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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 정도전과 정몽주의 관계




KBS 대하사극 드라마 ‘정도전’이 이제 본격적인 역성혁명의 궤도에 올라 더욱 박진감 넘치는 내용으로 치닫고 있다.

사극 드라마 ‘정도전’이 이성계의 위화도 출정과 회군의 분기점에서 과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정도전의 역할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또한 그들은 역신인지 아니면 영웅인지, 그들의 역사적 업적이 올바로 평가되는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주 일요일에 방영된 KBS 대하사극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는 자신이 반대하는 요동정벌을 고려국왕인 우왕과 시중 최영의 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요동정벌군 우도도통사로 임명되어 군사 5만을 이끌고 좌도도통사인 조민수와 함께 요동로로 출정하였다.


그러면 고려왕 우왕과 최영 시중의 요동정벌론은 정당한 정책이었을까?

당시 중국대륙에서 원나라(몽고족)를 물리치고 중국대륙을 차지한 명나라가 고려조정에 철령위 설치와 무리한 세공을 요구한 것이다. 즉,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원래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는 무리한 요구가 하였는데 이같은 요구는 고려로써는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명나라의 횡포인 것이다. 그러자 고려는 명나라와의 실력대결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고려땅의 일부와 요동땅 전체를 자기 것이라고 내놓으라는 명나라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 고려는 요동정벌을 감행했던 것으로 그 당시의 국제정세를 비추어 봐도 요동정벌은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중국에서 원나라와 한창 교전할 때에는 고려에 우호적이었던 명나라가 원나라를 완전히 제압하고 대국으로 커지고 난 후에는 고려에게 땅을 내놓으라면 횡포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요동정벌은 정당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계


훗날 조선을 개국한 후 재상이 된 정도전이 다시 요동정벌을 추진했던 것을 보아도 고려 우왕 때의 요동정벌은 정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와같은 국제정세 속에서 고려는 우리 고유의 땅을 지키고 요동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 요동정벌군 10만명을 출정시켰던 것이다.

8도도통사 최영은 평양성에서 총괄 지휘하였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임명해서 총 10만명의 군사를 동원해서 요동으로 출정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성계는 4불가소를 올려서 요동정벌에 반대하였는데 4불가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소국이 대국을 치는 것은 불가하다.

2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다. (농사에 지장을 주게 되므로)

3 지금 전국에서 군대를 동원해 출정하게 되면 후방의 왜구들이 그 틈을 노리게 될 것이다.

4 장마철에 군대를 출정시키는 것은 역병등 발생하게 되므로 불가하다.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치적 실권자였던 최영은 요동정벌을 강하게 밀어붙여 결국 10만명의 요동정벌군이 출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출정한 이성계와 병사들은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여름 장마비로 인해 강물이 불어서 발이 묶이게 되고 장기간 야영을 하며 대기하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성계 군사의 위화도 야영대기가 바로 이성계의 역성혁명 쿠테타를 불러일으키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당시 장마비가 오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이성계 군사의 위화도 야영대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패망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이 위화도에서 대기하는 일주일 동안에 군사 5만의 수장이 된 이성계의 머릿속에서도 별의별 그림과 정세들이 수없이 그려졌다가 지워지기를 반볶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성계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려군사 5만명의 든든한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서 미래의 출세와 최고 권력을 보장받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함으로써 개경으로 회군하게 되었고 개경을 함락함으로써 조선건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면 이성계가 언제부터 역성혁명을 꿈꾸었으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있어서 정도전의 자문과 역할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진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마치 정도전이 이성계가 요동출정하기 전부터 이성계에게 역성혁명을 충동질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에 부합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드라마에서 약삭 빠르고 간계가 뛰어난 정도전이 자신이 꿈꾸는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어느 정도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성계를 꼬득여서 위화도 회군을 하도록 종용하는 내용으로 나오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에서 나온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역사기록 어디에도 정도전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하도록 권유하는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으며 정도전이 이성계가 요동으로 출정하기 전에 이성계를 만났다는 내용도 역사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드라마 ‘정도전’에서처럼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도록 정도전이 권유 내지 종용하는 것은 드라마를 재미있게 하기위한 작가의 상상속의 산물이다.


