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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영화 ‘정무문’ 동영상 / 하이라이트 영상

 

 


 

1970년대 가장 유명한 홍콩 무술액션영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무술스타가 한사람 있지요.

물론 왕우도 유명했고 또한 성룡도 있고요. 그 외 로례(나열)도 그당시 꽤 유명했었죠. 그렇지만 지금 열거한 무술스타들의 액션만으로는 뭔가 2% 정도 부족함을 느끼는 이유는 왜일까요?

 

 

 

 

 

70년대에 왕우나 로례, 성룡등도 그시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무술스타인 것은 사실이지요. 그렇지만 이들이 무술영화에서 보여주는 무술액션은 세련미가 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요. 실제 무술을 한다기보다는 연기하는 차원에서의 무술로 보여지기 때문에 그들의 무술액션은 관람객들의 갈증을 해소시키기엔 뭔가 부족함이 있었죠.

그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속시원히 해소시켜주는 뛰어난 무술스타가 출연하게 되는데 바로 이소룡이라는 무술배우랍니다.

 

 

이소룡은 특유의 박진감 넘치고 세련된 무술연기를 통해서 세계의 수많은 관객들의 갈증을 속시원히 해소시켜주었고 당시 무미건조했던 무술영화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무술영화계의 레전드랍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홍콩무술무협영화는 무술액션에 있어서 사실감이 떨어지고 느린 템포에 주로 권법 즉, 주먹위주의 액션이 반영된 획일화된 영화가 대부분이었지요. 그 당시 왕우나 로례(나열)같은 무술액션스탸들이 꽤 활동했지만 검술영화에서 주먹권법영화로 패러다임이 바꿔져가는 시점에서 왕우나 로례같은 배우들은 관람객들의 욕구를 속시원히 해결해주지 못함으로써 홍콩무술영화의 붐이 시들어갈 시점에 갑자기 나타난 이소룡의 영화계진출로 무술영화의 붐과 흥행을 크게 끌어올리게 되었고 이소룡에 의해서 붐을 타게 된 무술액션영화는 80년대 중반까지 큰 인기있는 영화장르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죠.

 

 

이처럼 이소룡의 뛰어난 무술액션연기로 인해 높은 인기와 붐을 끌게된 무술영화는 이소룡의 사후에도 멈추지 않고 10여년 간 한국과 아시아, 유럽까지도 인기 영화장르의 하나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포스트이소룡을 자처하는 수많은 무술스타들이 이소룡의 뒤를 따라 무술영화계에 우후죽순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한용철이나 바비김, 왕호 등의 무술스타들도 이소룡붐을 타고 탄생된 무술스타들이지요.

이들은 이소룡이 아니었다면 태권도장의 평범한 사범으로 만족해야 했을 무도가들이었는데 이소룡 덕분에 무술스타라는 국제적인 지위를 얻고 한동안 한국영화계에 군림하게 되었으니 이소룡에게 특히 감사해야 할 무술배우들이죠.

 

 

이처럼 무술영화의 흥행을 열어 제꼈던 이소룡은 자신이 붐을 일으켰고 흥행을 성공시켰던 무술영화계에서 그 결실을 별로 수확해보지도 못하고 2년만에 사망하게 되는 비운의 스타가 되고 말지요.

하늘은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먼저 데려가는 관행이 있는가 봅니다. 이소룡도 그랬고 그당시 유명한 할리우드스타였던 제임스 딘도 먼저 데려갔죠.

 

 

 

 

이소룡은 홍콩사람이지만 18세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에서 워싱턴 주립대학을 다녔고 미국여성 린다 에머리와 결혼하여 미국 시애틀에 쿵푸도장(절권도장)을 열고 오랫동안 무술을 연마하였지요.

 

 

이소룡은 미국에서 한 제자의 소개로 미국 TV드라마 그린호넷트와 롱스트리트에 출연하였지만 비중이 떨어지는 단역에 그쳐 본격적인 영화활동을 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홍콩으로 돌아와 골든하베스트에 전속배우로 들어갑니다. 미국에서는 동양인이라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골든하베스트사의 추문회(레이몬드 초우)사장은 그린호넷트에 출연한 이소룡의 뛰어난 무술연기를 보고 장차 무술배우로서의 성공가치를 예견하고 이소룡을 주연으로 발탁하는 파격적인 계약을 맻지요.

