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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43회 허균의 모반사건의 진실, 능지처참, 역성혁명




허균(許筠, 1569~1618)



9월20일에 KBS 1TV에서 방송된 ‘역사저널 그날’ 43회에서는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장가이자 개혁사상가였던 허균을 다루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허균은 조선중기 1618년 광해군 10년 시절에 역모죄로 몰려 처형당하고만 불운한 사상가였다.



허균은 조선시대의 사상가이자 대문장가, 그리고 뛰어난 시인이자 또한 혁명가이다. 일반사람들에겐 허균이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상 허균은 조선시대의 모순과 부패상을 비판하고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대개혁을 꿈꾸었던 획기적인 사상가이자 혁명가에 더욱 더 가까운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은 허균에 대해서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편에 보면 허균에 대한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허균에 대해서 ‘천지간의 괴물’ ‘악 중의 모든 악을 지닌 인물’ 등 조선사대부들은 허균을 상당히 안좋은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과연 조선왕조실록데로 허균은 괴물이나 극악한 인물, 게 돼지만도 못한 인물일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허균은 역모사건에 몇 번 휘말렸던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운좋게도 살아났지만 광해군 10년에 일어난 모반사건 때에는 허균은 역모집단의 수장으로 몰리게 되어 결국 능지처참당하고 이세상을 하직한다.


그럼 허균이 왜 역모죄로 처형당했는지, 또한 허균이 과연 진짜 역모를 도모했는지, 그리고 허균은 진정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허균은 조선시대 선조 때 명망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이었는데 허균의 아버지는 동인의 우두머리이자 경상도 관찰사였던 허엽이며 허균의 두 형들 또한 당대의 뛰어난 시문장가였으며 허균의 누나는 너무나도 유명한 조선사상 최고로 뛰어난 여류시인 허난설헌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허균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인텔리가문 출신이다.


많은 학자들이 허균을 최고의 문장가, 천재 문장가라고 극찬하고 있는데 허균은 9살 때부터 뛰어난 시를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를 가르켰던 스승이나 동네어른들이 허균을 신동이라고 부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어린 시절부터 허균은 이미 주변 사람들로부터 장차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장가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어왔던 것이다.


허균은 조선중기 선조 시절부터 관직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많이 수행해왔던 관리였다. 허균은 10대 후반부터 과거시험에 응시했는데 문과 초시, 정시, 중시에 모두 합격했을 정도로 학문과 문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왔다.

특히 허균은 20대 중반에 과거시험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과거시험 중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인 문과 중시에 합격하면 바로 정3품의 벼슬이 주어지는 게 관례인데 허균은 바른 말을 잘하고 자유분방한 그의 성품으로 인해서 사대부들의 경계를 받아 정3품 대신 종3품의 벼슬을 얻게 된다.



또한 허균은 관리들이 겨루는 시문장을 짓는 시험에서 한 해에 세 번이나 수석으로 합격했던 적이 있는데 이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불가능한 일로서 허균이 평소에 얼마나 시문장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과거시험 장원급제와 시문장 짓기 대회에서 3회 연속 수석합격 등의 그의 경력을 보더라도 허균이 조선시대 천재문장가, 최고의 시문장가라는 허균의 명성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또한 허균은 공주목사, 순천목사, 부안목사 등의 지방수령을 두루 역임했으며 동부승지, 좌승지, 우승지 그리고 광해군 때에는 예조판서라는 벼슬까지 지냈는데 경력면에서 보아도 허균은 남들에게도 전혀 딸리 것이 없을 만큼 풍부한 정치경륜을 쌓아왔다.


이렇게 지방관이나 중앙정계에서 고관대작을 두루 역임했던 허균은 바쁜 정사에도 틈틈이 책을 쓰거나 시문장을 짓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허균이 지었던 유명한 책만 해도 22권이 넘는다고 한다. 이 외에는 수많은 시를 썼으며 허균을 가장 많이 알렸던 홍길동전 외에도 다섯편의 소설을 더 집필했는데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산인전, 장생전, 남궁선생전 등이 모두 허균이 쓴 소설들이다.


시나 가사(일종의 수필)같은 문학들은 조선중기에도 많이 있었지만 소설같은 창작물은 아무도 생각해 내지도 못했던 조선중기에 전혀 생소했던 이야기형식의 소설을 무려 여섯권이나 써냈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며 허균의 뛰어난 재능을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예이다. 오늘날의 소설을 가장 먼저 개척해냈던 인물이 바로 허균인 것이다.


강릉에 있는 허균과 허난설헌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


이렇게 시문장과 집필에 있어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면서 수많은 역작들을 쏟아내었던 허균이자만 정치적으로는 정말 우여곡절을 많이 겪어왔던 사람이 바로 허균이었다.

