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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위관 정철의 진압

- 정여립, 기축옥사 그리고 죽도 -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과 기축옥사


1589년 선조때 발생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무려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던 조선시대 최대의 역모사건인데 그 모반사건의 주모자인 정여립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리고 그가 정말로 반역을 일으켰던 것인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조 23년에 발생했던 희대의 모반사건인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인해서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 뿐만 아니라 정여립이 속해있던 죄없는 동인세력까지 포함해서 무려 1,000명 넘는 사람들이 희생된 기축옥사는 극악무도했던 폭군 연산군이 일으켰던 4대사회 당시 죽은 500명보다도 훨씬 많은 엄청나 피바람이 불었던 조선 최대규모의 숙청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면 기축옥사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정여립은 누구인가?

정여립은 원래 첨정벼슬을 하고 있던 아버지 희증의 아들로 전주지역의 사대부가문 출신이었다. 정여립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출중하였는데 특히 명석한 두뇌를 바탕으로 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화술이 뛰어났던 달변가이자 이론가이기도 했다.


정여립은 경사와 제자백가에 능통하였는데 선조 3년에 과거시험에 급제함으로써 중앙관리에 진출하였다. 그 후 정여립은 이이를 존경하였으며 이이가 속해있는 서인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의 총명과 학문의 능통함을 높이 샀던 이이와 성혼의 총애를 받기도 했으며 홍문관 수찬의 벼슬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고위직까지 올라갔던 정여립은 그의 과격한 성격과 급진적인 비판의식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홍문관 수찬의 벼슬로 상승했던 정여립은 그의 옛날 스승이었던 이이와 같은 서인인 성혼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정여립의 이율적인 행동은 정여립이 이즈음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을 바꾸면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정여립의 이이와 성흔 흠집내기는 커다른 역풍을 맞게 되는데 세상의 이목은 자신의 과거의 스승을 욕되게 한 정여립을 가만놔두지 않는다. 그시대가 의리와 대의명분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던 유교주의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후 정여립은 서인의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선조의 눈밖에까지 나게 되었다. 어느새 동인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어있었던 정여립은 결국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되었고 진안군 죽도에 근거지를 마련한 정여립은 그곳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놓고 또한번의 파란을 불러일으킨다.


평소에 세간의 비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대쪽같은 성품을 지녔던 정여립은 자신의 본거지인 죽도에서 추종자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는데 정여립이 설립한 대동계는 신분의 상하나 양반, 평민, 천민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가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게 했으며 보름마다 향사례를 행한다는 구실로 학문과 무예를 연마시켰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대동계에서 추종자들을 모아놓고 정여립이 행한 파격적인 주장과 발언이다. 정여립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선진적인 평등사상으로서 당시의 상황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급진적 사상이었다.


정여립은 종종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들은 백성들의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는데 정여립이 꿈꾸웠던 것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었으며 지금의 가치로 보면 정여립은 16세기 조선의 최고의 사상가였으며 혁명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현대적인 평가일뿐이며 당시 양반과 평민, 천민의 구별이 엄격했던 계급중심의 사회에서 사대부 지배세력에게는 하나의 도전장이나 다름없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정여릷이 근거지로 삼았던 진안군 죽도


조선시대의 반상의 법도와 신분이 엄격히 구분되던 사회에서 정여립은 감히 양반이나 평민, 천민의 평등을 주장하였으니 그는 확실히 시대를 앞서 태어난 천재였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같은 정여립의 평등박애사상이 그 당시 엄격한 계급사회의 권력을 쥐고 있던 양반사대부들에게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결국 정여립은 정적이었던 서인들의 상소로 인해 선조의 귀에 역모사건으로 과대포장되어 들어가게 되었고 정여립은 역모의 주동자로 수배령이 내려졌으며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은 졸지에 반역도당으로 몰려 관군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관군에게 쫒겨가던 정여립은 진안의 죽도로 피신하였지만 결국 관군에게 붙잡혀 항변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피살되었다. 또다른 이야기는 정여립이 관군에게 수배령이 내려진 후 이미 자결하였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정여립이 피살되었든, 자결하였든지 간에 정여립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사체는 도성으로 운반되어 다시한번 능지처참에 처해졌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모반죄는 능지처참으로 다스려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정여립이 죽은 후에도 그가 활동했던 진안군 일대에서는 정여립이 계속 목격되었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의 혼령이 계속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못다한 말들을 하곤 사라지곤 하였다는 것이다.


정여립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급진적인 혁명사상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상당히 민주적인 사상이었으며 후세의 사상가들에게 상당한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임금)이 있겠느냐고 주장했던 그의 천하공물설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 윤리를 완전히 뒤집어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죽여도 가하고, 인의가 부족한 지아비는 버려도 된다’고 하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펴기도 했다. 철저한 계급 중심의 왕조시대에 그 근본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이러한 정여립의 사상은 참으로 혁명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으며 정여립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졍여립의 이러한 평등사상은 나중에 동학혁명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정여립이 주장했던 대동사상의 핵심은 지금의 공화제 정치를 뜻하는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데 지금의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영국의 청교도혁명에서 공화제가 처음 선포되었는데 그 시기가 1649년도인데 반해 정여립이 공화제를 주장했던 시기인 1589년은 서양보다도 60년이나 앞선 시기였음을 보더라도 정여립의 사상이 얼마나 선진적이었으며 민주적이었고 시대를 훨씬 앞서 나갔던 대단한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선조와 양반사대부세력에게는 정여립의 이같은 급진사상이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역모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당시 송강 정철은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추궁하는 기축옥사 때에 위관으로 임명되어 역모 관련자를 잡아들이는 주역을 맡았다.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주옥같은 가사문학을 많이 남겨 국문학사에 혁혁한 성과를 남겼던 시가의 귀재, 정철이 정여립 모반사건의 관련자들을 참살하는 위관역할을 하였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철은 사실 조선왕실과 인척관계에 맺고 있었던 인물이었는데 정철의 누이가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이어서 정철은 조선왕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정철은 서인 출신이어서 그당시 서인과 동인이 권력을 놓고 첨예하게 암투를 벌이던 시기여서 서인세력이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삼아서 정여립의 잔당척결을 그가 속한 동인세력까지 엮어 넣어 동인세력의 씨를 말려버린다.