 

 

이렇게 골든하베스트사에 전격 영입된 이소룡은 1971년 그의 첫작품 ‘당산대형’을 촬영해서 홍콩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며 무술스타로 신고식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되지요.

 

 

첫작품 ‘당산대형’이 이소룡의 이름을 홍콩에 알렸다면 이소룡의 이름을 아시아에 널리 알렸던 영화는 그의 두 번째 작품인 ‘정무문’이었지요.

1972년 초에 촬영된 ‘정무문’은 이소룡을 아시아의 무술스타로서 급부상시킨 이소룡의 히트작이자 대표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정말 유명했던 영화지요.

 

 

 

작품의 내용으로 보나 구성면에서 보나 무술연기로서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연출기법에 있어서도 이소룡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손꼽히는 영화가 바로 ‘정무문’이랍니다.

이소룡이 출연한 ‘정무문’은 홍콩의 흥행기록을 또한번 갈아치웠고 홍콩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한국, 일본등지에서도 흥행에 대성공합니다.

특히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의 흥행성공으로 인해서 그 당시 막 설립되었던 영세영화사인 골든하베스트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키포인트이지요.

 

 

 

 

골든하베스트

이소룡을 스카웃했던 골든하베스트는 71년 당시에는 자본력이 아주 취약한 신생영화사였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70년 초에 홍콩에서 가장 큰 영화사는 쇼브라더스사였으며 이 영화사가 엄청난 자본력을 바탕으로 홍콩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영화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 틈바구니의 작은 틈새에서 신생영화사였던 골든하베스트는 소속배우들에게 개런티도 선지급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사후지급이라는 편법을 써서 간신히 영화를 찍었던 작은 영화사였답니다.

그당시 골든하베스트사에 소속되어 있던 왕우도 개런티를 받지 못한 채로 영화를 찍었었다고 합니다. 왕우가 2008년경 한국에 왔을 때 기자에게 직접 한 말이랍니다.

 

 

 

 

즉, 영화를 개봉하고 난 후 그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그 흥행수입으로 개런티를 사후에 배분해주는 것이지요. 물론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면 개런티를 한푼도 못받는 것이지요.

이소룡도 당산대형을 찍을 때는 이러한 열악한 조건으로 계약을 했던 것인데 이소룡의 영화들이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니까 골든하베스트는 대박을 건지게 된 것이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골든하베스트사는 개천에서 용을 건진 셈이었고 이소룡으로 인해서 대형영화사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럼 잠깐 이소룡의 최고의 히트작품 ‘정무문’의 하이라이트 동영상을 보고난후 다음 이야기를 계속 하도록 하죠! 영화 '정무문'에서 이소룡의 무술액션 장면만을 모았습니다.

즐감하세요!

 

 

이소룡의 ‘정무문’ 하이라이트영상 (18분)

 

 

 

 

 

 

 

 

 

 

 

 

 

 

 

 

 

 

 

 

♣ 이소룡의 히트작 ‘정무문’

 

이소룡이 최고의 히트작인 ‘정무문’이 가장 인상에 남는 이소룡영화였지요.

‘정무문’에서는 이소룡의 화려한 발차기 무술연기가 불을 뿜습니다. 자신의 스승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일본유도도장에 혈혈단신으로 쳐들어간 이소룡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무술의 정수를 다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무문에서의 이소룡의 무술연기는 정말 화려하였고 세련미가 있으며 예술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멋있었지요.

 

 

 

 

특히 날렵하고 절도있는 이소룡의 발차기는 한마디로 환상적이라고 할 만 하지요.

또한 정무문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라스트씬이지요.