허균은 관리로 임용된 후에 무려 8번이나 파직을 당했으며 세 번이나 유배를 당했던 파란만장한 정치경력을 갖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정치사가 결코 순탄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8번이나 파직된 후에도 그는 모두 1년 안에 바로 복직되는 행운이 뒤따른다. 허균이 관직 수행중에 파직된 이유는 대부분의 그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허균은 황해도 도사로 파견되었는데 파견된 지 7개월 만에 사헌부로부터 탄핵상소를 받게 되었고 결국 파직당하고 만다. 파직당한 이유는 허균이 황해도 도사로 부임할 때 한성부의 기생을 데리고 갔다는 이유와 관헌에서 기생을 데리고 놀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후 복직되었던 허균은 어머니 상중에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이유로 또다시 파직을 당하기도 했으며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또다시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유교를 국시로 삼고 있는 조선시대에서는 유교나 성리학 이외의 종교나 사상을 갖는 것을 철저히 금기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종교나 사상에 얽메이기를 싫어하는 자유로운 사상가였던 허균과 유교성리학에만 집착했던 조선 사대부들간의 사상적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허균은 또한 유교나 성리학적 지식에도 엄청 통달해 있었다.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이들을 접견하는 접견사로 나갔던 허균은 명나라 사신앞에서 사서오경을 한순간에 줄줄히 외었으며 성현들의 시문장 수백 편을 막힘없이 외어서 명나라 사신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한번 시문장을 쓰기 시작하면 수천마디를 순식간에 써내려가는 탁월한 글재주를 선보여서 명나라 사신들로부터 하늘이 낸 문장가라는 칭송을 두루 받았을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풍부한 학식과 뛰어난 글솜씨를 발휘했던 허균이 어떻게 하다가 역모사건에 휘말리게 된 걸까?

허균은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획기적인 사상을 가진 개혁가이자 정치사상가였다. 허균은 단순히 사랑방에 앉아서 공자왈 맹자왈만 부르짓는 일반 백면서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천하고 행동하는 양심적인 사상가이자 조선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정치개혁가였던 것이다. 이점에서 허균은 다른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과 판이하게 다른 파격적인 행태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허균이 평소에 성리학적 지식이나 사상에 머무르지 않고 불교, 도교, 그리고 천주교에까지 관심을 두고 사상의 폭을 넓혀나가자 성리학적 근본주의에만 전념했던 당시 사대부지배층들은 허균의 이러한 다양한 사상추구를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허균을 위험스런 이단아로서 판단했던 것이다. 기독교도인들이 불교인들을 심하게 배척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이다.


이렇게 오직 유교적인 틀만을 고집하는 조선사회의 이념적 틀에 염증을 느낀 허균은 자신의 사상을 유교적인 틀안에만 가둬두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사상적·정치적 갈등을 야기시켰던 것이고 수많은 정적들을 양산해 내었던 것이다.

사실 허균은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던 것인데 당시 앞뒤가 콱막힌 유교사대주의자들은 오로지 공자왈, 맹자왈 그리고 주자왈만 외쳐대고 있었으니 시대를 수백년 앞서나갔던 천재 허균과 사상적 궁합이 맞을 리가 없었다. 허균은 이미 400년 전에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허균이 8번 넘게 파직당했던 이유의 대부분이 기생놀음 아니면 불교나 도교를 믿는다는 이유에서 였다는 것만을 보더라도 그시대의 양반사대부들이 유교이외의 사상에 얼마나 배타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갖는다는 이유로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재한 뛰어난 인재를 단번에 파직한 것만 보아도 그당시 유교제일주의나 성리학제일주의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지배층들이 목숨처럼 신봉하는 유교와 성리학적 이념 때문에 나중에 조선이 엄청난 당쟁에 휘말리게 되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어리석고 편협했던 사대부 지배층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꼿꼿하게 자신의 주관을 지키면서 소신있게 살아가던 허균이 광해군 때에 이르러 갑자기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허균은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광해군의 오른팔이자 최고의 실세인 이이첨에게 부탁해서 다시 벼슬길에 올라서게 된다. 허균은 원래 8번의 파직을 당했지만 곧바로 다시 관직에 복직되었으며 허균이 빠르게 관직에 다시 복직되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그의 관직생활이 비록 파란이 많았지만 그래도 허균은 꾸준히 관직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광해군 즉위 후에 허균이 이이첨에게 아첨해서 관직에 올랐던 것은 매우 큰 변화라고 본다. 또한 허균은 광해군이 원하는 인목대비 폐위를 앞장서서 주장하고 나섰다. 이것은 나중에 허균에게 엄청난 정치적 변고를 가져다 줄 시한폭탄으로 작용하고 만다.


당시 적장자 출신이 아닌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상태에서 자신의 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인목대비의 폐비를 그의 최측근 이이첨이 제기하는 상황이었는데 허균이 앞장서서 인목대비 폐비를 주장했던 것이며 이로인해 허균은 정치적으로 수많은 정적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목대비 폐비론을 광해군의 최측근인 이이첨보다도 허균이 더욱 앞장서서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반대하는 인목대비 폐비를 왜 하필이면 허균이 앞장서서 주장한 것인가? 이점이 가장 미스터리한 부분이다. 그렇게도 총명하고 영특했던 허균이 패륜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인목대배 폐비를 주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613년 광해군 5년 때 서자 7명이 주도한 모반사건(칠서의 난)이 발생하는데 명문가 출신 서자 7명이 남한강변에 토굴을 파서 아지트를 만들고 무륜당이라는 패거리를 만들고 무사를 양성해서 모반을 획책했다는 모반사건이다.

