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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의 근거와 허구, 반박, 야마토정권 가야지배설, 역사외곡, 광개토대왕비의 해석




집권초기부터 역사왜곡과 독도발언으로 우리나라에 대해 사사건건 도발을 서슴치않았던 일본의 아베정권은 또다시 우리 한국에게 엄청난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그것은 이번에 일본의 국정교과서로 채택한 일본 중학교역사교과서에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임나일본부설을 구체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또다시 역사침탈과 역사왜곡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역사분야에 대해 단 일원 한푼짜리 지식도 없는 아베가 우익역사학자들의 편향된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마치 고대시대에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던 것처럼 거짓된 내용을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실고있는 것이다.


일본은 4세기후반부터 6세기후반까지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한일역사학계에 엄청난 갈등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이 고대국가시기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드는 것이 광개토대왕비와 일본서기다.


일본이 왜 틈난 나면 이렇게 허황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는지 그 근거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의 허와 실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후반부터 6세기후반까지 일본의 야마토정권이 한반도의 가야지방을 점령하고 그 가야를 본거지로 하여 백제와 신라까지도 지배력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사실상 한반도 남부지역을 그들의 식민지로 삼았다는 이론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야마토정권이 백제와 신라까지 복속시켜서 조공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 시기를 보더라도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억측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사실상 지배했다는 그 시기가 4세기후반부터 6세기후반인데 이시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엄청나게 영토를 확장해나가고 한반도 중남부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당시 동북아에서 가장 후진국이었던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지배했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않는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오랜기간에 걸쳐서 한일관계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중 하나가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인 광개토태왕의 비문이다.


광개토대왕의 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 광개토태왕이 사망한 그 이듬해에 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으며 광개토대왕의 비는 광개토대왕의 즉위시절 이룩한 업적에 관한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새겨놓은 것으로 그 높이가 3층아파트 높이(6.8m)에 이르며 18,000자가 기록되어 있고 우리나라 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유명하다.


광개토대왕의 비에는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과 업적등이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4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삼국시대의 중요한 사건과 전쟁, 그리고 국제정세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고구려의 시조와 건국에 대한 기록까지 있는 등 우리나라 고대국가시대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일본이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조선총독부 같은 식민통치기관을 가야지방에 두었다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이다.

그런데 일본학자들은 일본이 고대시기에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랫동안 한일간에 논란이 되고있는 부분은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의 기록인데 아래와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이것을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기존의 번역)


이것을 일본은 - 광개토대왕 즉위 1년인 신묘년(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모두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신묘년의 기록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고있다.



이 광개토왕비의 신묘년의 기록을 보기에 따라서는 일본측의 주장이 일리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문제는 ‘백잔○○○라를 격파하고’에서 세글자가 지워져서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한가지 문제점은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기록인데 이것은 ‘백제와 신라가 과거로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왔다’로 해석되는데 그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백제와 신라가 어느나라에게 조공을 받쳤으며 어느나라의 속민이었는지가 그 주어가 빠져서 불분명한데 그 주어가 일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신묘년의 기록을 정인보가 재해석한 설이 매우 유력한대, 정인보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정인보는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을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왔으므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백제),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했다.


즉,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는 그 주어는 바로 고구려인데 이비가 광개토대왕의 비이므로 고구려인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주어인 고구려는 생략되었다고 정인보는 해석했다.

정인보는 이 신묘년의 기록도 광개토대왕 비석의 기록이므로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주어는 당연히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인 것이 당연하므로 고구려가 왜가 처들어왔을 때 바다를 건너가 백제, ○○, 신라를 격파하고 이들국가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는 ‘왜구’ 또는 ‘가야’일 것으로 추정하며 광개토대왕은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왜가 신라를 공격해왔을 때 신라땅으로 군대 5만을 출정시켜서 신라를 침범한 왜와 백제를 토벌했던 적이 있으며 이후 백제와 신라, 가야등을 속국으로 삼았다. 이 정인보의 설이 가장 타당한 학설로 인정되고 있다.