정무문의 후반부 이소룡이 자신의 스승 살해의 사주범인 일본 유도관장과의 일대일 대결, 그리고 러시아무술고단자와의 맞대결은 이소룡의 살아있는 무술연기의 정수를 보여줌으로써 많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하게 되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무술의 한계점을 뛰어넘는 무술연기를 보여줌으로써 ‘정무문’영화를 예술적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던 이소룡의 이 위대한 걸작은 72년에 제작되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장 인기있는, 가장 많이 시청한 영화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

이소룡은 총 4편의 영화에 출연하였고 미완성 작품인 ‘사망유희’ 촬영 진행중에 의문의 병으로 사망하게 되었지요.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네요.

딴 사람도 아니고 하필 100년에 한번 나오기도 힘든 무술스타 이소룡이 이렇게 일찍 사망했다니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이소룡이 사망 직전 30% 정도 완성시킨 그의 마지막 영화 ‘사망유희’가 주인의 완성을 애타게 기다리는 와중에 가장 뛰어난 영화가 될 뻔했던 ‘사망유희’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이소룡이 죽었다는 것은 홍콩영화사에 아니, 세계영화사에 가장 큰 아쉬움이었다고 볼 수 있지요.

 

 

‘사망유희’의 라스트신 40분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말 ‘사망유희’는 상당히 뛰어난

걸작품입니다.

이소룡 영화가 대부분 다 뛰어나지만 특히 정무문과 더불어 ‘사망유희’가 완성만 되었더라면 이소룡영화 중 최고의 걸작이 될 뻔했던 영화랍니다.

라스트신만 제한적으로 보았지만 ‘사망유희’에서 보여준 이소룡의 무술액션은 고난도무술의 화려함과 흥미로움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장면들이었지요.

 

 

특히 완숙의 경지에 이른 이소룡의 좀 더 완전하고 성숙된 연기력도 볼 수 있으며 5층목탑에서의 세계각지에서 온 무술고단자들과의 대결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와 흥미로움을 주고 있으며 예술적이기까지한 쌍절권연기와 이소룡의 화려한 발차기, 그리고 다양한 절권도기술까지 선보이고 있어서 ‘사망유희’는 정말 온통 볼거리 천지랍니다.

 

 

 

 

 

 

♣ 이소룡의 사망이유

이소룡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많이 나돌고 있지만 결정적인 죽음의 이유는 평소에 앓고 있던 뇌종양이 근본원인으로 하여 진통제 복용으로 인한 뇌부종 발생이 직접 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홍콩의학계에서 밝힌 공식적인 발표에 근거한 사망원인이지요.

 

 

이소룡이 사망 직전 구룡반도에 있는 그의 애인이었던 정패(베티 팅패이)의 맨션에서 정패가 준 진통제 에콰제(아스피린 비슷한 약)를 먹고 의식을 잃었으며 병원으로 옮긴 후 사망하게 되었지요.

1973년 7월 20일 밤 10시경이었지요. 이소룡의 사망이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혹을 갖고 있으며 이소룡이 죽은 이유는 공식발표인 뇌부종이 아닌 타살설이라는 등 온갖 루머들이 한창 나돌았었던 것도 사실이지요.

 

 

골든하베스트의 경쟁사인 쇼브라더즈사가 고용한 킬러에 의한 살해라든가 이소룡 소속사인 골든하베스트사의 추문회(레이몬드 초우)사장과의 불화와 갈등으로 인해 암살당했다고 하는 여러 가지 루머가 돌았고요.

또한 이소룡의 애인이었던 정패가 삼각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이소룡을 독살했다고까지 하는 소문도 돌았었지요.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여러 가지 소문들과 억측들이 확산되자 나중에 이소룡의 부인 린다 에머리가 이소룡 죽음의 원인으로 기자에게 직접 밝힌 내용은 이소룡은 평소에 앓고 있던 뇌종양이 근본원인이었고 거기에다가 두통 때문에 먹은 진통제 에콰제가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갑자기 발생한 뇌부종(뇌가 터져 피가 나오는 현상)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이소룡의 영화파트너이자 영원한 친구 묘가수

 

 

이소룡이 사망할 당시 이소룡에게 진통제를 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이소룡의 사망의 주범으로 누명을 쓰기도 했던 애인 정패는 너무나 억울하고 괴로워서 10년 동안 절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90년대 초반에 절로 들어가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로 절에서 10년간 은둔생활을 하고 하산한 정패는 2000년대 초반 이소룡 사망 30주년 행사 때에 초최해진 모습으로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이소룡의 '정무문' 스틸 사진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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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영화의 전설적인 영웅 이소룡의 영화와 사망원인