이 모반사건의 주동자들은 모두 강변칠우라고 불리는 7명의 서자들인데 이들 중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등이 평소에 허균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던 인물들이어서 허균은 이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의심 받게 되었으며 정치적으로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허균은 과거부터 오랫동안 서자출신이었던 서양갑, 심우영과 자주 왕래하면서 가깝게 지내왔기 때문에 이들이 주동이 된 모반사건에 연루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허균은 당시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온 직후라서 광해군의 배려로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하게 된다. 사실 이 칠서의 난은 단순한 상인 살해사건이었는데 이이첨등이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반사건으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한차례 큰 정치적 곤경에 처했던 허균은 이후부터 광해군 정권의 실세였던 이이첨에게 접근해서 정치적 결연관계를 맺으며 이이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목대비 폐비론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인모대비 폐비론은 허균의 본심이 아니며 이이첨의 농간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앞장서게 된 것이다.

1617년 허균은 형조판서와 예조판서에 오르는 등 정치적으로 크게 부상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허균은 이이첨과 같은 당인 대북당에 입당하여 이이첨과 정치노선을 함께 한다.


이렇게 광해군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최고의 실세인 이이첨과도 가깝게 지냈으며 예조판서로서 남 부러울 게 없었던 허균이 돌연 1618년 8월 역모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체포되기에 이른다.


♣ 허균의 역모사건


광해군 10년인 1618년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 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러한 남대문 격문은 광해군을 몰아내자는 반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붙였다고 한다. 허균과 정치적으로 반대파였던 기준격은 이것을 빌미로 허균이 모반을 획책했다는 상소를 올렸다.



허균의 모반행위에 대해 상소를 올렸던 기준격은 원래 허균의 문하생(제자)이었는데 허균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하자 허균과 등지게 되었으며 당시 소북파의 거두이자 영의정이었던 기자헌이 인목대비 폐모론에 결사적으로 반대했으며 이로서 허균과 기자헌은 서로 적대관계에 서게 되었으며 허균이 페모론에 반대하던 기자헌을 비판하던 상황에서 결국 기자헌이 유배당하게 되자 기자헌의 아들인 기준격은 허균의 모함으로 자신의 아버지 기자헌이 유배당했다고 판단함으로써 한때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허균과 기준격은 졸지에 원수지간으로 변해 버린다.


허균의 문하생이었던 기준격은 허균의 평소 사상인 적서차별 폐지, 평등사상, 신분제도 폐지 등의 사상을 잘 알고 있었다. 허균에 반감을 갖고 있던 기준격은 허균의 이와같은 반유교적이고 급진적 과격사상을 빌미로 삼아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상소를 올린다. 이것은 기준격이 자신의 아버지 기자헌을 구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조작극이었다.


물론 허균의 평소의 사상인 신분제도 폐지나 반상의 차별 폐지 같은 사회개혁 사상은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과격한 사상으로 양반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체제를 부정하는 모반사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준격은 자신의 아버지 기자헌을 유배시키는데 기여를 한 허균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모반 상소를 올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기준격의 계속된 모반 상소가 올라오는 와중에 1618년 10월 남대문 벽서사건이 갑자기 터지자, 그동안 모반상소를 당해왔던 허균이 그 벽서사건의 주동자로 몰려서 체포되고 만다. 남대문에 붙여진 벽서는 허균의 심복인 현응민이 붙였다고 하며 벽서를 쓴 사람은 바로 허균이라는 것이다.

허균은 바로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그리고 3일만에 형신도 받지않고 광해군에게 ‘아뢸 말씀이 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의 심복들과 함께 곧바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허균은 조선사회의 적서차별과 신분제에 강한 회의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후에 서자들과 접촉해서 불만세력들을 모았으며 적서차별과 반상의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모의를 하고 역성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허균은 심복을 시켜 도성 내외에 유구국인들이 쳐들어온다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소외되었던 서얼들과 불교계를 끌어들여 봉기 모의를 진행하던 중 일당 하나가 불심검문으로 붙잡힘으로써 사전에 봉기 계획이 탄로나게 되었으며 결국 심복들과 함께 의금부에 압송된 지 3일 만에 능지처참으로 처형당했다.



진짜 허균이 역성혁명을 계획했었는가? 매우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허균의 모반사건은 조선왕조실록의 일방적인 기록이다.

허균의 모반이 발각되었던 시기는 1618년인데 그 시기에 허균은 형조판서, 예조판서등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남부럽지 않게 큰 권세를 누리고 있던 시기로 광해군과 이이첨의 신임 또한 크게 받고 있었던 시기인데 굳이 허균이 이같은 만족스러운 지위와 권세를 누리던 시기에 목숨을 걸고 소외계층을 모아서 모반을 일으킬 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허균은 평소 서자 차별과 반상제도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부르짖었던 인물이다.