사카와 가케노부가 1884년 만주 집안시를 방문해서 광개토대왕비를 조사했는데 사카와는 일본 육군성에서 파견한 스파이였다. 이 사카와가 처음으로 광개토대왕비를 일본에 소개했는데 그는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만든 것이 아니라 비에 종이를 대고 글자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5년 뒤인 1889년에 일본육군성은 국수주의기관지인 회여록에 광개토대왕의 내용을 공개했으며 이때부터 광개토대왕비는 임나일본부설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사카와 가케노부가 가져온 광개토대왕비의 글자를 토대로 ‘왜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와 백제, 가야를 격파하고 이들국가를 식민지로 삼았다’로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로 삼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임나일본부설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 데에 명분이 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병하는 데에 그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 임나일본부설이기 때문에 우리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경각심을 갖고 그 해석을 정확하게 하고 확실하게 정립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계속 반복되는 성질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언제가 일본이 또다시 임나일본부설을 근거 내지 명분으로 삼아서 또다시 우리나라에 침략의 야수를 뻗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지금 아베정부가 갑자기 뜬금없이 임나일본부설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서고 있지않는가?

우리가 임나일본부설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그 허구성을 낱낱이 밝히고 국제사회에 공개해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이 완전 날조임을 증명해야 한다.



제일사학자 이진희씨는 일본에 의해서 광개토대왕비의 글자가 변조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진희씨의 주장에 의하면 사카와 이후에 일본학자들이 소장하고 있는 탁본들의 글자체가 일정하지 않고 탁본들이 서로 엇갈리고 있고 없던 글자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즉, 사카와가 광개토대왕비의 글자를 변조했으며 그 후의 학자들이 다시 그곳에 석회를 발라서 변조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일본학자들이 갖고있는 탁본들이 전에 없던 글자들이 나타나는 등 서로 다른 글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서영수교수도 변조설을 주장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破百殘○○○羅 以爲臣民’ 글자는 원래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破百殘倭降新羅 以爲臣民’ 글자였는데 변조되었다는 것이다.


서영수교수가 주장한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破百殘倭降新羅 以爲臣民’ 글자를 해석하면 ‘백제 신라는 속민임에도 불구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대왕이 백제와 (그동조자인) 왜를 공파하고 신라는 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이처럼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 기록은 사카와가 비석을 발견한 후 지금까지 120년간 한일간에 합일점을 찾지못하고 최대의 논란에 휩싸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묘년조 글자의 바로 뒷부분에 ‘광개토대왕이 즉위 6년에 수군을 이끌고 백잔(백제)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백제는 신묘년에 이미 왜의 속국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묘년조 바로 뒷부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않는다.


광개토대왕은 신묘년조 이후에 백제를 공격해서 당성(강화도)과 한성(백제수도) 등을 공격하는 등 무려 58성이나 함락시키는 대승을 거두었고 백제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으며 백제는 고구려에 복속된다.


일본학자들 주장대로라면 백제는 이미 왜의 속국내지 왜의 통치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이라면 광개토대왕이 왜와 싸웠다고 기록되어야 옳은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이후(즉위9년) 보기군 5만군사를 남쪽 경상도로 내려보내 신라를 침범한 왜를 크게 물리쳤으며 왜가 크게 패퇴하여 가야땅으로 달아나자 가야땅까지 추격해서 왜를 완전 전멸시켰다고 한다.



이당시 신라땅에 창궐했던 왜는 거대한 군대의 규모가 아니라 잔당의 수준에 불과했으며 고구려군이 나타나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군세가 매우 미약한 소규모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왜는 백제를 도와서 보조적인 역할로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규모나 역할로 보았을 때도 왜는 한반도 남부지방을 지배할 정도의 큰 세력이 아니었으며 단지 신라와 싸우는 백제를 지원해주기 위해 건너온 소규모 지원병력이나 용병에 불과했다.

왜는 그당시 왜성을 갖고있지도 않았고 신라·백제·가야 틈바구니에 끼여서 보조적 역할이나 수단에 불과했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에서만 확인되고 있는데 541년부터 10여년간의 기록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즉, 임나일본부는 541년부터 10여년 간에만 존재했던 작은 관청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은 가야(안라국)으로부터 수많은 철을 집중 수입해갔으며 이외에도 가야의 철기제작기술과 토기들도 많이 수입해갔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본은 가야(안라국)로부터 철과 선진문물을 집중 수입해갔던 후진국이었다.