정도전과 이성계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86년경 이성계가 함흥의 동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처음으로 만났는데 그 당시 정도전은 조정의 미움을 받아서 성균관학사자리에서 쫓겨난 후였으며 관리에서 파직당한 정도전이 군사들로부터 큰 신망을 얻고 있던 왜군토벌의 영웅 이성계를 먼저 찾아가서 만났던 것인데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간 이유는 그 당시 정도전의 정치적 입지가 너무 약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군사력과 정치력을 어느정도 보유하고 있었던 이성계로부터 정치적 후원(스폰서)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정치적으로 입지가 미약했던 정도전은 이성계의 도움을 받아서 결국 다시 성균관학사 자리를 얻어내었으며 이 때부터 정도전과 이성계의 정치적 교류와 연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파직당했던 자신의 재등용을 도와주었던 이성계와 정도전이 돈독한 정치적 연대를 맺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도전은 자신과 과거급제 동기인 정몽주와 성균관 학사들(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여러 젊은 신홍사대부들)을 이성계에게 소개하게 되고 이렇게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군사원로급 무장인 이성계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젊고 이상이 높았던 신흥사대부들의 정당이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정도전, 정몽주, 권근, 조준 등 신흥사대부들과 무관 이성계의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과연 이렇게 정치적으로 연대를 맺었던 정도전등 신흥사대부들이 불과 2년 후인 1388년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뒤에서 조종할 만큼 유대와 신뢰가 강했는가 하는 것이 요점이다.


사실 고려시대에나 조선시대에도 역성, 모반 등에 관련된 단 한마디의 말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비록 실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목 뿐만 아니라 삼족의 목숨이 날아가는 가장 큰 죄목이었다.

그런데 설사 정도전이 이성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성리학자 출신인 정도전과 평생 전쟁터에서 살아온 무관인 이성계는 신분도, 정치적 식견도, 사상과 철학도, 스타일도 전혀 극과극이라고 할 만큼 너무나도 다른 점이 많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학교 교수나 강사가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고지식한 군대의 군사령관과 친하게 지내고 연대를 맺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상대방이 밀고하거나 외부에 발설되면 그순간 목숨이 달아날 수 있는 역성을 논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드라마에서처럼 두사람이 처음 만난 지 2년 만에 역성혁명을 정도전이 제안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측면이 많다. 드라마상 극의 재미를 더하고 극의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서 작가가 임의로 집어넣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성계와 정도전이 이성계가 요동정벌군으로 출정하기 전에 혁명이나 쿠테타를 모의했다면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반대해서는 안된다.

왜냐햐면 요동정벌에 출정을 해야 자신이 쿠테타에 필요한 군사력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동정벌 출정 당시 이성계가 통솔했던 군사 5만 명 모두가 원래의 이성계의 군사가 아닌 것이다. 그 중 이성계의 실제 직할 군사는 4천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계가 함흥에서 도통사(함흥의 지역사령관)로 있을 때 이성계 휘하의 군사는 그 지역에 있는 군사 4천명 정도가 이성계의 직할 군대였다.

이 4천의 군대로는 당시 고려 조정의 중앙군을 대적하기에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우왕과 최영시중이 요동정벌을 명할 당시까지만 해도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계획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순리에 맞다. 아울러 이당시 정도전이 쿠테타를 권유했을 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결정하게 된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이성계가 쿠테타(군사반란)을 결정한 시점은 장마비로 발이 묶었던 위화도의 15일간의 시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 전까지도 이성계와 정도전은 쿠테타나 역성을 계획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위헤서도 언급했지만 이성계가 그 전부터 쿠테타를 꿈꾸었다면 요동정벌을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군사력을 얻을 수 있는 요동정벌을 찬성해야 앞뒤가 맞는다.


위화도에서 발이 묶였던 시기에 이성계가 회군(군사바란)을 결정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 때부터 이성계가 역성혁명 즉,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고도 보지 않는다.

이 당시만 해도 이성계는 대국인 명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것만을 반대한 것이며 즉, 친명을 지지한 것이며 이러한 친명정책에 반대하는 최영 등 친원파들을 제거하는 것이 당시의 목표였고 또한 자신이 권력의 중심세력이 되고자했던 것이 이성계의 원래의 목표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도 고려와 국왕은 그대로 둔 채 무신들이 권력을 잡은 예는 무수히 많다. 고려 의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6명의 왕 시대에 고려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던 적이 있었다. 무신 정중부, 이의민, 경대승, 최충헌과 그의 자손 3대까지 모두가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고려의 정체성이나 국왕들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다만 무신들이 모든 국가정책을 좌우했던 것이다.


