽주 등 온건파들은 정도전등 급진파들이 장차 이성계를 옹립하고 고려를 멸할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갖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정몽주의 급진파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정몽주는 급진파의 선두에 서있던 정도전을 이성계가 휴양을 떠난 시기에 맞추어서 탄핵상소를 공양왕에게 올려서 재가를 받아서 신속하게 정도전을 유배보낸다,

청년시절 남다른 우정을 돈독히 쌓아왔던 두사람,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렇게 난세에 와서 서로 정적으로 맞서게 된 것이다.

두사람이 어려웠던 시기에는 서로 친했으며 정치적 이상도 같았지만 권력의 핵심세력에 오르고 난 후에는 서로 정적으로 맞서게 된 것이다.


성균관 학사시절에도 서로 우애가 깊었던 두사람이 이렇게 맞서게 된 것은 바로 이성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정도전은 계략이 뛰어난 기회주의자의 기질이 강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연대를 맺은 이성계가 왕이 되면 자신이 조정의 최고의 총수가 될 야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이 꿈꾸었던 새로운 재상중심의 세계를 위해서는 이성계가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한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정도전의 야심을 간파한 정몽주는 정도전 탄핵에 성공하고 다시 공양왕을 보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시도할 무렵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정도전을 탄핵한 그 시기에 이성계는 병을 얻어 지방에 휴양을 간 상태였는데 그당시 이성계일파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정몽주는 이성계를 탐색하기 위해서 이성계 집으로 문병을 가게 된다. 이것으로 정몽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하고 자신의 온건파세력들로 조정을 다시 정비한 것을 알게된 이성계 측에서 정몽주제거를 계획하게 되는데 바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앞장서서 정몽주를 암살한 것이다.

정몽주가 오기 전에 선죽교다리 주위에 자객을 잠복시켜 정몽주를 선죽교다리 위에서 참한 것인데 지금도 개성의 선죽교에는 핏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후 정도전은 결국 자신의 뛰어난 계략과 처세술을 발휘해서 고려를 패망시키고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렇게 간특했던 정도전 자신도 자신보다 더 계략이 뛰어나고 처세술이 능통한 또다른 사람, 이방원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재상중심의 나라를 세워보지도 못한 채 암살되었고, 권력투쟁의 재물로 사라지게 되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둔갑하는 놈이 있다’고 하는 말이 바로 이 상황을 두고 한 말 같다.








Posted by 프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