또한 성리학적 유교사상에 집착하지 않고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폭넓게 수용했던 허균의 자유분방한 사상이 당시 유교성리학만을 국시로 추구했던 양반사대부들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로 비쳐졌을 것이며 또한 소외된 계층인 서자들, 불자들과 친분을 쌓아갔던 허균이 장차 이들 소외된 세력들을 규합해서 불괴를 도모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인물로 판단했기에 역모라는 모함을 씌워 미리 허균을 처단해서 후한을 없앤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그당시 사대부 지배세력들은 유교성리학에 위배된다고 판단하면 왕 또한 페위시키던 시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허균이 처형되고 5년 후 광해군 또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는데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렸다는 것과 인목대비를 페위시켰다는 것이 폐위의 가장 큰 이유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지배층 사대부들한테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나라의 실리를 지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던 시기로 광해군 페위에서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분차별이 심했던 조선 중기의 사대부 지배계층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허균이 역도라고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허균은 시대를 훨씬 앞서갔던 뛰어난 사상가이며 지금보다 300년 앞선 시기에 이미 민주주의의 이상을 추구했던 뛰어난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


허균이 주장했던 서얼차별 철폐나 반상제도, 신분제도의 모순 철폐와 백성의 복지증진 사상은 바로 현대 사회의 민주주의의 근본이념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균이 쓴 논문인 호민론과 유재론을 보면 허균이 추구했던 백성들의 복지사상과 평등사상이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호민론·유재론사상은 허균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호민론 -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 지금의 백성의 원성은 고려말보다 훨씬 심하다.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만일 임금과 지배세력이 백성을없신여기고 착취해서 궁예나 견훤 같은 호민이 나온다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오직 백성을 위해서 정치를 해야하며 그들의 불만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유재론에서는 신분재도 철폐에 대한 허균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유재론 - 서얼이라고 해서 관직을 주지 않고 어머니가 개가했다고 해서 그 자식의 재능이 뛰어난데도 쓰지 않는 것은 하늘이 낸 인재를 쓰지 않는 것으로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는 누구에게나 재능을 골고루 주었는데 남녀나 신분에 따라 차별을 두는 것은 하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다.


홍길동전에도 허균의 개혁사상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 허균은 홍길동전을 통해서 신분차별이 없고 백성들이 행복한 평등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정말 시대를 300년 이상 앞서갔던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 허균이 진짜 역성혁명을 도모했는지는 허균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허균이 진정으로 역성혁명을 도모했었다면, 그리고 그의 혁명이 성공했었더라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국민복지는 300년 이상 앞서서 실현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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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황산대첩, 승리의 결과, 황산대첩의 군사규모, 왜구의 규모

 

 

 

 

‘황산대첩’은 변방을 떠돌던 무인 이성계를 일약 영웅으로 만들어준 왜구토벌전으로 왜구격퇴에 있어서 최고의 성과를 올린 전투이다.

고려말 우왕때 왜구의 침략과 약탈이 극에 달하고 있었는데 북쪽에서는 홍건족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처들어와 고려는 남북으로 적을 맞아 싸우는 어려운 정세에 처했던 시절이었는데 북쪽에서 쳐들어왔던 홍건족을 진압하자 이번에는 남쪽에서 왜구들이 삼남(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지역에 침략해 들어와서 약탈과 살육을 일쌈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1376년 금강을 거슬러 올라온 왜구들을 부여에서 최영장군외 고려군을 만나 크게 섬멸되었다. 홍산대첩으로 왜구들은 크게 패퇴하여 돌아갔는데 그 후 한동안 잠잠하더니 1380년경 또다시 왜구들은 거대한 선단을 이끌고 서남해안 일대에 처들어와 약탈을 자행했다.

 

왜구들은 초기에는 주로 삼남지방 해안가지역에서 노략질과 약탈, 방화등을 일삼았는데 점점 침략 횟수와 규모가 커지면서 우왕시절에는 내륙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와 고려의 내정을 어지럽히고 있었으며 왜구의 규모도 엄청난 규모로 커져 있었다.

우왕 때에만 왜구의 침략횟수는 무려 278회에 이를 정도로 왜구는 징그러울 정도로 고려를 괴롭히고 있었다.

 

 

1380년 고려를 다시 침입한 왜구는 그 규모가 500여척으로 더 이상 해적떼가 아닌 대규모의 전단이었고 함선 100척 밖에 없었던 고려로서는 상대하기 벅찬 상황으로 고려로서는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때 영웅처럼 등장해서 큰 활약을 펼쳤던 인물이 바로 최무선이었다. 최무선은 병법에 능통한 대전술가로 왜구의 대규모선단을 무찌를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선택한 화약과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지금의 금강상류)에 출몰한 왜구의 500척 대부분을 불살라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다.

 

고려에서 최초로 사용한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공격으로 왜구의 500여척의 함선들을 물속으로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토벌된 것은 왜구의 함선들이었으며 불타는 배에서 탈출한 왜구들은 아직 토벌되지 않은 채 이들은 금강일대의 내륙으로 달아났는데 고려 내륙 깊숙한 곳에 산재해있던 왜구들이 모두 모여서 거대한 군단을 형성하며 다시 노략질을 일삼고 살상을 벌이고 있었다.