위화도회군 당시만 해도 이성계는 이러한 선배무신들의 전철을 머릿속에 그려가면서 회군을 감행했던 것이고 역성혁명까지는 꿈꾸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여러 정황을 보더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무신선배들처럼 고려의 정체성과 국왕의 존재는 그대로 유지한 채, 자신은 선배들처럼 권력의 총수자리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위화도회군 후 정치적으로 반대파였던 시중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귀양보냈으며 새로운 왕인 창왕(우왕의 아들)을 옹립하고 난 후 과거부터 교류를 해왔던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들의 정치적 연대가 더욱 깊어지고 강화되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정치적 실권을 잡자 그동안 이성계와 한다리 건너 교류를 해왔던 신흥사대부들이 이성계의 주위로 더욱 바짝 다가왔고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들과 연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 후 이성계가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조민수를 제거하고 새로운 왕 공양왕을 옹립한 후에는 이성계에는 더 이상 맞설 수 있는 정치적 라이벌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시기가 1389~1390년 경으로 이성계가 자신의 최고의 라이벌인 조민수를 제거한 후 모든 권력이 이성계에게 집중된 것이다.


이 시기 이성계와 관계가 돈독했던 정도전도 함께 지위가 상승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이성계가 최고의 권력인 시중자리에 오른 이 시기에 이성계 일파에겐 새로운 정적이 출현하게 

된다.

그는 바로 이색과 정몽주였다. 원래 이색과 정몽주는 이성계와 정치적으로 함께 했던 같은 친명파이자 같은 개혁파였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 전부터 이색, 정몽주와 교류를 가져왔으며 위화도회군 후에도 한동안 동일한 정치노선을 공유하며 함께 보조를 맞추어왔다.

그런데 공양왕이 즉위한 후부터 같은 개혁파 내에서 분란이 생긴 것이다. 친명파이면서 개혁파 내부에서 파벌이 두 개로 나누어진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성계의 지나친 권력독점과 개혁의 속도 때문이었다.



정도전 초상화


정치적 라이벌들을 모두 제거한 이성계는 모든 권력을 손에 넣고 국가권력을 지나치게 독점하였는데 이러한 이성계에게 아첨하는 정도전과 조준, 권근 등 급진개혁파들로서 이성계에게 왕의 권한을 초월하는 초유의 권한을 몰아주고 있었고 보다 합리적이고 온건한 개혁을 추구하는 이색, 정몽주, 길재등 온건개혁파로써 이성계와 급진개혁파들의 정치행태를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하게 된 것이다.


즉, 이색, 정몽주 등 온건개혁파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고려 왕실에 충성하고 고려의 존속을 전제로 한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으나 이성계와 급진개혁파들은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과격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으니 이 두 개의 파가 대립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귀결

이었다.


이 때부터 조정의 중요한 정책수립자였던 정몽주와 정도전은 사사건건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정몽주 등 온건개혁파들은 정도전등 급진개혁파들의 속샘을 눈치챘었다고 보면 된다. 이 때가 시기적으로 1990~1991년경으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퇴위되기 약 1년 전부터 정몽주와 정도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고 본다.


고려왕실과 고려의 정체성의 보존을 강력히 바랐던 정몽주 등 온건파들은 정도전등 급진파들이 장차 이성계를 옹립하고 고려를 멸할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갖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정몽주의 급진파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정몽주는 급진파의 선두에 서있던 정도전을 이성계가 휴양을 떠난 시기에 맞추어서 탄핵상소를 공양왕에게 올려서 재가를 받아서 신속하게 정도전을 유배보낸다,

청년시절 남다른 우정을 돈독히 쌓아왔던 두사람,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렇게 난세에 와서 서로 정적으로 맞서게 된 것이다.

두사람이 어려웠던 시기에는 서로 친했으며 정치적 이상도 같았지만 권력의 핵심세력에 오르고 난 후에는 서로 정적으로 맞서게 된 것이다.


성균관 학사시절에도 서로 우애가 깊었던 두사람이 이렇게 맞서게 된 것은 바로 이성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정도전은 계략이 뛰어난 기회주의자의 기질이 강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연대를 맺은 이성계가 왕이 되면 자신이 조정의 최고의 총수가 될 야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이 꿈꾸었던 새로운 재상중심의 세계를 위해서는 이성계가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한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정도전의 야심을 간파한 정몽주는 정도전 탄핵에 성공하고 다시 공양왕을 보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시도할 무렵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정도전을 탄핵한 그 시기에 이성계는 병을 얻어 지방에 휴양을 간 상태였는데 그당시 이성계일파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정몽주는 이성계를 탐색하기 위해서 이성계 집으로 문병을 가게 된다. 이것으로 정몽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하고 자신의 온건파세력들로 조정을 다시 정비한 것을 알게된 이성계 측에서 정몽주제거를 계획하게 되는데 바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앞장서서 정몽주를 암살한 것이다.

