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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황산대첩, 승리의 결과, 황산대첩의 군사규모, 왜구의 규모

 

 

 

 

‘황산대첩’은 변방을 떠돌던 무인 이성계를 일약 영웅으로 만들어준 왜구토벌전으로 왜구격퇴에 있어서 최고의 성과를 올린 전투이다.

고려말 우왕때 왜구의 침략과 약탈이 극에 달하고 있었는데 북쪽에서는 홍건족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처들어와 고려는 남북으로 적을 맞아 싸우는 어려운 정세에 처했던 시절이었는데 북쪽에서 쳐들어왔던 홍건족을 진압하자 이번에는 남쪽에서 왜구들이 삼남(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지역에 침략해 들어와서 약탈과 살육을 일쌈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1376년 금강을 거슬러 올라온 왜구들을 부여에서 최영장군외 고려군을 만나 크게 섬멸되었다. 홍산대첩으로 왜구들은 크게 패퇴하여 돌아갔는데 그 후 한동안 잠잠하더니 1380년경 또다시 왜구들은 거대한 선단을 이끌고 서남해안 일대에 처들어와 약탈을 자행했다.

 

왜구들은 초기에는 주로 삼남지방 해안가지역에서 노략질과 약탈, 방화등을 일삼았는데 점점 침략 횟수와 규모가 커지면서 우왕시절에는 내륙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와 고려의 내정을 어지럽히고 있었으며 왜구의 규모도 엄청난 규모로 커져 있었다.

우왕 때에만 왜구의 침략횟수는 무려 278회에 이를 정도로 왜구는 징그러울 정도로 고려를 괴롭히고 있었다.

 

 

1380년 고려를 다시 침입한 왜구는 그 규모가 500여척으로 더 이상 해적떼가 아닌 대규모의 전단이었고 함선 100척 밖에 없었던 고려로서는 상대하기 벅찬 상황으로 고려로서는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때 영웅처럼 등장해서 큰 활약을 펼쳤던 인물이 바로 최무선이었다. 최무선은 병법에 능통한 대전술가로 왜구의 대규모선단을 무찌를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선택한 화약과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지금의 금강상류)에 출몰한 왜구의 500척 대부분을 불살라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다.

 

고려에서 최초로 사용한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공격으로 왜구의 500여척의 함선들을 물속으로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토벌된 것은 왜구의 함선들이었으며 불타는 배에서 탈출한 왜구들은 아직 토벌되지 않은 채 이들은 금강일대의 내륙으로 달아났는데 고려 내륙 깊숙한 곳에 산재해있던 왜구들이 모두 모여서 거대한 군단을 형성하며 다시 노략질을 일삼고 살상을 벌이고 있었다.

최무선의 진포대첩은 수전에서는 승리했지만 왜구들이 내륙으로 이동해서 제2전선을 형성한 것이고 내륙에 흩어져있던 왜구들이 모두 집결해서 황산지역에서 거대한 군단을 형성함으로써 또다른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럼 왜구들은 유독 고려말에 왜 이처럼 끝도없이 많이 침입해 들어왔는가?

고려말경 일본에서는 남북조 전쟁을 겪고 있었으며 북조의 세력이 남조의 세력에게 압박을 가하면서 규슈지역의 남조세력들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동쪽에 있는 규슈지역의 남조세력이 북조의 침략군에 밀리면서 항전을 하던 과정에서 부족한 군량미를 얻기 위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고려의 남부지역으로 군량미 약탈 원정을 도발한 것이다.

 

남북조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규슈세력들이 고려에 침략해 들어와 군량미와 병참의 공급처를 확보하기도 하였고 또한 고려의 남부지방을 자신들의 피난처 내지는 퇴로로 삼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 본토에서 군사적으로 몰리고 있던 이들 왜구들은 마지막 생존을 위해 고려에서 더욱 악랄하게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던 것이다.

외딴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던가! 고려땅 외에는 더 이상 퇴로나 피난처가 없었던 일본 남조의 잔여세력들은 고려 남부지방으로 들어와 제세상 만난 것처럼 마지막 발악을 하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진포에서 자신들의 배를 모두 잃고 내륙으로 달아났던 왜구들은 내륙에 흩어져있던 왜구들과 합세해서 전국 곳곳을 누비면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는데 마지막 이들이 집결한 곳이 바로 지리산 부근 황산(오늘날 전북 남원)이었다. 이들은 진포에서 달아났다가 옥주를 거쳐 경북 상주와 성주등을 돌며 살육과 약탈을 벌였고 계속해서 경상도지역을 돌아다니며 약탈하다가 전라도 지리산 부근으로 모여들고 있었는데 이곳에 집결한 왜구들은 거의 10만에 육박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고려조정에서는 고려의 지역 수비군들이 계속해서 왜구들에게 패전하자 이번에는 북방에서 큰 전과를 세웠던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로 임명해서 왜구토벌에 출전시켰다.

