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저널’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위관 정철의 진압

- 정여립, 기축옥사 그리고 죽도 -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과 기축옥사


1589년 선조때 발생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무려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던 조선시대 최대의 역모사건인데 그 모반사건의 주모자인 정여립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리고 그가 정말로 반역을 일으켰던 것인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조 23년에 발생했던 희대의 모반사건인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인해서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 뿐만 아니라 정여립이 속해있던 죄없는 동인세력까지 포함해서 무려 1,000명 넘는 사람들이 희생된 기축옥사는 극악무도했던 폭군 연산군이 일으켰던 4대사회 당시 죽은 500명보다도 훨씬 많은 엄청나 피바람이 불었던 조선 최대규모의 숙청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면 기축옥사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정여립은 누구인가?

정여립은 원래 첨정벼슬을 하고 있던 아버지 희증의 아들로 전주지역의 사대부가문 출신이었다. 정여립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출중하였는데 특히 명석한 두뇌를 바탕으로 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화술이 뛰어났던 달변가이자 이론가이기도 했다.


정여립은 경사와 제자백가에 능통하였는데 선조 3년에 과거시험에 급제함으로써 중앙관리에 진출하였다. 그 후 정여립은 이이를 존경하였으며 이이가 속해있는 서인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의 총명과 학문의 능통함을 높이 샀던 이이와 성혼의 총애를 받기도 했으며 홍문관 수찬의 벼슬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고위직까지 올라갔던 정여립은 그의 과격한 성격과 급진적인 비판의식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홍문관 수찬의 벼슬로 상승했던 정여립은 그의 옛날 스승이었던 이이와 같은 서인인 성혼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정여립의 이율적인 행동은 정여립이 이즈음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을 바꾸면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정여립의 이이와 성흔 흠집내기는 커다른 역풍을 맞게 되는데 세상의 이목은 자신의 과거의 스승을 욕되게 한 정여립을 가만놔두지 않는다. 그시대가 의리와 대의명분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던 유교주의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후 정여립은 서인의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선조의 눈밖에까지 나게 되었다. 어느새 동인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어있었던 정여립은 결국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되었고 진안군 죽도에 근거지를 마련한 정여립은 그곳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놓고 또한번의 파란을 불러일으킨다.


평소에 세간의 비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대쪽같은 성품을 지녔던 정여립은 자신의 본거지인 죽도에서 추종자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는데 정여립이 설립한 대동계는 신분의 상하나 양반, 평민, 천민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가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게 했으며 보름마다 향사례를 행한다는 구실로 학문과 무예를 연마시켰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대동계에서 추종자들을 모아놓고 정여립이 행한 파격적인 주장과 발언이다. 정여립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선진적인 평등사상으로서 당시의 상황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급진적 사상이었다.


정여립은 종종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들은 백성들의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는데 정여립이 꿈꾸웠던 것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었으며 지금의 가치로 보면 정여립은 16세기 조선의 최고의 사상가였으며 혁명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현대적인 평가일뿐이며 당시 양반과 평민, 천민의 구별이 엄격했던 계급중심의 사회에서 사대부 지배세력에게는 하나의 도전장이나 다름없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정여릷이 근거지로 삼았던 진안군 죽도


조선시대의 반상의 법도와 신분이 엄격히 구분되던 사회에서 정여립은 감히 양반이나 평민, 천민의 평등을 주장하였으니 그는 확실히 시대를 앞서 태어난 천재였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같은 정여립의 평등박애사상이 그 당시 엄격한 계급사회의 권력을 쥐고 있던 양반사대부들에게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결국 정여립은 정적이었던 서인들의 상소로 인해 선조의 귀에 역모사건으로 과대포장되어 들어가게 되었고 정여립은 역모의 주동자로 수배령이 내려졌으며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은 졸지에 반역도당으로 몰려 관군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관군에게 쫒겨가던 정여립은 진안의 죽도로 피신하였지만 결국 관군에게 붙잡혀 항변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피살되었다. 또다른 이야기는 정여립이 관군에게 수배령이 내려진 후 이미 자결하였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정여립이 피살되었든, 자결하였든지 간에 정여립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사체는 도성으로 운반되어 다시한번 능지처참에 처해졌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모반죄는 능지처참으로 다스려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정여립이 죽은 후에도 그가 활동했던 진안군 일대에서는 정여립이 계속 목격되었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의 혼령이 계속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못다한 말들을 하곤 사라지곤 하였다는 것이다.