최무선의 진포대첩은 수전에서는 승리했지만 왜구들이 내륙으로 이동해서 제2전선을 형성한 것이고 내륙에 흩어져있던 왜구들이 모두 집결해서 황산지역에서 거대한 군단을 형성함으로써 또다른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럼 왜구들은 유독 고려말에 왜 이처럼 끝도없이 많이 침입해 들어왔는가?

고려말경 일본에서는 남북조 전쟁을 겪고 있었으며 북조의 세력이 남조의 세력에게 압박을 가하면서 규슈지역의 남조세력들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동쪽에 있는 규슈지역의 남조세력이 북조의 침략군에 밀리면서 항전을 하던 과정에서 부족한 군량미를 얻기 위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고려의 남부지역으로 군량미 약탈 원정을 도발한 것이다.

 

남북조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규슈세력들이 고려에 침략해 들어와 군량미와 병참의 공급처를 확보하기도 하였고 또한 고려의 남부지방을 자신들의 피난처 내지는 퇴로로 삼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 본토에서 군사적으로 몰리고 있던 이들 왜구들은 마지막 생존을 위해 고려에서 더욱 악랄하게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던 것이다.

외딴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던가! 고려땅 외에는 더 이상 퇴로나 피난처가 없었던 일본 남조의 잔여세력들은 고려 남부지방으로 들어와 제세상 만난 것처럼 마지막 발악을 하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진포에서 자신들의 배를 모두 잃고 내륙으로 달아났던 왜구들은 내륙에 흩어져있던 왜구들과 합세해서 전국 곳곳을 누비면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는데 마지막 이들이 집결한 곳이 바로 지리산 부근 황산(오늘날 전북 남원)이었다. 이들은 진포에서 달아났다가 옥주를 거쳐 경북 상주와 성주등을 돌며 살육과 약탈을 벌였고 계속해서 경상도지역을 돌아다니며 약탈하다가 전라도 지리산 부근으로 모여들고 있었는데 이곳에 집결한 왜구들은 거의 10만에 육박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고려조정에서는 고려의 지역 수비군들이 계속해서 왜구들에게 패전하자 이번에는 북방에서 큰 전과를 세웠던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로 임명해서 왜구토벌에 출전시켰다.

 

몽고족과 홍건족을 무찌른 전쟁의 화신 이성계는 자신의 기병대를 선봉에 세우고 지리산 남원부근으로 들어갔는데 지리산에 모여있던 왜구들은 고려군의 공세를 알고 산 높은 곳에서 진을 치며 방어하고 있었다.

이당시 양군의 규모를 살펴보면 고려사 기록에는 왜구의 규모가 고려 군사의 10배나 되는 규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군으로서는 군사숫자상으로는 중과부적이라는 뜻이다.

 

이성계의 왜구 토벌군의 규모를 1만명 수준으로 본다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간 왜구의 규모는 거의 10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이다. 왜구의 정확한 군사규모가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진포에 쳐들왔던 왜구 선단이 500척이었으니 한 척당 승선인원 150명씩만 잡아도 총 75,000명이나 된다.

 

75,000명 대 1만명의 대접전이 지리산 자락에서 벌어진 것으로 분명한 것은 우리 고려토벌군의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에 처했던 전투였다. 이당시 왜구들은 고려토벌군을 멸하고 수도 개경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호헌장담했다고 한다. 이당시 왜구들의 사기나 기세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한마디였다.

 

황산대첩이 벌어졌던 남원 운봉읍 일대, 운봉읍 피바위와 대첩비가 있는 지역이 쵀대의 격전지로 알려졌고 이곳에서 이성계는 왜장 아지발도를 죽였다.

 

왜구들이 집결해있는 지리산자락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군대는 하루밤 휴식을 취한 뒤 그 이튿날 곧바로 공격을 개시했다. 지리산계곡으로 군사를 이끌고 올라간 이성계는 군사를 2개조로 나누어서 산 정상에 버티고 있는 왜구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서 교란적전을 펼

쳤다.

산과 계곡 등에서 이성계의 고려군과 왜구들은 서로 뒤엉켜서 접전을 펼쳤으며 시간이 갈수록 전세는 이성계의 군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산위에서 험준한 지형을 방패삼아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는 왜구들에게 전세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산위로 쳐올라갔던 이성계의 군대는 결국 후퇴하고 다시 산을 내려와야 했다.

 

그 다음날 2차전에서는 이성계는 군사들을 시켜서 적과 싸우면서 패배를 가장해서 산 아래로 왜구들을 유인하도록 작전을 짠다.

황산 아래의 벌판으로 왜구들을 유인에 성공한 이성계군대는 이제 전투다운 전투를 벌일 수 있게 되었다. 황산 아래의 넓은 들판에서 양군이 대치한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적장 아기발은 젊은 장수로써 용맹과 신기를 지니고 있어서 많은 장수들을 수하에 거느리고 있는 맹장이다.