 

 

 

71년 홍콩 영화계에 ‘당산대형’이란 영화와 함께 혜성처럼 나타나서 무술영화로는 최대의 흥행을 기록하며 무술액션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면서 전세계의 팬들에게 감동과 존경을 받았던 이소룡은 최고의 무술영화배우로서 스타덤에 오른 지 2년 만에 사망하면서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아쉬움을 남겼던 70년대 전설과도 같은 무술스타였다.

 

 

 

 

이소룡(李小龍)이라는 이름 자체가 상당히 친근감있게 다가오는 그는 영어식 이름 부루스 리(Bruce Lee)로도 잘 알려져 있고 영화배우로서 그리고 무술인으로서 그가 남긴 족적은 너무나도 크고 화려해서 70년대 무술영화라고 하면 제일 먼저 기억나는 이름이 바로 이소룡이다.

70년대 뿐만아니라 20세기를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무술영화배우이자 무술인이라고 할 정도로 위대한 족적을 남긴 그의 영화와 무술은 대단히 센세이셔널하고 탁월했다.

이소룡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이란 마치 다른 세계에 와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었고 환상적이었으며 내게는 엄청난 센세이션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이것은 나만의 느낌이 아니라 이소룡의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의 느낌이었을 것이다.

 

‘당산대형’에 이어 ‘정무문’ ‘맹룡과강’ 그리고 ‘용쟁호투’에 계속 출연한 이소룡은 그의 영화에서 보여준 뛰어난 표정연기와 발차기액션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환상적이고 뛰어나서 전세계의 수많은 관객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으며 관객들을 환상의 유토피아 세계로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을 발휘했다.

 

 

이소룡의 생전 얼마 되지 않은 그의 영화들을 통해 이소룡은 그가 수련한 무술을 영화에 접목시켜 한차원 높은 무술액션영화를 창조해냈으며 무술영화를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리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래서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들은 한결같이 흥행에 대성공했고 그가 죽은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전세계 수많은 팬들의 가슴에 감동과 존경의 대상으로, 영원한 영웅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지금도 이소룡이 잠들어있는 시애틀의 레이크뷰 공동묘지의 그의 비석에는 수많은 조문객들의 방문이 끊기지 않고 있다고 한다.

동양의 자그마한 체구의 평범하게 생긴 젊은이가 약 3년간의 짧은 활약으로 인해 20세기의 최고의 이벤트와 센세이션을 만들어냈고 20세기 최고의 히어로로 40년 넘게 그의 전설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소룡은 1940년에 출생하였으며 1973년에 사망했으니 그는 만 32세(우리나이 34세)에 요절했는데 그의 인생은 너무나 짧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너무나도 크고 화려하다.

이제 이글의 주제인 이소룡의 죽음에 대해서 포스팅하고자 한다.

 

 

먼저 이소룡이 사망 직전에 그에게서 나타났던 증상이나 그의 행동들을 보면 그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추론할 수 있는 근거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소룡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나 가설들이 많이 난무하고 있다. 이소룡은 1973년 7월 20일 밤 10시반 경 그의 애인인 여배우 정패(베티 팅패이)의 구룡 고급맨션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곧바로 구룡반도 퀸 엘리자베스 병원에 후송되어 응급실에 도착한 이소룡은 이미 맥박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 때의 시각은 약 11시 정도였다고 한다. 의사들은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며 그에게 강심제를 투여해보았지만 맥박이 정지되어 있던 이소룡은 결코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소룡은 1973년 7월 20일 오후 10시 반에서 11시 사이에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소룡이 죽은 그날 밤 12시경에 추문회(레이몬드 초우)와 이소룡의 부인 린다에 의해 이소룡이 죽었다고 발표되었는데 그럼 이소룡의 사망원인은 무엇인가?