정여립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급진적인 혁명사상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상당히 민주적인 사상이었으며 후세의 사상가들에게 상당한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임금)이 있겠느냐고 주장했던 그의 천하공물설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 윤리를 완전히 뒤집어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죽여도 가하고, 인의가 부족한 지아비는 버려도 된다’고 하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펴기도 했다. 철저한 계급 중심의 왕조시대에 그 근본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이러한 정여립의 사상은 참으로 혁명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으며 정여립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졍여립의 이러한 평등사상은 나중에 동학혁명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정여립이 주장했던 대동사상의 핵심은 지금의 공화제 정치를 뜻하는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데 지금의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영국의 청교도혁명에서 공화제가 처음 선포되었는데 그 시기가 1649년도인데 반해 정여립이 공화제를 주장했던 시기인 1589년은 서양보다도 60년이나 앞선 시기였음을 보더라도 정여립의 사상이 얼마나 선진적이었으며 민주적이었고 시대를 훨씬 앞서 나갔던 대단한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선조와 양반사대부세력에게는 정여립의 이같은 급진사상이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역모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당시 송강 정철은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추궁하는 기축옥사 때에 위관으로 임명되어 역모 관련자를 잡아들이는 주역을 맡았다.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주옥같은 가사문학을 많이 남겨 국문학사에 혁혁한 성과를 남겼던 시가의 귀재, 정철이 정여립 모반사건의 관련자들을 참살하는 위관역할을 하였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철은 사실 조선왕실과 인척관계에 맺고 있었던 인물이었는데 정철의 누이가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이어서 정철은 조선왕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정철은 서인 출신이어서 그당시 서인과 동인이 권력을 놓고 첨예하게 암투를 벌이던 시기여서 서인세력이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삼아서 정여립의 잔당척결을 그가 속한 동인세력까지 엮어 넣어 동인세력의 씨를 말려버린다.



정여립 모반사건 잔당처분이라는 기축옥사는 3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친교가 있었거나 동인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처형하는 대학살극이 자행되었다. 이 당시 단지 정여립과 편지 한 장 주고받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서인들은 정여립사건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무능했던 군주 선조는 이러한 서인출신 대신들의 충성경쟁을 즐기면서 또한 조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무고한 수많은 인재들을 대거 참살한 대가로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정작 나라를 지킬 유능한 대신들은 사라져버려 왜군들에게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는 비참한 결과로 귀속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인과응보인 것이다.


자신의 신하와 유능한 선비들 천여 명이나 학살한 선조는 왜군들이 쳐들어오자 저만 살겠다고 백성들을 버리고 체통도 없이 압록강 국경지역 의주까지 줄행랑을 쳐버리고 만다.

수많은 죄없는 신하와 선비를 학살한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대가를 치르고 되었는데 결국 외세(명나라)를 끌어들여 전쟁 발발 7년 만에 간신히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는데 조선의 모든 것은 파괴되어 버린 후였다.


그렇다면 정여립의 사건은 정말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데 정여립이 반란을 획책했다고 하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단지 정여립의 상당히 급진적인 이념과 혁명적 사상이 역모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는 정여립 모반사건이 사실상 서인들에 의해서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즉, 기축옥사는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이의 죽음을 계기로 동인들의 손으로 넘어간 정국의 주도권을 일거에 만회하기 위해 서인측에서 변절자인 정여립의 의심스런 사상과 행동을 꼬투리 잡아서 역모사건으로 둔갑시켰다는 징후가 농후한 사건이다.









Posted by 프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