 

이러한 아지발도이 선두에 서서 고려군사들을 거침없이 무찌면서 돌격해오니 고려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동북면 도통사로 북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성계는 전쟁의 승패는 군사규모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군사의 사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오랜 전쟁을 통해서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의 승패는 바로 하늘같이 치솟은 왜구의 사기를 꺽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감지한 이성계는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화살을 날려 단 한방에 적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맞혔고 투구가 벗겨진 아지발도이 미처 방어자세를 취할 여유도 주지않고 이성계의 부장 이지란이 곧바로 두 번째 화살을 날려 적장 아지발도의 얼굴에 명중시켜 아기발을 쓰러뜨렸다.

 

적장을 단번에 잃은 왜구들은 사기가 꺾이고 공포를 느끼면서 오합지졸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이성계의 정예기마병들이 노도와 같이 적진으로 돌격해서 닥치는 대로 왜구들을 도륙하였고 이성계의 제2군이 왜구들의 후미를 기습해 공격해 들어오자 왜구들은 고려군에게 완전 포위당한 채 지리멸렬해갔다.

 

이성계의 활 솜씨는 신궁으로 소문이 나 있으며 이성계는 전쟁이 시작되면 항상 제일 먼저 자신이 직접 활을 쏘아서 적장의 투구를 떨어뜨리는 묘기를 부리곤 하는데 이것은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이성계의 계락 중 하나이다. 몽고침략군 나하추와의 전쟁 때에도 이성계는 직접 활을 쏘아서 적장 나하추의 투구를 떨어뜨려서 나하추의 간담을 싸늘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왜구는 대장 아기발을 잃고 나자 전의를 거의 상실해버려 오합지졸이 되어있었고 이틈을 타서 이성계의 군대가 왜구의 전면과 후면에서 포위공격하면서 닥치는 대로 배어버리자 왜구들은 속절없이 당했으며 퇴로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지만 미리 요소요소에 고려군을 매복시켰기 때문에 달아나던 왜구들은 고려매복군들에게 걸려 목숨을 잃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 황산대첩은 이성계군대의 대승으로 끝이 났으며 지리산 기슭에서 집결해있던 왜구 7만 5천여명(20만명설?)의 병사들은 거의 다 전멸당했으며 살아서 도망친 자들은 70명에 불과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는 왜구의 말 1,600필의 전리품을 얻었으며 노획한 병기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또한 전쟁이 너무 치열해서 황산 앞에 있는 냇물은 7일 동안이나 핏물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며 근처에 적장 아지발도가 피를 많이 흘려 바위를 피로 붉게 물들였다는 피바위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오랜기간 동안 경상도, 양광도(충청도), 전라도 지역을 종횡무진하면서 가는 곳마다 관병과 백성들을 수없이 살육하고 노략질하면서 한반도를 황폐화시켰던 대규모의 왜구들은 이성계의 황산대첩으로 완전히 지리멸렬당했으며 이 황산대첩을 계기로 더 이상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황산대첩의 승리로 이성계는 고려를 구한 영웅으로 급부상한다. 이성계는 이전쟁 이후 백성들의 높은 신망을 얻었으며 또한 이성계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마침내 이성계는 함경도 변방 장수에서 벗어나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황산대첩의 큰 공을 세운 이성계는 최영의 천거를 얻어서 내사문하성 수시중 자리에 오르면서 고려 조정의 핵심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공민왕 때에만 해도 이성계는 사실 함경도 함흥지역의 토착 호족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함흥지역의 도통사를 지냈지만 이지역이 몽고족의 쌍성총관부 관할 아래에 있던 지역이라서 고려의 권문세족들로부터 이성계는 오랫동안 몽고족의 수하노릇을 한 역신취급을 받아왔다.

후에 몽고족들과 홍건족이 쳐들어왔을 때에도 이성계는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과 싸워서 물리치는 큰 공을 많이 세웠지만 조상 대대로 몽고족의 수하라는 꼬리표가 붙어서 중앙정계 진출은 불가능했으며 고려의 권문세가들로부터 견제를 심하게 받아왔으며 정치적으로도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불리한 상황이 황산대첩의 승리로 인해서 일거에 반전을 이루게 된다. 이성계는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우왕으로부터 큰 상(금 50량)을 받았고 아울러 최영시중으로부터도 신임을 돈독히 받아 수시중의 자리까지 승진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재상이었던 최영과 부재상이었던 이성계의 관계는 돈독했으며 정치적으로도 한배를 탔었다.

 

그런데 1988년 요동정벌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우왕, 최영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이성계는 최영과 대립하는 관계로 돌변하게 된다. 자신을 요동정벌군 우총관으로 임명한 최영에게 이성계는 강력히 반발했지만 당시 최고의 실권자였던 최영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요동정벌군으로 떠나갔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마음이 변심을 일으키게 된다.