만일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그 지역에서 일본의 고고학적 유물이나 유적이 나와야 하는데 가야지방에서 일본의 유물, 유적은 하나도 출토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서 가야나 안라국으로부터 수입해간 철기류와 가야토기들이 수없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보면 일본이 가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가야의 선진문물과 기술을 수입해가는 가야의 부종국가내지 종속국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가야지방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남부지방을 지배하는 식민통지기구가 아니라 가야의 선진문물을 수입해가는 창구인 일본의 외교사절의 집단거주지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나일본부는 지금의 영사관 정도의 관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당시 일본은 철을 독자적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는 매우 후진적인 집단이어서 가야에 빌붙거나, 가야에 내투해서 가야의 선진문물을 수용해갔던 가야의 부종집단에 불과했다는 의미다.


당시 5~6세기 한반도에서 가장 약한 세력이었던 가야를 상국으로 섬기고 선진문물을 수입해갔던 왜(일본)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완전 허구에 지나지 않는 가설일 뿐이다.

자신들에게 선진문물과 선진기술을 전수해주었던 상국(가야)을 후진국인 일본이 어떻게 지배할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욱 타당하다고 본다. 즉, 가야가 일본에 대해 정치적·문화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2010년 3월 한국학자와 일본학자가 공동으로 설립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 아니며, 임나일본부라는 용어자체를 페기하기로 완전 합의를 보았다. 즉, 한일간 역사학자들간에 공식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을 공식 천명한 것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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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폐위이유, 인조반정, 개혁정치, 중립외교정책, 후금과의 관계, 광해군의 업적



광해군은 과연 뛰어난 개혁군주였는가, 아니면 포악한 폭군이었는가?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크게 위의 두가지로 엇갈린다. 광해군은 1608년 선조의 죽음으로 왕위를 물려받아 15년간 왕으로 군림하다가 1623년년도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쫒겨나 귀양가는 안타까운 신세로 전락했다.



무려 15년이나 일국의 군주로 군림했던 광해군이 왕위에서 쫒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광해군을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옹립했던 인조반정은 왜 일어났으며 과연 정당성이 있는 행동일까?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있는 상식에 의하면 광해군하면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매우 포악한 왕이나 폭군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되어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과 재야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광해군을 좀더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노력들이 꾸준히 있어왔다.


광해군은 15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동안 조선의 국왕으로서 재위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반정이 일어나 왕위에서 폐위되는 바람에 역사적관심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왔다.

그리고 승자들이 기록했던 역사적 사실로 인해서 광해군이 이루어냈던 여러 개혁적인 정책들은 평가절하되었고 단지 광해군은 폭군이라는 이미지만이 씌어져왔다.



광해군 재위 시절 대북파가 정권을 잡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던 서인들은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 서인들이 주축이 되어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 광해군을 체포한 후, 왕위에서 폐위하고 능양군(인조)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반정을 성공시킨다.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 광해군을 폐위시켰던 인조반정은 어떤 명분으로 일으켰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년 동안이나 왕으로 군림해왔던 군주를 쫒아냈다면 그만한 명분과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 반정군이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유 -


반정군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난 후 광해군의 죄상을 밝혔는데 그 핵심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광해군이 궁궐등 축조공사를 많이 벌여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2.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인 후금과 화친하였다

3.광해군이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


인조반정을 일으켜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반정세력들은 위와 같은 죄목을 들어 광해군을 폭군으로 칭하며 폐위시킨 명분으로 삼았다.


인조반정을 일으켰던 반정세력들이 광해군의 죄목으로 삼았던 위와 같은 일들이 과연 사실일까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이 궁궐을 새로 축조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으면서 궁궐 대부분이 불에 타고 사실상 재만 남았던 상황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수도 한양으로 돌아왔던 당시 경복궁이 완전 불에타 소실되어 없어진 상황에서 선조나 광해군은 덕수궁을 임시궁궐로 사용했었는데 그 당시 덕수궁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양반의 저택을 임시로 개조해서 사용했다.


광해군은 왕이 되고 난 후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한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 불에 타서 재만 남았던 궁궐터에 경복궁을 다시 지었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새로이 지었다.