정몽주가 오기 전에 선죽교다리 주위에 자객을 잠복시켜 정몽주를 선죽교다리 위에서 참한 것인데 지금도 개성의 선죽교에는 핏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후 정도전은 결국 자신의 뛰어난 계략과 처세술을 발휘해서 고려를 패망시키고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렇게 간특했던 정도전 자신도 자신보다 더 계략이 뛰어나고 처세술이 능통한 또다른 사람, 이방원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재상중심의 나라를 세워보지도 못한 채 암살되었고, 권력투쟁의 재물로 사라지게 되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둔갑하는 놈이 있다’고 하는 말이 바로 이 상황을 두고 한 말 같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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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남이장군의 비극과 죽음, 설화





3월 30일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남이장군편’을 방송하여 남이장군에 대한 역사적 치적에 대해서 다시한번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이장군은 조선시대 세조때 공을 많이 세운 기개와 무용이 뛰어난 장수였다. 남이장군은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무예에 뛰어나고 병법에 능한 전형적인 호걸형 무인이다.

남이장군은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닌 이상과 기개가 높았던 인물이다. 훗날 남이장군의 이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이 남이장군의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왔다고도 할 수 있다.





남이장군은 세조때 외적의 침입과 반란 때 출정하여 큰 공을 많이 세웠던 뛰어난 조선의 용장이었다.

건주여진족을 물리치고 세조 12년에는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하는 등 뛰어난 무예와 용맹성으로 많은 백성들의 지지와 신망을 받았던 무장이었다.

남이장군은 이같은 공을 인정받아 28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오르는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된다. 남이장군의 출중한 무공을 높이 산 세조는 남이장군을 병조판서에 임명하였고 자신의 후계자인 예종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또한 남이장군은 당시 권력의 핵심인물이었던 권남의 사위가 되어 더욱 권력층에 가까이 다가간다. 조선시대 때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많이 받았던 남이장군에 관련된 민간의 전설들이 많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남이장군과 훈구대신 권남의 딸과 관련된 전설이다.


남이는 한 여자시종이 물동이를 이고 걸어오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된다. 그런데 남이가 자세히 보니까 그 여자시종의 물동이 위에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귀신이 올라타고 있는 것이 남이장군의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귀신은 여자시종 물동이위에 탄 채 한 우람한 양반집 저택으로 따라 들어갔다.



이에 남이가 이상히 여겨 그 여자시종을 따라 양반집 저택으로 들어가보니 곧이어 곡소리가 크게 나고 그 양반집 여식이 고통에 심음하며 다 죽어가고 있었다.

남이장군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병에 걸려 고통에 신음하는 그 여식의 머리위에서 아까 여자시종을 따라 들어갔던 여자귀신이 그 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이는 바로 그 여자귀신을 향해서 ‘물럿거라! 어찌 귀신 따위가 남의 귀한집 딸을 희롱하는가! 라고 큰 소리로 호통을 치자 깜짝 놀란 여자귀신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말았다.


그렇게 여자귀신을 쫒아내자 그 양반집 딸은 바로 병마에서 회복되어 일어났다고 한다. 그 공로로 그 양반집 여식과 남이장군은 혼인을 맺게 되었는데 바로 그녀가 훈구대신 권남의 딸이었으며 남이장군은 태조 때 1등공신이자 세도가인 권남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민간에 널리 퍼져있는 남이장군에 과한 전설은 남이장군의 높은 기개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남이장군의 호방함을 잘 보여주는 시 한 수가 있어 소개한다.


백두산석마도진 (白頭山石磨刀盡)이요

두만강수음마무(頭滿江水飮馬無)라

남아이십미평국 (男兒二十未平國)이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리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닳게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앴도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일컫겠는가.


이시는 남이장군이 국경을 침범한 건주여진족을 물리치고 회군하는 길에 지은 시이다. 남이장군의 드높은 기개와 호방함을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기개 넘치는 시 한 수가 훗날 남이장군의 운명을 비극으로 몰아가는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남이장군이 젊은 나이에 여진족을 물리치고 큰 전공을 세우면서 초고속승진을 하자 남이장군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당시 훈구세력인 한명회에 의해서 정치적 견제를 받게 된다.즉, 기득권세력인 훈구세력과 신흥세력의 갈등과 대립의 한복판에 남이장군이 휘말리게 된 것이다.