 

요동정벌군 5만명을 통솔했던 이성계는 역시 5만명을 이끌던 조민수를 꾀여서 위화도회군을 일으켰고 총 10만의 군사를 몰아서 다시 개경으로 쳐들어가는 쿠테타(군사반란)을 일으켰으며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자신이 정치적 실권을 잡았는데 1년 후에 자신을 도왔던 조민수마저 암살하고 고려조정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그리고 친명파인 신진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는 패망하고 새로운 조선이 개국하게 되었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킨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위화도 회군’이다. 이성계에게 5만명의 군사적 지원이 없었으면 이성계는 결코 군사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이성계가 자신의 고향인 함흥지역에서 직접 거느리는 사병은 3천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요동정벌군 우통사에 임명되면서 군사 5만명의 통솔권을 함께 부여받았다.

즉, 이성계의 역성혁명의 밑거름은 바로 ‘위화도회군’이었으며 여기에 정도전, 조준, 남은 같은 신진사대부들의 조언과 계략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원래 함흥지역에서 일종의 지방수령(만호)에 불과했던 이성계는 오랫동안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변방을 전전하며 전쟁에만 동원되었던 정치적으로 불운한 장수에 불과했으며 더욱이 몽고에 내조했다는 과거의 전력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아왔으며 수없이 외적을 물리치면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중앙관직에 출사를 못하는 불운한 신세였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이성계가 단번에 군사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중앙정계에 높은 지위로 신분상승을 이루게된 계기가 바로 황산대첩에서의 승리였던 것이다.

황산대첩의 승리는 이성계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뀌어 놓은 대사건이다. 지방의 무명장수가 한나라의 왕이 되었으니 엄청난 운명의 변신이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소재 -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

1577년(선조 10년) 건립. 높이 4.25m.

 

황산대첩비는 1380년 고려에 침입해왔던 왜군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었던 이성계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서 1577년 세운 승전비이다.

 

김귀영이 비문은 짓고 송인이 썼으며, 전액은 남응운이 하였고, 박광옥이 비를 세웠다. 1380년(우왕 6)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되새기기 위하여 세웠다.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후 파편만 남아 있는 정도였으나 1957년 귀부와 이수를 그대로 이용하여 중건하였다. 중건된 비는 쌍귀(梗龜)를 떠서 새겨진듯하며, 본래 모양의 높이·너비·두께 등은 정확히 고찰할 수 없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많이 흐르고 나서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고 있으니 비석을 세워서 후대에 널리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주청을 올려서 왕명으로 건립하였다.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 황산에서 고려병사보다 10배나 더많은 왜적을 대파함으로써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후대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기념하기 위해서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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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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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위관 정철의 진압

- 정여립, 기축옥사 그리고 죽도 -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과 기축옥사


1589년 선조때 발생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무려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던 조선시대 최대의 역모사건인데 그 모반사건의 주모자인 정여립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리고 그가 정말로 반역을 일으켰던 것인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조 23년에 발생했던 희대의 모반사건인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인해서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 뿐만 아니라 정여립이 속해있던 죄없는 동인세력까지 포함해서 무려 1,000명 넘는 사람들이 희생된 기축옥사는 극악무도했던 폭군 연산군이 일으켰던 4대사회 당시 죽은 500명보다도 훨씬 많은 엄청나 피바람이 불었던 조선 최대규모의 숙청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면 기축옥사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정여립은 누구인가?

정여립은 원래 첨정벼슬을 하고 있던 아버지 희증의 아들로 전주지역의 사대부가문 출신이었다. 정여립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출중하였는데 특히 명석한 두뇌를 바탕으로 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화술이 뛰어났던 달변가이자 이론가이기도 했다.


정여립은 경사와 제자백가에 능통하였는데 선조 3년에 과거시험에 급제함으로써 중앙관리에 진출하였다. 그 후 정여립은 이이를 존경하였으며 이이가 속해있는 서인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의 총명과 학문의 능통함을 높이 샀던 이이와 성혼의 총애를 받기도 했으며 홍문관 수찬의 벼슬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고위직까지 올라갔던 정여립은 그의 과격한 성격과 급진적인 비판의식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홍문관 수찬의 벼슬로 상승했던 정여립은 그의 옛날 스승이었던 이이와 같은 서인인 성혼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정여립의 이율적인 행동은 정여립이 이즈음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을 바꾸면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정여립의 이이와 성흔 흠집내기는 커다른 역풍을 맞게 되는데 세상의 이목은 자신의 과거의 스승을 욕되게 한 정여립을 가만놔두지 않는다. 그시대가 의리와 대의명분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던 유교주의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후 정여립은 서인의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선조의 눈밖에까지 나게 되었다. 어느새 동인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어있었던 정여립은 결국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되었고 진안군 죽도에 근거지를 마련한 정여립은 그곳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놓고 또한번의 파란을 불러일으킨다.


평소에 세간의 비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대쪽같은 성품을 지녔던 정여립은 자신의 본거지인 죽도에서 추종자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는데 정여립이 설립한 대동계는 신분의 상하나 양반, 평민, 천민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가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게 했으며 보름마다 향사례를 행한다는 구실로 학문과 무예를 연마시켰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대동계에서 추종자들을 모아놓고 정여립이 행한 파격적인 주장과 발언이다. 정여립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선진적인 평등사상으로서 당시의 상황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급진적 사상이었다.