7년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궁궐을 다시 지은 것은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행위인데 이것을 이유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고 죄목으로 삼는 것은 너무 과장된 표현이며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그 어떤 왕이라도 광해군처럼 궁궐을 다시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의 두 번째 죄목으로 명나라와의 의리를 배반하고 오랑캐인 후금과 화친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이 죄목을 한마디로 말하면 앞뒤가 전혀 맞지않는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이 통치하고 있을 당시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급박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과거 명나라 중심의 동북아 질서에서 명나라가 쇠락해가고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여진족이 세운 후금(청나라)이 강성해지는 상황으로 국제정세가 바뀌고 있던 상황이었다.

즉, 명나라는 사실상 쇠퇴해져서 그 명운이 종말을 고하는 상황이었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새로운 동북아의 강자로 떠오르는 동북아 정세를 정확하게 간파했던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표방해서 국가적 실리를 취했던 것이다.



17세기 초반 명나라와 후금이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었는데 명나라가 조선에게 원군파병을 요청해왔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던 조선에서는 명나라에게 원군을 파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원군을 파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후금을 적으로 만드는 매우 위험천만 일이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당시 사대주의와 숭명주의에 빠져있던 대다수의 조정대신들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원군을 파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강국 후금(청)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광해군은 어쩔 수 없이 강홍립을 원수로 삼아 군사 12,000명을 파견했는데 만주에서 명나라군사가 청군에게 패한 상황에서 강홍립의 12,000명의 조선군은 청군에게 곧바로 항복해버리고 만다.


즉,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사는 청나라군사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채 청나라에게 투항하는 데 이것은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외교를 펼치겠다는 광해군의 의도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당시 명나라는 내란이 일어나서 분열된 상태로 점점 망해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여진족의 모든 부족들을 통합해서 새롭게 국가를 건설한 후금(청)은 매우 강성해가고 있어 동북아의 저울추가 명나라에서 후금으로 이동해가는 국자정세를 광해군은 정확히 간파하였고 광해군과 교감을 이뤘던 강홍립원수는 명나라의 원군으로 파병되고 외형상 명나라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청나라에게 항복해서 청나라와 조선이 적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준 것이다.


이렇게 광해군은 조선의 대신들이 망해가고 있는 명나라와의 의리만을 중시하면서 비현실적인 대의명분과 사대주의에 빠져있을 당시에도 정확하게 동북아의 정세를 꿰뚫고 있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반영한 실리외교, 중립외교를 추구하였다.


즉 광해군 폐위의 두 번째 죄목으로 지적되고 있는 명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 후금과 화친하였다는 부분은 죄가 아니라 조선의 실리를 최대한으로 추구했던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광해군의 이같은 전략 때문에 광해군 당시에는 조선과 후금 관계가 매우 친밀했으며 당시 후금의 칸 누루하치는 조선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덕분에 후금과의 전면 전쟁을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정대신들은 이같은 광해군의 실리중립외교를 당시 망하기 일보적전인 명나라와의 의리를 배반했다고 엄청 비판했으며 결국 광해군을 왕에서 쫒아내는 구실로 삼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의 침략을 불러들이는 엄청난 정책미스를 범하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왕이된 인조는 광해군과 달리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하면서 친명반청정책을 추진하다가 결국 청태종 홍타이치의 분노를 사서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고 청태조에게 항복 삼배를 올리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된다.

광해군이 추진했던 중립실리외교정책을 반이라도 따라했었다면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에 대한 무조건적이 사대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후금(청)나라에 대한 무조건적인 화친도 아닌, 조선의 이익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은 왕에서 폐위될 만한 죄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막고 조선을 지켜낸 혁혁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광해군의 세 번째 죄목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했다는 부분이다.

이부분이 광해군의 가장 실질적인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은 원래 적장자 출신이 아니라 선조의 후궁의 소생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죽자 그뒤를 이어 왕비로 책봉된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이 광해군에겐 커다란 후환이자 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광해군 재위당시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사건이 실제로 방생하였고 역모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이 역모모의사건으로 인해서 영창대군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인목대비는 폐위된다.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은 사실 잘못된 일이다. 그렇지만 영창대군이 역모사건에 연루되는 일이 발생하자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영창대군을 죽인 것은 권력의 속상상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생을 두명이나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태종과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세조가 그 일로 인해서 반정이 일어난 것은 아니며 또한 왕위에서 쫒겨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광해군을 왕위에서 쫒아낸 인조반정이 일어난 진정한 이유는 다음 두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것, 이것이 반정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 당시 정권을 담당했던 동인세력이나 서인세력 모두 명나라를 숭배하는 숭명주의와 사대주의에 철저하게 빠져있었다.