이소룡은 사망한 날인 7월 20일 그의 공식 애인이었던 여배우 정패(베티 팅패이)의 맨션에 함께 있었는데 이소룡이 두통을 호소하자 정패가 준 진통제인 에콰제(아스피린과 브로바린을 배합한 평범한 약품)를 먹고 난 후 침대에서 쓰러졌다고 한다.

이소룡이 먹은 에콰제(아스피린과 브로바린을 배합한 평범한 약품)는 흔히 먹는 진통제로서 이 약이 죽음의 직접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분명히 이소룡이 죽은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소룡의 사망에 대해서는 죽음 당시부터 여러 가지 루머들이 많이 난무하고 있고 지금까지도 상당한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1. 이소룡을 스카우트하길 원했던 경쟁 영화사 쇼 브라더스(소씨형제공사)에서 사주한 청부업자가 살해했다

2. 이소룡의 애인인 정패가 삼각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이소룡을 독살했다

3. 소속영화사 사장인 추문회(레이몬드 초우)가 이소룡과의 갈등때문에 암살했다

4. 이소룡이 두통 때문에 복용했던 마약(마리화나) 중독으로 사망했거나 근육이완제 부작용 때문에 사망했다 전기 충격 요법 때문에 사망했다

5. 홍콩 갱단의 협력을 거부해 갱단에게 보복 암살당했다

 

 

 

위와 같이 이소룡 사망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들이 많은데 이 루머들이 타당한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 경쟁영화사인 쇼 브라더스가 사주한 청부업자가 살해했다고 하는데 이소룡의 소속 영화사는 골든하베스트사(가화전영)이다.

71년 이소룡을 스카우트했던 골든하베스트사(가화전영)는 당시 신생 영화사인데 추문회(레이몬드 초우)가 대표로 있으며 그 당시에는 신생영화사라서 자본사정이 매우 열악했으며 이소룡도 처음에는 적은 게런트를 받고 영화에 출연했었다. 반면 쇼브라더스(소씨형제공사)는 자본이 어마어마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사이며 60·70년대에 수많은 무협검술영화들을 제작하고 흥행에 성공했던 홍콩 최대의 영화사이다. ‘왕우’ ‘로례(나열)’ ‘리칭’ ‘정패패’같은 인기 스타들을 배출했던 그 당시 가장 잘 나가는 홍콩 영화사이다.

 

이소룡이 영화배우로 성공하기 되기 위해 70년에 미국에서 홍콩으로 왔을 때 제일 먼저 문을 두드린 영화사가 바로 쇼브라더스(소씨형제공사)였는데 이소룡은 보기좋게 스카우트를 거절당한다. 왜냐하면 당시 이소룡은 무명이었고 나이도 30대로 많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수많은 흥행작들을 만들어왔고 또한 수많은 스타들을 많이 배출해왔던 쇼브라더스는 이소룡에게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들어가길 갈망했던 꿈의 영화사이었는데 보기좋게 거절당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소룡은 그 대타로 71년에 골든하베스트를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영화사로 선택한 것이고 이소룡의 미국 TV시리즈에서 이소룡의 무술액션을 본 골든하베스트 사장 추문회(레이몬드 초우)는 흔쾌히 이소룡을 받아들였다.

나이 많고 볼품없다고 거절한 쇼브라더스(소씨형제공사)사가 이소룡이 ‘당산대형’ ‘정무문’ 등으로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니까 다시 영입할 욕심이 났고 그래서 이소룡에게 영입 제의를 했지만 이소룡이 거절하니까 경쟁관계에 있던 골든 하베스트사가 더욱 커질까봐 두려워 이소룡을 해결사를 고용해서 죽였다는 것인데 일견 타당한 측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당시 홍콩 뿐아니라 아시아에서 최대 규모의 자본력과 흥행력을 갖춘 쇼브라더즈사는 이미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홍콩 영화시장을 싹쓸이하고 있었고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에도 자신들이 제작한 영화들을 성공리에 수출하면서 엄청난 흥행수익을 벌어들이고 있었는데 자신보다 휠씬 작고 열약했던 골든하베스트가 이소룡이라는 메카톤급 영웅을 만나 자신들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으니 더욱이 자신들의 수많은 팬들을 빼앗아가고 있으니 오랫동안 누려온 독점적 지위와 이익을 나누고 싶지 않은 쇼브라더즈사에서 암살이라는 초강수를 써서 장래의 위협세력이될 골든하베스트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히고자 했을 수도 있겠다. 더욱이 쇼브라더스사는 홍콩에서 엄청난 자본력을 갖추고 있었고 정치적인 백그라운드도 상당히 좋다.