어느날 하늘에서 푸른빛을 띤 혜성이 긴 꼬리를 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당시 혜성의 출현은 전쟁이나 모반을 의미하는 불길한 징조로 여겨져 왔는데 마침 혜성의 출현하던 날 밤 남이장군은 당직을 서고 있었고 혜성의 출현을 전해들은 남이장군은 ‘혜성이 나타나는 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는데 이말은 전해들은 유자광은 남이장군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했던 것이다.


이 말 한마디로 인해서 남이장군의 운명은 비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전혀 굽힐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과 발언으로 평소에 조정에 반감을 갖는 대신들이 많았던 남이장군은 자신을 시기하던 간특한 야심가였던 유자광의 고변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또한 정적관계에 있던 한명회, 유자광은 남이장군의 시에서 '남아이십 미평국(未平國)' 구절을 '남아이십 미득국(未得國) '이라 고쳐서 고변함으로써 남이장군이 평소에 역심을 품었다고 고변을 하게 된다.

‘나라를 평정한다’를 ‘나라를 얻는다’로 거짓 고변을 해서 죄없는 남이장군을 역적으로 몰았던 것이다. 결국 남이장군은 역적의 누명을 쓰게 되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도 능지처참의 형을 당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오직 권력에만 눈이 먼 간특한 간신들에 의해 이와같은 기개 높고 뛰어난 용장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함으로써 전정한 충신들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고 특권층에 아첨만 하는 아첨배들만이 종국적으로는 살아남아 훗날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남이장군 같은 맹장이 나올 수 없게 만든 불행한 비극의 서막이 되었던 것이다.


한명회, 유자광 같은 권력에만 눈이 먼 훈구세력들이 드높은 기개와 뛰어난 용병술로 여진족을 토벌하고 국가의 안위를 지켰던 남이장군과 같은 용장이 더 이상 나올 수 있는 토대를 없애버린 것이다.


남보다 뛰어나면 어떻게든 시기하고 꼬투리를 잡아 역적으로 몰아가니 뛰어난 인재들은 출사하지 않고 초야로 숨어들어 은둔하는 풍토를 만들었으니 누가 있어서 나라를 지켜내겠는가?

남이장군 같은 뛰어난 용장을 역적으로 몰아 숙청했다는 것은 조선의 큰 비극이자 훗날 조선이 파멸하게 되는 전조였던 것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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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의 여주인공, 원나라의 ‘기황후’란 누구인가

 

 

 

10월 28일 첫 방영된 MBC 사극 드라마 ‘기황후’가 요즘 큰 화제가 되고 있다, 기황후역으로 하지원이 캐스팅되었고 충혜왕역은 주진모가 맡았으며 장영철과 정경순이 공동으로 각본을 쓴 역사 드라마 ‘기황후’는 총 50부작으로 편성이 되었는데 10월 28일 첫 방영된 ‘기황후’의 시청률이 뜻밖에도 11%로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사극 드라마 ‘기황후(奇皇后)는 방영되기 전부터 인터넷상에서 많은 논란을 가져왔고 특히 기황후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역사왜곡이라는 네티즌들의 질타와 논쟁이 치열했던 작품인데 그러한 인터넷상에서의 역사왜곡 문제로 인해서 논란이 크게 일어남으로써 결과적으로 역사드라마 ‘기황후’의 인지도를 크게 높여주었고 이로써 ‘기황후’의 시청률도 동반 상승하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를 낳은 작품이 되었다.

‘기황후’의 역사왜곡 논란이 결과적으로 ‘기황후’의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순기능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니 역사드라마 ‘기황후’ 연출진들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방영전부터 인터넷상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하였을 만큼 역사왜곡 논란을 가져왔던 역사드라마 ‘기황후’의 여주인공 기황후는 누구이며 기황후와 관련된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어떠했는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황후는 성이 기씨이며 나중에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되어 황세자를 낳았으므로 기황후라고 부른다. 기황후는 원래 고려의 여인이었다가 원나라에 공녀로 차출되어 원나라로 가게된 기구한 여인이었다.

기황후의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인데 고려시대에 음보라는 벼슬을 하였으며 그의 증조부인 기윤숙(奇允肅)은 고려문하시랑평장사라는 큰 벼슬을 하였을 정도로 기황후의 집안은 고려시대에 뼈대있는 귀족가문이었다.