 

몽고족과 홍건족을 무찌른 전쟁의 화신 이성계는 자신의 기병대를 선봉에 세우고 지리산 남원부근으로 들어갔는데 지리산에 모여있던 왜구들은 고려군의 공세를 알고 산 높은 곳에서 진을 치며 방어하고 있었다.

이당시 양군의 규모를 살펴보면 고려사 기록에는 왜구의 규모가 고려 군사의 10배나 되는 규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군으로서는 군사숫자상으로는 중과부적이라는 뜻이다.

 

이성계의 왜구 토벌군의 규모를 1만명 수준으로 본다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간 왜구의 규모는 거의 10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이다. 왜구의 정확한 군사규모가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진포에 쳐들왔던 왜구 선단이 500척이었으니 한 척당 승선인원 150명씩만 잡아도 총 75,000명이나 된다.

 

75,000명 대 1만명의 대접전이 지리산 자락에서 벌어진 것으로 분명한 것은 우리 고려토벌군의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에 처했던 전투였다. 이당시 왜구들은 고려토벌군을 멸하고 수도 개경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호헌장담했다고 한다. 이당시 왜구들의 사기나 기세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한마디였다.

 

황산대첩이 벌어졌던 남원 운봉읍 일대, 운봉읍 피바위와 대첩비가 있는 지역이 쵀대의 격전지로 알려졌고 이곳에서 이성계는 왜장 아지발도를 죽였다.

 

왜구들이 집결해있는 지리산자락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군대는 하루밤 휴식을 취한 뒤 그 이튿날 곧바로 공격을 개시했다. 지리산계곡으로 군사를 이끌고 올라간 이성계는 군사를 2개조로 나누어서 산 정상에 버티고 있는 왜구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서 교란적전을 펼

쳤다.

산과 계곡 등에서 이성계의 고려군과 왜구들은 서로 뒤엉켜서 접전을 펼쳤으며 시간이 갈수록 전세는 이성계의 군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산위에서 험준한 지형을 방패삼아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는 왜구들에게 전세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산위로 쳐올라갔던 이성계의 군대는 결국 후퇴하고 다시 산을 내려와야 했다.

 

그 다음날 2차전에서는 이성계는 군사들을 시켜서 적과 싸우면서 패배를 가장해서 산 아래로 왜구들을 유인하도록 작전을 짠다.

황산 아래의 벌판으로 왜구들을 유인에 성공한 이성계군대는 이제 전투다운 전투를 벌일 수 있게 되었다. 황산 아래의 넓은 들판에서 양군이 대치한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적장 아기발은 젊은 장수로써 용맹과 신기를 지니고 있어서 많은 장수들을 수하에 거느리고 있는 맹장이다.

 

이러한 아지발도이 선두에 서서 고려군사들을 거침없이 무찌면서 돌격해오니 고려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동북면 도통사로 북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성계는 전쟁의 승패는 군사규모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군사의 사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오랜 전쟁을 통해서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의 승패는 바로 하늘같이 치솟은 왜구의 사기를 꺽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감지한 이성계는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화살을 날려 단 한방에 적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맞혔고 투구가 벗겨진 아지발도이 미처 방어자세를 취할 여유도 주지않고 이성계의 부장 이지란이 곧바로 두 번째 화살을 날려 적장 아지발도의 얼굴에 명중시켜 아기발을 쓰러뜨렸다.

 

적장을 단번에 잃은 왜구들은 사기가 꺾이고 공포를 느끼면서 오합지졸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이성계의 정예기마병들이 노도와 같이 적진으로 돌격해서 닥치는 대로 왜구들을 도륙하였고 이성계의 제2군이 왜구들의 후미를 기습해 공격해 들어오자 왜구들은 고려군에게 완전 포위당한 채 지리멸렬해갔다.

 

이성계의 활 솜씨는 신궁으로 소문이 나 있으며 이성계는 전쟁이 시작되면 항상 제일 먼저 자신이 직접 활을 쏘아서 적장의 투구를 떨어뜨리는 묘기를 부리곤 하는데 이것은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이성계의 계락 중 하나이다. 몽고침략군 나하추와의 전쟁 때에도 이성계는 직접 활을 쏘아서 적장 나하추의 투구를 떨어뜨려서 나하추의 간담을 싸늘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왜구는 대장 아기발을 잃고 나자 전의를 거의 상실해버려 오합지졸이 되어있었고 이틈을 타서 이성계의 군대가 왜구의 전면과 후면에서 포위공격하면서 닥치는 대로 배어버리자 왜구들은 속절없이 당했으며 퇴로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지만 미리 요소요소에 고려군을 매복시켰기 때문에 달아나던 왜구들은 고려매복군들에게 걸려 목숨을 잃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 황산대첩은 이성계군대의 대승으로 끝이 났으며 지리산 기슭에서 집결해있던 왜구 7만 5천여명(20만명설?)의 병사들은 거의 다 전멸당했으며 살아서 도망친 자들은 70명에 불과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는 왜구의 말 1,600필의 전리품을 얻었으며 노획한 병기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또한 전쟁이 너무 치열해서 황산 앞에 있는 냇물은 7일 동안이나 핏물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며 근처에 적장 아지발도가 피를 많이 흘려 바위를 피로 붉게 물들였다는 피바위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오랜기간 동안 경상도, 양광도(충청도), 전라도 지역을 종횡무진하면서 가는 곳마다 관병과 백성들을 수없이 살육하고 노략질하면서 한반도를 황폐화시켰던 대규모의 왜구들은 이성계의 황산대첩으로 완전히 지리멸렬당했으며 이 황산대첩을 계기로 더 이상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황산대첩의 승리로 이성계는 고려를 구한 영웅으로 급부상한다. 이성계는 이전쟁 이후 백성들의 높은 신망을 얻었으며 또한 이성계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마침내 이성계는 함경도 변방 장수에서 벗어나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황산대첩의 큰 공을 세운 이성계는 최영의 천거를 얻어서 내사문하성 수시중 자리에 오르면서 고려 조정의 핵심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공민왕 때에만 해도 이성계는 사실 함경도 함흥지역의 토착 호족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함흥지역의 도통사를 지냈지만 이지역이 몽고족의 쌍성총관부 관할 아래에 있던 지역이라서 고려의 권문세족들로부터 이성계는 오랫동안 몽고족의 수하노릇을 한 역신취급을 받아왔다.