당시 조선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유교와 성리학의 교주인 공자, 맹자, 주자가 태어난 한족의 나라 명나라를 스승의 나라, 심지어는 조상의 나라라고까지 추겨세우면서 크게 섬겼으며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조선의 조정대신들은 광해군이 후금(청)나라를 중시하는 실리중립외교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자신들이 신봉하는 유교적 가치를 위반하는 행위로 간주한 것으로 이러한 이유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명분으로 작용한 것이다.


즉, 자신들의 나라보다 군주보다도 공자, 맹자, 주자와 그들의 사상이 조선 사대부들에겐 더욱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다. 정말 멍청하기 그지 없던 조선 사대부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완전히 유교와 성리학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약보다도 더 무섭게 유교와 성리학에 중독되어서 결국엔 우리 조선을 소중화(작은 중국)이라고까지 부르고 다녔을 정도다.

즉, 우리 조선은 독자적인 나라가 아니라 중국의 방계혈족으로 작은 중국이라는 얘기다.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는 조선 사대부들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이이첨, 정인홍 같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했던 광해군 집권시절 정치적으로 소외당했던 서인파 세력들이 권력을 획득하려는 욕심이 인조반정의 두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이첨 등 대북파가 권력을 독점하자 정치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었던 김류, 이귀, 김자점, 이괄 등 서인세력이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고 광해군에게 앙심을 품고있던 능양군과 훈련도감을 포섭해서 반정을 성사시킨 것이다.


반정군 2천명의 군사가 불시에 궁궐로 쳐들어갔고 궁궐내부의 훈련도감병사들도 반정군과 내통함으로써 쉽게 궁궐문을 열수가 있었다고 한다.

반정군이 대궐로 쳐들어오자 광해군은 대궐을 빠져나가 안국신이라는 의관집에 숨어있었는데 정남수의 밀고로 결국 반정군에게 체포된 후 제주도로 유배가서 위례안치된다.


49세 때 왕위에서 쫒겨난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했으며 67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폐위된 왕 치고는 상당히 오래 장수했다.


광해군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해보면 광해군은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보다는 더 뛰어난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이 포악한 군주였다는 실록의 기록은 승자의 관점에서 씌어진 일방적인 기록일 뿐이다.

광해군은 재위당시 공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대동법을 실시했던 현명한 군주였다.


대동법은 각지역의 특산물을 국가에 바치는 제도인 공납이 백성들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자 모든 특산물을 쌀로써 대신 납부하도록 하는 제도로 가난한 소작인들은 부과대상에서 제외시켰으며 오직 토지를 소유한 자들만 대상으로 부과했던 제도이다.


즉, 광해군은 폐단이 무척 심했던 공납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자 대동법을 실시해서 - 당시엔 경기도 땅에 한해서 실시 - 가난한 백성들을 공납부담을 완화시켜주었던 것이다. 광해군이 실시했던 대동법은 당시 사대부 기득층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지만 광해군은 소신을 갖고 끝까지 관철시켰다.

결국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사대부 기득권층들에게는 광해군이 자신들의 이익의 일부를 빼앗아가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러한 광해군의 개혁정치 등이 조선 사대부들에게 반감을 불러왔던 것이고 광해군을 폐위시키고자 하는 반정(쿠테타) 지지세력들을 손쉽게 많이 모을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광해군을 폐위시켰던 인조반정의 진짜 이유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광해군이 배신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서인세력들이 정치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권력욕심이 두 번째 이유이며 서민들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양반사대부들에게는 손해가 되는 대동법 등 개혁정책들에 대한 양반사대부들의 반감이 인조반정의 세번째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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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청나라의 전쟁, 역사저널 병자호란의 결과, 발생원인, 남한산성 전투, 청태종 홍타이지




16세기 후반, 만주지역에 흩어져 살고있던 여진족들은 누르하치가 부족들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웠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나갔던 후금은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청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군사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땅을 쳐들어와 조선을 굴복시켰던 조선으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패전의 역사가 바로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이미 후금(청)은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과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구실로 군사 3만을 조선에 출병시켜 평양까지 진출하는 등 조선을 위태롭게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당시에는 양국이 확전을 원치않아 강화가 쉽게 성립되어 전쟁은 조기에 종료됐다.