기황후는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어났는데 위로 오빠가 다섯, 언니가 둘인 대가족의 막내였다가 원나라가 요구한 공녀로 뽑히게 되어 원나라로 가게된다.

 

기황후가 원나라 공녀로 끌려가게된 시점은 1333년인데 그시대에는 아시아전체가 온통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세상이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역사드라마의 소재가 된 ‘기황후’가 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으며 또한 어떻게 황후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는지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기황후가 스스로 자원해서 원나라에 가게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그 당시의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

그 시대에는 한사람의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던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라 즉,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의해서 한 개인의 운명이 좌우되던 그런 시대였다.

 

몽골초원에서 일어난 몽골제국은 징기스칸의 영도하에 기마병 특유의 뛰어난 기동력을 발휘하여 파죽지세로 주변의 나라들을 점령해 나갔다.

징기스칸의 뛰어난 전략전술과 몽골기마대의 뛰어난 기동력은 주변의 나라들을 차례로 병합시키면서 서쪽의 호라즘왕국을 무너뜨리고 중국북방의 맹주였던 금나라까지 멸망시키고 중원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기황후 역의 '하지원'

 

동북아의 황제국가였던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제국은 쿠빌라이칸에 이르러 국호를 원나라로 개명하고 동서남북으로 진격하여 서로는 이집트, 이란, 모스크바를 거쳐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유럽까지 진출하여 세계역사상 최대판도의 영토를 획득하였다.

몽골족의 원나라가 점령한 영토는 과거 로마제국이나 알렉산더대왕의 영토보다 훨씬 더 넓은 세계 최대판도의 유라시아대륙이었고 역사상 최대판도의 영토를 이룩했던 원나라는 유라시아의 중심국가로 우뚝 솟아있었다.

 

13세기경에 몽골제국이 점령했던 영토는 몽골, 중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이라크,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몰도바, 쿠웨이트, 독일, 폴란드, 헝가리를 포함하는 것이다. 아시아와 동유럽을 포함한 실로 엄청난 영토를 점령했으며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대기록이다.

 

원나라가 서쪽을 평정하고 중국 북방을 호령했던 금제국을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마지막 남은 중원대륙 남쪽의 남송과의 전쟁을 남겨놓고 있었는데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칸은 남송과 우호관계에 있던 고려에 의해서 자신들의 후방을 교란당할 것을 우려해 남송과의 본격적인 전쟁 전에 고려에 먼저 침공해들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나라는 서쪽으로 동유럽까지 정벌하였고 중원대륙의 3분의 2를 차지했을 정도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고려는 그러한 원나라대군과 맞서 30년 동안 7차례의 전쟁을 벌여나가고 있었으며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고 있었다.

 

결국 30년 항전 끝에 고려는 최씨무신정권과 김준이 피살된 후에 강화도에서 나와 원나라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만다.

원나라의 침공을 7차례나 막아낸 고려는 천도한 강화도에서 최의, 김준 등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난 후에 문신들의 주도로 강화도에 환도하여 원나라에 항복하고 원나라의 복속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최씨등 무신정권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아마 죽든 살든 끝까지 몽골군과 싸웠을 것이다.

 

원나라와의 강화조약을 주도한 세력은 문신들이었으며 그들은 원나라와 평화관계를 맺후 이후 자신들의 안위와 사리사욕에만 집착하였고 고려조정의 권세를 손에쥐고 좌지우지한 권문세력이 되었으며 원나라에는 충성을 다하고 아첨하는 부원세력이 되었다.

 

 

 

이렇게 13세기의 동아시아 판도는 원나라에 의해 평정되었고 고려는 원나라의 복속국가가 되어서 비록 국호와 왕실은 보존되었다고 하지만 원나라의 끊임없는 정치적 간섭과 통제에 따라야만 하는 불행한 국가가 되고 말았다.