후에 몽고족들과 홍건족이 쳐들어왔을 때에도 이성계는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과 싸워서 물리치는 큰 공을 많이 세웠지만 조상 대대로 몽고족의 수하라는 꼬리표가 붙어서 중앙정계 진출은 불가능했으며 고려의 권문세가들로부터 견제를 심하게 받아왔으며 정치적으로도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불리한 상황이 황산대첩의 승리로 인해서 일거에 반전을 이루게 된다. 이성계는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우왕으로부터 큰 상(금 50량)을 받았고 아울러 최영시중으로부터도 신임을 돈독히 받아 수시중의 자리까지 승진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재상이었던 최영과 부재상이었던 이성계의 관계는 돈독했으며 정치적으로도 한배를 탔었다.

 

그런데 1988년 요동정벌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우왕, 최영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이성계는 최영과 대립하는 관계로 돌변하게 된다. 자신을 요동정벌군 우총관으로 임명한 최영에게 이성계는 강력히 반발했지만 당시 최고의 실권자였던 최영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요동정벌군으로 떠나갔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마음이 변심을 일으키게 된다.

 

요동정벌군 5만명을 통솔했던 이성계는 역시 5만명을 이끌던 조민수를 꾀여서 위화도회군을 일으켰고 총 10만의 군사를 몰아서 다시 개경으로 쳐들어가는 쿠테타(군사반란)을 일으켰으며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자신이 정치적 실권을 잡았는데 1년 후에 자신을 도왔던 조민수마저 암살하고 고려조정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그리고 친명파인 신진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는 패망하고 새로운 조선이 개국하게 되었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킨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위화도 회군’이다. 이성계에게 5만명의 군사적 지원이 없었으면 이성계는 결코 군사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이성계가 자신의 고향인 함흥지역에서 직접 거느리는 사병은 3천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요동정벌군 우통사에 임명되면서 군사 5만명의 통솔권을 함께 부여받았다.

즉, 이성계의 역성혁명의 밑거름은 바로 ‘위화도회군’이었으며 여기에 정도전, 조준, 남은 같은 신진사대부들의 조언과 계략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원래 함흥지역에서 일종의 지방수령(만호)에 불과했던 이성계는 오랫동안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변방을 전전하며 전쟁에만 동원되었던 정치적으로 불운한 장수에 불과했으며 더욱이 몽고에 내조했다는 과거의 전력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아왔으며 수없이 외적을 물리치면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중앙관직에 출사를 못하는 불운한 신세였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이성계가 단번에 군사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중앙정계에 높은 지위로 신분상승을 이루게된 계기가 바로 황산대첩에서의 승리였던 것이다.

황산대첩의 승리는 이성계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뀌어 놓은 대사건이다. 지방의 무명장수가 한나라의 왕이 되었으니 엄청난 운명의 변신이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소재 -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

1577년(선조 10년) 건립. 높이 4.25m.

 

황산대첩비는 1380년 고려에 침입해왔던 왜군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었던 이성계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서 1577년 세운 승전비이다.

 

김귀영이 비문은 짓고 송인이 썼으며, 전액은 남응운이 하였고, 박광옥이 비를 세웠다. 1380년(우왕 6)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되새기기 위하여 세웠다.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후 파편만 남아 있는 정도였으나 1957년 귀부와 이수를 그대로 이용하여 중건하였다. 중건된 비는 쌍귀(梗龜)를 떠서 새겨진듯하며, 본래 모양의 높이·너비·두께 등은 정확히 고찰할 수 없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많이 흐르고 나서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고 있으니 비석을 세워서 후대에 널리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주청을 올려서 왕명으로 건립하였다.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 황산에서 고려병사보다 10배나 더많은 왜적을 대파함으로써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후대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기념하기 위해서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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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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