 

그런데 다시한번 생각해보면 약간의 허점이 발견된다. 이소룡은 무명시절 이미 쇼브라더스의 문을 두드렸었고 쇼브라더스는 이소룡을 문전박대하지 않았던가!

나이, 외모 등 자신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이소룡을 문전박대해놓고 그가 다른 영화사에서 성공하자 다시 영입할 욕심이 났고 영입을 거절했다고 암살했다는 것은 그간 20여 년간 쇼브라더스가 쌓아온 명성과 명예 그리고 엄청난 부 등을 미루어 보건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듯 싶다. 굳이 이소룡이 아니어도 쇼브라더스사에는 수많은 걸출한 스타들이 비일비재하며 자신들의 풍부한 자본력으로 얼마든지 많은 흥행작들을 계속 만들어낼 수가 있고 과거에 성공했던 전례가 얼마든지 있는데 살인청부라는 위험한 모험을 감행할 정도로 그런 개념없는 영화사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쇼브라더스사는 70년대 후반 영화사 외에도 TVB라는 방송사를 별도로 만들어서 또한번 신화를 이룩한 영화사가 아닌가?

그런 홍콩에서 제일 잘 나가는 영화사이자 흥행사인 쇼브라더스사에서 개념없는 암살청탁을 했을 가능성은 좀 희박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약간의 개연성(30%정도)을 조금 있다고도 할 수 있다.

 

 

3번 이소룡 소속영화사인 골든하베스트사 대표인 추문회(레이몬드 초우)가 이소룡과의 갈등으로 인해서 이소룡을 암살했다는 것은 지나친 추론이라고 생각한다. 이소룡이 들어오기 전의 골든하베스트는 완전 무명 영화사였었는데 자본력도 거의 전무한 상태였었고 더욱이 이제 막 신설된 신생영화사(70년)로서 스타급 배우의 부재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소룡을 스카웃하고 나서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로 대박을 터뜨렸고 상당한 흥행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이소룡의 뛰어난 연기로 인해 이제 막 돈방석에 안기 시작한 골든 하베스타가 장래에 자신에게 엄청난 흥행을 가져다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이소룡을 사소한 갈등으로 암살한다는 것은 추문회(레이몬드 초우)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다.

 

이소룡이 죽기 전에 골든하베스트사에서 약간의 문제를 일으킨 적은 있었다. 이소룡이 당시 홍보담당 사원을 폭행한 적이 있으며 명감독인 나유를 폭행위협을 가한 사건이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아뭏튼 외형적으로는 이소룡이 약간 과격한 행동으로 물의를 빗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뛰어난 흥행가이자 사업가였던 추문회가 미래 흥행의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이소룡을 살해할 정도의 큰 사안은 결코 아닌 것 같다.

‘정무문’ ‘맹룡과강’ 등의 영화가 엄청난 흥행수입을 올리고 이소룡이 톱스타의 지위에 오르자 이소룡이 추문회(레이몬드 초우)에게 자신의 영화에서 흥행을 반분하자고 제안을 했고 추문회는 흔쾌히 합의해주었다.

이로써 골든하베스트는 이소룡영화 개봉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이소룡과 추문회의 반분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이소룡과 아들 브랜든 리, 부인 린다

 

이소룡이 언제부턴가 종종 머리 두통을 겪곤 했는데 이소룡은 두통 통증을 완화시키고 위해서 마리화나를 복용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으로 인해서 사망했다는 것 또한 설득력이 약하다. 이소룡이 마리화나를 복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약을 복용한다고 쉽게 사망에 이르는 것 아니다. 당시 이소룡 검시 결과에서도 이소룡이 복용한 마리화나는 사망과 관련이 없다고

발표했었다.