또한 고려영토의 북쪽지역 즉, 함경도지역과 청천강 이북의 영토는 원나라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으며 고려는 원나라가 요구하는 공물헌납과 전쟁물자 제공 등의 신하국가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패자로 우뚝 선 원나라는 고려에 대해 공녀를 바치라는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고려 정사의 기록된 공녀요구는 원나라의 간섭기간인 80년 동안 무려 50회에 이르고 있을 정도로 그당시 원나라의 공녀요구는 도를 넘는 수준이었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 이유는 원나라의 몽골족은 본래 유목민족으로서 부녀자가 턱없이 부족했으며 그들은 전쟁들을 통해서 부족한 부녀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원나라 제국의 지지기반인 막강한 군사집단을 유지하려면 필요한 만큼 많은 여자들을 그들에게 제공해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는 고관, 군인 등에 필요한 여자를 공급해줄 필요가 있었고 나라가 커지고 왕실규모가 커짐에 따라 시중드는 궁녀들을 많이 충원하기 위해서도 많은 수의 여자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고려에게는 엄청 큰 국가적 시련이었다.

공녀는 비단 하층민들에게서만 차출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집안에서도 많이 차출되어 갔는데 그것은 원나라 왕실에 상응하는 수준에 부합되는 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며 이렇게 끌려간 공녀들은 원나라의 고관대작이나 군인들의 처첩으로 들어가거나 왕실의 궁녀로도 발탁되었고 운이 나쁜 경우에는 기생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나라는 해마다 수만명의 공녀를 요구해왔고 원나라에 아첨해서 권력을 거머줬던 부원세력들은 고려왕을 회유 또는 겁박해서 공녀 요구에 순순히 응해줬던 것이다.

 

원나라 요구로 이뤄진 고려의 공녀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원나라로 간 것이 절대 아니었다. 공녀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한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으며 원나라 조정과 고려의 부원세력들의 농간에 의해서 원치도 않는 공녀로 원나라에 넘겨진 것이었다.

근본적으로는 원나라에 항복을 자청했던 고려 문신들과 그들의 후손인 부원세력들에 의해서 이같은 불행이 초래되었다고 본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나라의 어린 딸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이역만리 야만스러운 몽골족에게 권문세가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대가로 어린 딸들을 넘겨주었던 것이 바로 공녀제도이다.

 

 

기황후도 이러한 고려 공녀 중 한명이었다. 기황후도 다른 공녀들과 함께 원나라로 넘겨진 후에 1333년 고려출신의 환관이었던 고용보(高龍普)에 의해서 원나라 황실에 궁녀로 발탁되었다.

원나라 황실에 궁녀로 들어간 기황후는 당시 원나라의 황제였던 원순제의 눈에 들어서 제2황후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고려출신이었던 고용보는 기황후를 차를 따르는 궁녀로 황제의 곁에 머물게 해서 황제인 순제의 눈에 들게 하였다.

원나라황제인 순제는 고려출신인 기황후를 엄청 총애하였고 자신의 곁에 두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이사실을 안 제1황후였던 타나시리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기황후를 엄청나게 핍박했다.

기황후에게 수시로 핍박을 일삼았던 제1황후 타나시리는 불행하게도 1335년 타나시리의 형재들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서 벌을 받아 죽게 된다.

 

원나라 황제 순제는 기황후를 황후로 봉하려 했지만 몽골족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원나라 조정대신들의 반대로 황후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1338년 기황후는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았고 자신의 황후책봉을 반대하던 반대파들이 실가되고 난 후 드디로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기황후는 황후가 되고 난 후 순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나간다.

기황후는 자신을 천거했던 고려출신 고용보를 재정책임자로 임명하고 원나라 재정을 손아귀에 쥐었으며 막강한 재정권을 바탕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사작한다.

기황후는 같은 고려출신인 박불화(朴不花)를 군사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에 봉하면서 군사권도 장악하였고 황제를 압박해서 자신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만드는데에 성공함으로서 기황후는 사실상 원나라의 최고의 실권자가 되었다.

 

 

기황후가 이처럼 원나라의 실권자가 되고 자신의 아들인 황태자가 되자 고려에 남은 기황후의 가족들도 덩달아서 고려에서의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과 기원은 원나라의 강요에 의해서 고려에서는 덕성부원군, 덕양군으로 봉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후 기철과 기원은 여동생인 기황후의 권세를 이용해서 고려에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갖가지 만행을 일삼았지만 고려의 조정은 기철과 기원의 후견인 역할을 하는 원나라의 기황후가 두려워서 오히려 기철, 기원형제의 눈치를 보는 형편이었다.

 

그 후 고려에 공민왕이 즉위하고 난 후 원나라가 내분에 휩쌓이게 되었고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는데 자주의식이 강했던 공민왕은 원나라의 세력약화를 알아채고 그틈을 이용해서 기철과 기원을 제거해 버렸다.