정여립은 종종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들은 백성들의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는데 정여립이 꿈꾸웠던 것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었으며 지금의 가치로 보면 정여립은 16세기 조선의 최고의 사상가였으며 혁명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현대적인 평가일뿐이며 당시 양반과 평민, 천민의 구별이 엄격했던 계급중심의 사회에서 사대부 지배세력에게는 하나의 도전장이나 다름없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정여릷이 근거지로 삼았던 진안군 죽도


조선시대의 반상의 법도와 신분이 엄격히 구분되던 사회에서 정여립은 감히 양반이나 평민, 천민의 평등을 주장하였으니 그는 확실히 시대를 앞서 태어난 천재였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같은 정여립의 평등박애사상이 그 당시 엄격한 계급사회의 권력을 쥐고 있던 양반사대부들에게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결국 정여립은 정적이었던 서인들의 상소로 인해 선조의 귀에 역모사건으로 과대포장되어 들어가게 되었고 정여립은 역모의 주동자로 수배령이 내려졌으며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은 졸지에 반역도당으로 몰려 관군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관군에게 쫒겨가던 정여립은 진안의 죽도로 피신하였지만 결국 관군에게 붙잡혀 항변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피살되었다. 또다른 이야기는 정여립이 관군에게 수배령이 내려진 후 이미 자결하였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정여립이 피살되었든, 자결하였든지 간에 정여립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사체는 도성으로 운반되어 다시한번 능지처참에 처해졌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모반죄는 능지처참으로 다스려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정여립이 죽은 후에도 그가 활동했던 진안군 일대에서는 정여립이 계속 목격되었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의 혼령이 계속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못다한 말들을 하곤 사라지곤 하였다는 것이다.


정여립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급진적인 혁명사상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상당히 민주적인 사상이었으며 후세의 사상가들에게 상당한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임금)이 있겠느냐고 주장했던 그의 천하공물설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 윤리를 완전히 뒤집어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죽여도 가하고, 인의가 부족한 지아비는 버려도 된다’고 하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펴기도 했다. 철저한 계급 중심의 왕조시대에 그 근본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이러한 정여립의 사상은 참으로 혁명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으며 정여립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졍여립의 이러한 평등사상은 나중에 동학혁명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정여립이 주장했던 대동사상의 핵심은 지금의 공화제 정치를 뜻하는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데 지금의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영국의 청교도혁명에서 공화제가 처음 선포되었는데 그 시기가 1649년도인데 반해 정여립이 공화제를 주장했던 시기인 1589년은 서양보다도 60년이나 앞선 시기였음을 보더라도 정여립의 사상이 얼마나 선진적이었으며 민주적이었고 시대를 훨씬 앞서 나갔던 대단한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선조와 양반사대부세력에게는 정여립의 이같은 급진사상이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역모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당시 송강 정철은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추궁하는 기축옥사 때에 위관으로 임명되어 역모 관련자를 잡아들이는 주역을 맡았다.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주옥같은 가사문학을 많이 남겨 국문학사에 혁혁한 성과를 남겼던 시가의 귀재, 정철이 정여립 모반사건의 관련자들을 참살하는 위관역할을 하였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철은 사실 조선왕실과 인척관계에 맺고 있었던 인물이었는데 정철의 누이가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이어서 정철은 조선왕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정철은 서인 출신이어서 그당시 서인과 동인이 권력을 놓고 첨예하게 암투를 벌이던 시기여서 서인세력이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삼아서 정여립의 잔당척결을 그가 속한 동인세력까지 엮어 넣어 동인세력의 씨를 말려버린다.



정여립 모반사건 잔당처분이라는 기축옥사는 3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친교가 있었거나 동인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처형하는 대학살극이 자행되었다. 이 당시 단지 정여립과 편지 한 장 주고받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서인들은 정여립사건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무능했던 군주 선조는 이러한 서인출신 대신들의 충성경쟁을 즐기면서 또한 조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무고한 수많은 인재들을 대거 참살한 대가로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정작 나라를 지킬 유능한 대신들은 사라져버려 왜군들에게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는 비참한 결과로 귀속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인과응보인 것이다.


자신의 신하와 유능한 선비들 천여 명이나 학살한 선조는 왜군들이 쳐들어오자 저만 살겠다고 백성들을 버리고 체통도 없이 압록강 국경지역 의주까지 줄행랑을 쳐버리고 만다.

수많은 죄없는 신하와 선비를 학살한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대가를 치르고 되었는데 결국 외세(명나라)를 끌어들여 전쟁 발발 7년 만에 간신히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는데 조선의 모든 것은 파괴되어 버린 후였다.


그렇다면 정여립의 사건은 정말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데 정여립이 반란을 획책했다고 하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단지 정여립의 상당히 급진적인 이념과 혁명적 사상이 역모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는 정여립 모반사건이 사실상 서인들에 의해서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즉, 기축옥사는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이의 죽음을 계기로 동인들의 손으로 넘어간 정국의 주도권을 일거에 만회하기 위해 서인측에서 변절자인 정여립의 의심스런 사상과 행동을 꼬투리 잡아서 역모사건으로 둔갑시켰다는 징후가 농후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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