정묘호란은 후금을 세웠던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새롭게 후금의 황제가 된 태종 홍타이지가 후금과 전쟁을 벌이는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는 등 후금에 적대정책을 취하고 있는 조선에 경고와 위협을 보내기 위해 일으켰던 전쟁이었으며 조선이 후금과 ‘형제지교’의 관계를 맻고 배척하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고 군사를 되돌렸던 것이다.


광해군 집권시절에는 광해군은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강성해지자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여 광해군은 명나라와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펼쳐나가 후금과 큰 마찰없이 평온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1627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 집권세력은 광해군이 추구했던 실리위주의 중립 외교정책을 버리고 다시 친명배금 정책으로 복귀해서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는 등 후금(청)에 대한 적대정책을 추구하였는데 명나라와 전쟁을 한창 벌여나갔던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는 자신들의 배후에 또다른 적인 조선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조선은 당시 평안북도에 있는 가도에 명나라장군 모문룡을 주둔시키고 군사원조를 해주면서 명나라의 요동수복 작전을 도와주는 형국이었으니 후금의 강경파였던 태종 홍타이지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고 결국 청나라로 개칭하고 스스로 황제로 올라선 홍타이지는 청나라의 후방을 교란하는 조선을 쳐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직접 군사 12만 8천명의 철기병을 거느리고 1636년 12월에 조선으로 출병하였는데 이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의 새로운 국왕으로 등극한 인조와 서인 집권세력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국방강화에도 거의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1636경 당시 청나라로 개칭한 후금은 국력이 날로 신장되고 있었고 명나라가 점령했던 만주의 대부분을 모두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몽고에 있는 원나라 몽골세력까지 복속시켰을 정도로 국력과 군사력이 크게 강화되있는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명나라는 집권세력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이 등을 돌렸고 양자강 이남의 지방마다 봉기가 일어났으며 양자강 이남을 장악한 이자성이 명나라조정에 반기를 들고 명나라 조정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으로 명나라는 국력이 크게 약화되어 쇠락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발빠르게 파악했던 광해군은 후금과 좋은 관계를유지하여 후금(청)과의 전쟁을 막을 수 있었지만 청강명약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못하고 오로지 숭명정책의 대의명분에만 빠져있던 인조와 서인세력은 결국 청나라의 침공을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사태파악을 할 수 있는 전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인조와 서인세력은 국방력 강화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후금(청)나라와 약속한 친교정책도 소홀히하며 계속해서 후금을 오랑캐나라라고 얕잡아보며 배척하고 있었다.


과연 후금(청)이 조선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화수준이 떨어진 오랑캐, 야만족일까? 왜 조선은 개국 이래 오랫동안 만주에 사는 여진족 및 그들이 세운 후금을 오랑캐라고 얕잡아 본 것일까?



조선이 야만족이라고 생각하는 여진족은 실제로는 문화적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만주에 흩어져살고 있던 여진족은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어받아 계승·발전시켜서 17세기에는 조선을 거의 능가할 정도로 높은 문화수준을 지니고 있는 선진문명국가였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이 계속해서 만주의 여진족들을 평가절하한 것은 바로 명나라 때문이다.


조선은 유교와 성리학적 이념을 근간으로 해서 세워진 나라였고 조선을 지배했던 사대부들은 모두 성리학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신념은 오직 공자와 맹자, 주자가 교시하는 유교적 이념 안에만 묶여있었고 이로써 다양한 문화의 발전을 꾀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교적 속박으로 인해 조선은 서양의 발전된 신문화와 신기술의 도입이 불가능해 근대화를 이뤄내지 못했으며 결국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집권세력들은 오로지 최고의 스승인 공자와 맹자를 배출한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라고 여기며 숭배해왔고 조선자신을 중국의 작은 나라라고 여기는 ‘소중화주의’의 망상에 빠져있었다.