자신의 오빠들을 잃은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하고 덕흥군을 왕위에 세우기 위해서 원나라군대를 파견했으나 고려의 군대는 용감하게 맞서 싸워서 원나라군대를 물리쳤다.

 

원나라는 14세기 들어오면서 즉위한 순제가 문치주의를 표방하였는데 이러한 문신우월주의 정책은 군인계급을 소외시켰고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또한 원나라의 통치에 반대하는 한족 군사집단인 홍건족들이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어서 그들을 진압하는데에 많은 군사를 동원함으로서 상대적으로 고려에 대한 군사파견은 그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공민왕을 징벌하기 위해 파견한 원나라 군사규모는 1~2만 규모의 소수였다. 일각에서는 같은 고려출신인 기황후가 다른 이민족을 칠 때 보다 적은 수의 군대를 고려에 파견한 것은 고려를 진짜로 공격하기 보다는 엄포만 놓기 위한 의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자신의 오빠들을 죽인 원수이기에 징벌은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고려는 자신의 조국이기에 그 강도를 상당히 낮춤으로써 고려의 공민왕을 회유하기 위한 엄포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중원을 집어삼킨 원나라의 군대가 고작 1~2만을 전쟁에 파견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물론 홍건족들과 전쟁중이라고 해도 한 나라의 도성을 정벌하는 군대를 그정도의 소수의 병력만 파견한다는 것은 너무 비상식적인 일이다.

전쟁을 하자는 건지 단지, 겁만 주고자하는 건지 ----

 

기황후가 제1황후가 되어 원나라의 실권자가 되고 난후에 고려에게 유익한 부분도 있었다.

고려의 가장 큰 시련이었던 공녀제도가 사라진 것과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삶고자했던 원나라조정의 계획도 완전히 없어졌다.

충렬왕때부터 시작되어 무려 80년간 이어온 공녀제도가 기황후의 결단으로 없어진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황후가 되고난 후 자신의 과거의 불행했던 전철을 고려의 여인들에게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하겠다는 기황후의 결단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다.

 

기황후 초상화

 

1364년 기황후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의 황제계승 문제로 인해서 원나라에서 반대파와 지지파들간의 내전이 발생하였고 이 내전에서 기황후 지지파들이 승리하고 난 후 홍건적들이 반란이 일어나게 되면서 원나라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이렇게 원나라의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가는 와중에 주원장이 한족세력들을 규합해서 명나라를 세우고 난 후 몽골족의 원나라와 한족의 명나라간 전쟁이 벌어진다. 이미 군사력이 많이 약화되어있던 원나라는 명나라군사에 밀리어 결국 1368년에 수도 대도가 함락되고 기황후를 비롯한 원나라 황실은 북쪽으로 피신하고 만다.

 

명나라에 패한 원나라는 북쪽 응창부로 수도를 옮기고 원나라황실은 피신하였는데 그와중에 순제는 사망하고 기황후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는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우리나라 야사에는 기황후의 묘가 연천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과연 원래 고려출신이었던 기황후가 원나라가 북쪽땅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조국이었던 고려로 되돌아온 것일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아들이 북쪽땅으로 이주한 북원에서 왕이 되었는데도 기황후가 꼭 고려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원나라 공녀로 끌려가 원치도 않았던 당시의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처세를 잘 해서 황후자리까지 올라갔던 기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혹자는 원나라를 패망으로 이끌었던 요부라고도 하고 혹자는 공녀라는 최하위 신분에서 여성의 최고위직인 황후가 된 입지전적인 여장부라고 한다.

 

또한 기황후가 당시 고려에 대한 정책에 있어서도 엇갈린 평가가 나온다.

기황후가 고려에 심한 내정간섭을 하였던 해악을 끼친 인물이라는 퍙가와 기황후로 인해서 고려에 대한 무리한 공물이나 공녀 요구가 사라진 점과 고려의 자주성이 더 강화되었던 시기와 기황후 통치 시기가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기황후가 오히려 고려에 유리한 정책을 추구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분명한 것은 기황후가 탄생한 것은 원래 기황후가 스스로 선택한 길은 아니라는 것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나은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점이다.

나라의 힘이 약해서 한 여린 여인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던져버린 셈이다.

 

그리고 해가 되든 이익이 되든 당시 기황후가 선택한 길과 행적은 기황후가 어쩔 수 없이 그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는 것과 기황후는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점이다.

그시대의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안위와 권력유지를 위해서 희생양으로 탄생시킨 시대의 모순된 현상을 단순히 한 여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인가?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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