 

홍콩갱단에 의한 살해설도 밝혀진 증거나 근거가 전혀 없다. 당시 홍콩에는 갱단과 깡패들이 많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그렇지만 홍콩 갱단들도 일본야쿠쟈처럼 합법적인 테두리안에서 기업을 만들어 이권에 개입하는 경향이 강했고 무작정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의 이권에 치명타를 입거나 이소룡과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얽혀있어야 어떤 물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이소룡과 이해관계에 얽혀있다는 정황이나 근거는 전혀 감지된 적이 없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갱단들은 유명 연예인들은 건들지 않는 게 관행이다.

왜냐하면 그 파급력이 워낙 크게 때문에~

애인 정패와 다정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이소룡

 

이소룡의 애인인 정패의 독살설도 한동안 나돌았다. 사실 정패는 당시 홍콩의 유명한 스타급 여배우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정패 또한 유명한 공인인데 그런 그녀가 자신의 공식 애인이라고 잘 알려진 이소룡을 그것도 자신의 아파트에서 이소룡과의 관계를 끊기 위해서 고의로 살해했다 - 정패가 계획적으로 이소룡을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면 차라리 자신의 아파트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나 연고가 전혀 없는 장소로 이소룡을 유인해서 죽이면 되지, 모두가 알고 있는 자신의 안방에서 그것도 자신의 침대에서 이소룡을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병원에 전화까지 해준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며 지나친 억측이다.

 

 

이소룡의 공식 애인이었던 여배우 정패

 

이소룡의 사망원인으로 이제 남은 것은 한가지뿐이다. 바로 뇌종양이다.

그동안 이소룡이 몇 년 동안 앓고 있었던 병이 바로 뇌종양이다.

이소룡은 사망하기 1여년전 미국의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았은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병원에서 이소룡 부인 린다 에머리에게 이소룡의 머리에 종양이 있다고 알려줬다고 한다. 즉, 이소룡이 뇌종양에 걸렸다는 것이며 이사실을 린다 에머리는 이소룡에게 비밀로 해 이소룡은 자신이 뇌종양에 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소룡이 73년 영화 ‘용쟁호투’를 촬영할 당시 촬영현장 화장실에서 쓰러진적이 있었고 또한 이소룡은 부인이나 지인들에게 촬영장이나 집에서 심한 두통을 호소한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증세가 이소룡이 뇌종양에 걸렸었다는 확실한 근거이다.

이소룡이 죽은 후 사체검시를 했었는데 홍콩 공안당국의 검시결과 공식발표에서도 이소룡의 사망의 원인으로 뇌종양을 언급했었다.

 

또한 이소룡은 73년 5월경에 LA로 날아가 종합검진을 받았고 귀로에 다시 일본에 들려 2차 검진을 받았는데 LA병원에서 이소룡은 뇌종양으로 이미 뇌속의 종양이 커질대로 커진 상태이며 앞으로 3개월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의사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물론 이소룡 부인에게만 전달되었고 역시 이소룡에게는 비밀에 부쳤었다. 그리고 이소룡에게는 거짓으로 ‘18세 청년의 육체를 가졌다’고 말해 이소룡이 뛸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암에 걸린 이소룡을 안심시키기 위해 의사가 거짓으로 한 말이었는데 ----

 

 

이소룡은 머리에 종양을 키우고 있었으며 73년도에는 그 증세가 더욱 심각해진다. 이소룡은 자신이 죽은 년도인 73년도에 골든하베스트 선전부원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자신이 출연한 ‘정무문’을 연출했던 나유감독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여 경찰차까지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그날 밤 TV생방송 프로에서도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기자의 카메라를 쳐서 떨어뜨리는 소동을 벌여 매스컴에서는 이소룡을 중화의 영웅에서 ‘미친용’으로 추락했다고 이소룡을 비난하는 기사를 싫기도 했다.

원래 상당히 부드럽고 교양이 있었던 이소룡이 죽음에 임박해서 행한 이러한 과격한 행동들은 뇌종양으로 인한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이소룡의 성격이 과격하게 변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해 7월 20일 이소룡은 애인 정패의 아파트에서 사망하게 된다.