한 나라의 고관대작들이 다른 이웃나라를 ‘어버이의 나라’, ‘조상의 나라’라고 부르고 섬긴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국치’에 해당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조선지배층의 ‘소중화주의’ ‘사대주의’는 일본과 여진족들로 하여금 조선을 얕잡아보고 침략해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집권사대부들은 실제로 그랬으며 -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인 이이와 이황이 집필한 기자실기, 기자집기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 그들은 조선 건국 이래부터 조선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명나라 등 중원 한족들을 조선의 어버이, 조상의 나라라고 숭배해왔는데 이것을 ‘사대’라고 표현했고 결국 조선 지배층들이 지녔던 ‘사대주의’는 바로 큰 스승이자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공자, 맹자, 주자의 철학적 이념만을 받들어 뫼시고 공자, 맹자가 태어난 나라인 명나라는 스승의 나라이자 조상의 나라로 승격시켜서 조선을 영원한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중국 주나라의 사람인 기자마저도 기자조선의 시조로 만들어놨으며 기자조선을 건국했던 기자가 중국 주나라 사람이니, 주나라의 후손들이 세운 명나라는 우리의 조상의 나라로 떠받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니 명나라 이외의 다른 족속들, 즉, 만주의 여진족이나 몽골족 등 이민족들은 모두 야만인 취급을 하며 외교관계의 예를 다히지 않고 계속해서 멸시만 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 지배층의 편협하고 어리석은 이념 때문에 조선은 국제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없었고 임진왜란이나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은 전쟁과 참화를 스스로 불러일으킨 것이다.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광해군을 몰아낸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즉, 광해군이 북방에서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후금의 강성함을 파악하고 명나라와 후금사이에 중립외교를 표방해서 실리외교를 편 것을 두고 조상의 나라이자 스승의 나라인 명나라를 배반했다고 해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낸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조선의 사대부들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나라를 섬기기 위해서 자신들의 왕을 몰아내는 이러 어처구니 없는 일을 조선의 사대부들은 서슴없이 행했으며 이러한 사대부들의 편협된 행동들이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같은 참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조선에 철기마병을 이끌고 출병했던 청(후금)나라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 출병의 이유를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과 조선의 명나라 군사지원을 이유로 들었다는 것을 보아도 조선이 얼마나 국제정세에 어두웠는지를 알 수 있다.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넜던 홍타이지가 인솔한 청나라 군대는 불과 5일 만인 12월 14일에 한양에 도착하는 엄청난 속도를 보여준다.

5일 만에 한양(서울)에 도착할 정도로 빠른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 군대가 모두 기마병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청나라군대는 국경지대에 있는 조선의 수비성들을 모두 우회하는 전략을 펼쳤고 압록강에서 한양까지 길목에 있는 수비성들과 공성전을 벌이지 않고 오로지 인조가 있는 도성만을 목표로 해서 진군해왔다.


완행버스가 아닌 직행버스를 타고 오직 왕성(한양성) 탈취만을 목표로 해서 진격함으로써 5일이라고 하는 최단 시일 내에 한양에 도착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가 부산 동래성을 출발해 한양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 24일에 비하면 엄청난 진군속도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 국왕인 인조와 대신들은 원래 강화도로 피신할 생각이었으나 청군이 이미 한양부근까지 쳐들와 있어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조선 국왕 인조와 대신들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937년 1월 30일까지 한달 반 동안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버텨냈다.

남한산성에서 수비태세에 돌입한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을 지키는 수비군대 1만 2천명의 병력으로 남한산성의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청군의 집요한 공격을 오랫동안 방어해 내지만 군량미의 부족상태와 엄청난 추위, 그리고 조선병사들의 사기저하로 한달 반 만에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사실 병자호란 당시 군량미의 부족상태는 청나라군대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고 후방의 성들을 우회해서 오직 조선왕이 있는 남한산성만을 공략했던 청나라 군대도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우회했던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 등지에는 적지않은 조선군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이들 조선병력들을 공략하지 않음으로써 청나라 군대는 후방과 전방에 모두 적군들에게 둘러쌓인 불리한 상황이었으며 나중에 본국으로 귀환할 때 퇴로가 막힐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조선국왕과 조정이 한달 정도 더 버텨냈더라면 식량이 바닥이 난 청나라군대가 철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조선은 갑자기 왜 한달 반 만에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게 항복한 것일까?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천자총통과 조총으로 진격해오는 청나라군사들을 집요하게 괴롭혔으며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의 철통같은 방어를 뚫지못해 한달 동안 고전을 면치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에 군사파병을 내려 모집한 조선의 근왕군(속오군)들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 큰 문제였다.


