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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전’ 이휘소박사 핵개발 시도, 천재 핵물리학자 이휘소와 박정희, 핵개발 기밀문서 전달




7월 10일 JTBC의 ‘'독한 혀들의 전쟁-썰전’에서는 매우 이채로운 주제를 다루어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바로 한국의 핵개발 시도에 관여했던 이휘소박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날 토론에 참석한 이철희소장의 발언에 의하면 박정희 전대통령이 당시 미국에서 핵물리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휘소박사를 한국으로 귀국시키기 위해 비밀제의를 했던 것과 이휘소박사가 박 전대통령에게 핵관련 기밀문서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일이 있은 직후에 이휘소박사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이휘소박사의 사망은 미국의 짓이라는 게 지배적이었다고 말했다.



MC 김구라의 ‘우리나라가 1979년 핵개발을 88%이상 완료했다는데, 거의 다 했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강용석변호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때인 1978년 홍성에서 규모 5.0 지진이 났는데, 당시 핵실험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의혹이 있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파키스탄에서 ‘핵의 아버지’라고 존경을 받고있는 압둘 아디르 칸 박사는 ‘이휘소박사는 현대물리학의 발전을 10년이나 앞당긴 천재라고 칭송한 바 있다고 한다.


공석하의『소설 이휘소』, 김진명의『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책에서는 이휘소박사의 행적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70년대 후반 당시 이휘소박사가 박정희 전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한국에 핵개발의 시도에 도움을 주었으며 이과정에서 이휘소박사는 미국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미국CIA의 사주로 인한 교통사고로 위장한 트럭충돌사고로 사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70년대 한국이 낳은 천재 핵물리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이휘소박사의 핵개발 관련 활동과 그의 죽음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이휘소 관련 책에서는 이휘소박사가 한국의 핵개발시도에 기여를 했다고 나오지만 이휘소박사의 가족이나 제자는 이휘소박사의 핵개발 기여를 부정하고 있다.


이휘소박사는 서울대공대를 수석 입학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애미대학을 수석 졸업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천재라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또한 이휘소박사는 펜실베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펜실베니아대학의 정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했다.


이휘소 박사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세계 입자물리학계의 최고권위자로 부상하였고 20년간 모두 110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현대 핵물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그가 77년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을 거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상태다.



그가 제시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시켰으며 그의 연구결과는 다른 여러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와인버그, 살람(1979년), 트후프트,벨트만(1999년), 그로쓰, 윌첵, 폴리터(2004년) 등이 노벨상을 수상하게 했다.


일부학계에서는 이휘소박사가 이뤄낸 업적이 아인슈타인 못지않게 크다고 하며 이휘소박사는 아인슈타인박사보다 더 위대한 천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지만 이휘소의 능력은 이미 그 위에 있었다. 이휘소는 까다롭고 지루한 계산을 끝까지 파고드는 유일한 학자이다. 

그는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이며 핵과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이나 페르미보다 이미 앞서있는 창조적 지도자다’ - 오펜하이머 -


이휘소박사가 활동했던 70년대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수상자들이 이휘소박사의 이론에서 영감을 얻고 그의 이론을 도용해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실상 70년대 노벨물리학상의 진짜 주인공은 바로 이휘소박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휘소박사에게는 한가지 고민을 떠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의 박정희대통령의 친서 때문이었다.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은 이휘소박사의 명성을 알고 있었으며 이휘소박사에게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 도움을 요청했으며 한국에 귀국해 달라는 친서를 여러번 보내기도 했다.


70년대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미국과 매우 불편한 관계에 처하고 있었는데 박 전대통령의 유신체제로 인한 독재정치와 인권탄압 문제로 인해서 미국의 카터대통령과 대립관계에 놓여져 있었으며 박 전대통령의 독재정치에 불만을 가진 미국은 마침내 주한미군 철수라는 카드를 내세워서 박 전대통령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실제로 주한미군 1만7천여명이 철수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고립상태와 미군철수로 한반도 국방과 안보의 위기상황에 직면한 박대통령은 핵무기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박 전대통령은 당시 세계적인 핵입자물리학자로서 최고 권위를 가졌던 한국인 출신의 이휘소박사에게 핵관련 개발사업의 도움을 원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있는 ‘월간조선’과 ‘신동아’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과 이휘소박사가 핵개발 부문에서 소통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휘소박사가 한국에 와서 박 전대통령을 만났던 것 또한 사실로 받아들일만 한 여러 가지 정황들이 존재하고 있다.


70년대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두차례에 걸쳐서 미국에 있는 이휘소박사에게 천필서신을 보냈으며 그 서신에는 미군의 철수와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박 전대통령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실려 있었으며 이휘소박사에게 간곡하게 귀국을 요청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1974년 공무 수행차 잠시 한국을 방문했던 이휘소박사를 박정희 전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해서 만나기도 했는데 그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의 국가안보를 위한 협력요청에 대해 이휘소박사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박정희 전대통령의 거듭된 친필서신과 간곡한 요청으로 인해 이휘소박사는 결국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고 77년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전대통령을 비밀리에 만나게 된다.


1977년 5월 20일 이휘소박사는 세미나참석차 일본 도쿄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밤에 비밀리에 한국에 다녀갔다는 것이다. 이 때에 이휘소박사가 청와대에서 박 전대통령을 만나 핵개발 관련 제조원리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1달 뒤에 이휘소박사는 미국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즉, 이휘소박사가 한국에 미사일 및 핵 제조원리를 넘겨주고 난 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휘소박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 시점이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휘소박사가 일본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간 시점이 1977년 5월 20일이었고 - 이날 이휘소박사는 한국에 몰래 다녀온다 - 이희소박사가 미국 일리노이주 고속도로에서 트럭과 충돌해서 사망한 시점이 같은 해 6월 16일로서 불과 한달도 안되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이휘소박사의 일본방문 및 한국방문과 그의 죽음이 상당한 인과관계를 갖는다고 추청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77년 6월 16일 이휘소박사는 세미나 참석을 위해 가족을 동반하고 자가용을 몰고 집을 나섰으며 일리노이주의 케와네시 근처 고속도로에 들어섰을 때 느닷없이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대형 유조트럭이 중앙선을 넘어서 이휘소의 자동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자동차는 처참하게 부서졌으며 이희소박사는 사망했고 그의 가족은 다행히도 부상만 입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것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천재 핵물리학자 이휘소박사의 사망과 관련된 핵심내용이다. 


이휘소박사가 실제로 한국 핵무기개발에 도움을 주었는지, 그리고 이휘소박사의 죽음은 미국에서 사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논란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박정희 전대통령이 핵무기개발을 추진했을 당시에 ‘핵무기 기술개발 관련 핵심문서’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 핵개발 기밀문서는 박 전대통령의 개인금고에 보관해오고 있다가 박 전대통령의 서거 후에 최규하 전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5·17사태이후 전두한 신군부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두한 전대통령은 쿠테타로 대통령에 집권한 이후 미국의 추인을 받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이 핵개발기밀문서를 당시 레이건 전대통령에게 상납함으로서 미국으로부터 정식 대통령으로 추인받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두한이 핵무기 설계도와 대통령직을 교환했던 셈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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