이소룡의 사망원인은 뇌종양에 의한 뇌출혈이라고 한다.

이소룡의 사망 후 정확한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해서 그해 9월 3일부터 6일까지 검시재판이 열렸는데 린다 에머리, 레이몬드 초우, 정패를 비롯하여 관계한 의사 몇 명과 해부에 입회한 의사, 검시관이 증언하고 런던에서 법의학에 권위를 세우고 있는 R.D 데일박사가 출두했다. 재판의 중점은 이소룡 사망의 의학적, 화학적 분석이다.

 

검시재판의 결과는 자살도 타살도 아닌 뇌종양으로 인한 자연사(병사)이며 이소룡은 전부터 뇌종양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어떤 원인이 방아쇠가 되어 갑자기 죽은 것이다. 사망원인은 성행위나 위 및 소장내에서 발견된 마리화나와는 관계가 없고 정패가 준 이소룡의 두통약 에콰제(아스피린과 브로바린을 배합한 평범한 약품)의 성분 중 그가 어느쪽에 과민반응을 일으킨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소룡은 젊었을 때부터 길거리 싸움을 많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싸움은 정당한 승부를 가린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대결에서 이소룡은 모두 승리를 거두었었다.

그렇지만 LA공항에서 괴한들한테 당한 피습사건은 다소 예외적인 상황이다. LA공항에서 이소룡은 그의 제자 제임스 코번과 비행기에 타려고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10여명의 괴한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소룡과 제임스 코번을 기습 공격한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소룡은 워낙 방심한 탓에 무방비상태였었고 괴한들이 기습적으로 집단 린치를 가했기 때문에 방어할 겨를도 없이 두들겨 맞았고 결국 이소룡과 제임스 코번은 심한 부상으로 병원에 몇 달간 입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 집단 린치사태로 인해서 이소룡은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괴한들이 내리친 몽둥이에 의해 머리가 심하게 손상되었고 이로인해 뇌종양이 발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때가 이소룡이 죽기 몇 해 전의 일이었다. 그 전에도 이소룡은 자신에게 도전한 가라데사범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가라데사범의 제자들이 한 밤에 귀가하던 이소룡을 어두운 골목길에서 몽둥이로 집단린치를 가한 적이 있었다. 이 때에는 이소룡은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도전하는 무술유단자들과 대결을 피하지 않았던 이소룡은 그의 탁월한 무술실력을 시기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기습 공격을 당하면서 그의 신체는 점점 허물어져 갔던 것이다.

 

이소룡의 아들 브랜든 리

 

절권도를 창시하여 미국의 스티브 맥퀀, 제임스 코번, 카림 압둘 자바 등 많은 영화배우와 유명인사들을 제자로 맞은 이소룡은 자신의 무예가 절정에 이르자 자신의 절권도장을 폐관하고 영화배우로 성공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TV시리즈물에 조연으로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지만 동양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주연배우로 성장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본고장인 홍콩으로 돌아와 결국 꿈에 그리던 무술스타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홍콩의 톱스타로 세계적인 인기스타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그를 기다라고 있었던 것은 그의 머릿속에서 자라나는 무서운 종양의 암덩어리였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며 미국배우로 오랜 무명의 서러움을 겪으면서도 잃지않은 최고의 무술배우의 꿈은 이루었지만 자신의 머릿속에서 자라나는 암덩어리에 의해 결국 이소룡은 자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수많은 전세계의 팬들을 뒤로하고 아까운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시애틀의 레이크뷰 공동묘지에 안장된 이소룡의 묘와 아들 블랜든 리의 묘

 

현재 이소룡의 묘는 시애틀에 있는 레이크뷰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앞에 아름다운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언덕위에 이소룡과 아들 브랜든 리의 묘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만 32세에 사망한 이소룡과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의 아들 브랜드 리(이국호)는 어쩌면 너무나도 닮은 굴곡많은 인생을 살다간 부자지간이다.

이소룡의 묘역에는 수많은 조문객들이 놓고간 꽃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으며 지금도 이소룡에게서 영감을 얻으려는 방문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온다고 한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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