조선조정은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항전하는 동안에 전국 각지에 파발을 보내 지방군들이 파병하여 청군의 포위망를 뚫어줄 것을 기대하였지만 지방에서 모여든 근왕병들은 통일적인 지휘체계가 서지 않은 상태에서 따로 움직이는 바람에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충청도에서 파병한 근왕병은 죽산에서 진격을 멈추었고 강원도 근왕병은 12월 27일에는 검단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청나라 군대에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었던 전라도 근왕병은 전투에서 이기고도 탄약부족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져서 청군에게 포위되었던 남한산성은 지방 근왕병들의 원조를 받지못하고 다시 고립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더욱이 도원수로 임명된 김자점은 군사 2만여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면서도 청나라의 철기군의 기세에 겁을 먹고 성문을 걸어 잠그고 싸우기를 거부한 것도 전쟁패전의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남한산성을 한달 반이나 지켜냈던 인조와 조정은 시간이 갈수록 근왕병들이 패배하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주전파의 입김이 약해지고 주화파의 입김이 더욱 강해져갔고 결국 세자빈과 봉림대군이 피신해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의를 완전 상실했고 주화파 최명길의 주선으로 결국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문서를 전달하고 말았다.


조선은 정묘호란이 발발한 이후 또다시 전쟁이 터질 것을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전국에 전쟁준비를 하달하는 등 나름대로 방비를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감이 있었다.

청나라는 이미 내몽고 지역까지 진격하여 여러 몰공족들을 복속시켰으며 북경지역까지 공략하는 등 군사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는데도 조선은 우물안 개구리처럼 명나라와의 의리와 명분에만 사로잡혀서 국제정세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터진 도화선은 1936년 청나라 태종이 황제로 칭제를 개칭한 후 파견한 청나라 사신을 조선국왕이 만나주지 않는 등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청나라 황제의 국서도 받지 않았던 것이 청황제 홍타이지가 쳐들어온 가장 큰 시발점이 되었다.

사실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명나라와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청나라의 후방의 적을 평정해서 안정화시킬 목적이었으며 또한 명나라와 교역이 끊어져 부족해진 물자를 조선으로부터 조달받기 위함이었다.


강화도가 청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전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면서 항복의 예를 거행했다.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다.



조선과 청나라가 맻은 항복협약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행할 것.

조선은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헌납할 것.

조선은 왕의 장자(세자)와 제2왕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청이 명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내외 여러 신하와 혼인하고 사호(私好)를 굳게 할 것.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물품 20여 종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성절·정삭·동지·경조 등 사신은 명 구례를 따를 것.

가도(假島)를 공격할 때는 병선 50척을 보낼 것.

포도(逋逃)를 숨기지 말 것.

일본과 하는 무역을 허락할 것.


조선 인조의 항복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고, 그리고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포로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조선의 항복으로 청나라와 맺은 항복협정의 내용은 조선이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또한 조선은 해마다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수십만포의 세포등 엄청난 양의 세폐(조공)를 바치는 것이며 명나라와의 전쟁에 군사지원을 해주는 것등 청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엄청난 조공세금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다.


조선을 굴복시키고 난 후 청나라는 명나라 본토를 총공격해 들어가서 명나라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당시 청나라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명나라는 내부의 반란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바로 양자강 이남에서 봉기한 이자성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명군을 대파하고 몰고들어가 북경의 윈난성이 함락되면서 명나라는 1644년에 사실상 멸망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땅을 차지한 이자성군대와 청나라 군대가 하북지방에서 대전투를 벌였고 명나라 장수인 오삼계를 회유해서 귀화시킨 청나라 군대는 총 18만 대군으로 이자성군대를 압박공격해서 결국 이자성군대는 대패하였고 이로써 청나라는 명나라 도성을 점령하면서 중국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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