정여립 모반사건 잔당처분이라는 기축옥사는 3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친교가 있었거나 동인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처형하는 대학살극이 자행되었다. 이 당시 단지 정여립과 편지 한 장 주고받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서인들은 정여립사건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무능했던 군주 선조는 이러한 서인출신 대신들의 충성경쟁을 즐기면서 또한 조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무고한 수많은 인재들을 대거 참살한 대가로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정작 나라를 지킬 유능한 대신들은 사라져버려 왜군들에게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는 비참한 결과로 귀속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인과응보인 것이다.


자신의 신하와 유능한 선비들 천여 명이나 학살한 선조는 왜군들이 쳐들어오자 저만 살겠다고 백성들을 버리고 체통도 없이 압록강 국경지역 의주까지 줄행랑을 쳐버리고 만다.

수많은 죄없는 신하와 선비를 학살한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대가를 치르고 되었는데 결국 외세(명나라)를 끌어들여 전쟁 발발 7년 만에 간신히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는데 조선의 모든 것은 파괴되어 버린 후였다.


그렇다면 정여립의 사건은 정말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데 정여립이 반란을 획책했다고 하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단지 정여립의 상당히 급진적인 이념과 혁명적 사상이 역모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는 정여립 모반사건이 사실상 서인들에 의해서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즉, 기축옥사는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이의 죽음을 계기로 동인들의 손으로 넘어간 정국의 주도권을 일거에 만회하기 위해 서인측에서 변절자인 정여립의 의심스런 사상과 행동을 꼬투리 잡아서 역모사건으로 둔갑시켰다는 징후가 농후한 사건이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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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덕 전부인 박유아, 박태준 딸, 고승덕의 딸 고희경의 페이스북글 전문




서울시교육감 후보로 출마한 고승덕후보가 지지율이 크게 올라가고 있는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복병을 만나 교육감선거를 며칠 앞둔 시점에서 정치적으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시교육감후보 지지율에서 고승덕후보가 30% 이상을 상회하며 10%에 머물러있던 다른 후보들을 여유있게 제치며 당선 유망주로 부각되었었는데 느닷없이 복병을 만나 이번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앞날을 에측할 수 없는 혼돈의 상황으로 반전됐다.





5월 26일 지상파 방송3사가 진행한 서울시교육감 후보 지지율조사에서 고승덕후보가 30.1%로 1위를, 문용린후보가 19.1%로 2위, 민주진보 후보인 조희연후보가 10.2%로 3위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현재까지도 고승덕후보가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소식인데 이번 고승덕후보 친딸의 페이스북글 사태로 지지율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절대적으로 앞서 나가던 고승덕후보를 위기에 빠뜨린 복병은 다름 아닌 고후보의 친딸 고희경이어서 놀라움은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고승덕의 딸 고희경은 5월 3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울시민에게’ 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는데 이 글에서 고희경은 자신의 아버지인 고승덕후보가 ‘자녀들에 대한 교육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으므로 서울시교육감이 될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는 글을 올려서 큰 파문을 몰고온 것이다.

친딸이 아버지의 잘못을 지적하며 아버지의 공직선거 출마에 태클을 거는 전대미문의 황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고승덕후보의 딸 고희경은 도대체 왜 자신의 아버지 고승덕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서울시교육감 출마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 것일까?


고승덕의 전부인 박유아


그 이유는 고승덕후보가 2002년 이혼한 전부인 박유아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될 것 같다. 고승덕후보는 전 포스코회장인 박태준의 둘째딸인 부인 박유아와 2002년 합의 이혼했으며 자녀 1남1녀는 오래전부터 이혼한 전부인 박유아가 미국에서 양육하고 있다.

고승덕의 전부인 박유아는 과거 민자당과 자유민주연합의 총재였으며 코스코 회장이었던 박태준 전총재의 둘째딸이다. 박유아는 이화여대 동양학과를 나온 미술학도로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하버드대에서 미술사와 드로잉을 공부하였던 재원인데 1984년 중매로 고시 3관왕이었던 고승덕변호사를 만나 결혼하였으며 고승덕후보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어 자녀양육에 전념해왔다.


박유아는 고승덕이 98년 정치활동을 위해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시에 완강히 반대하였다고 한다. 박유아 입장에서는 아버지 박태준이 정치활동으로 할 당시 정치적으로 많은 혼란과 부침이 있었으며 나중에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이용만 당하면서 정치보복까지 당하는 아버지의 뼈아픈 전례를 이미 겪어왔던 터라 누구보다도 정치의 처절함과 험난한 행로를 잘 알고 있으므로 반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고승덕후보와 전처인 박유아는 고승덕후보의 정치활동과 자녀교육 문제로 90년대 후반부터 고승덕후보와 심한 갈등을 빚어왔던 것이다.

또한 고승덕 전부인 박유아는 자녀들을 미국에서 교육시키길 원했으며 함께 미국으로 이주할 것을 요구했는데 고승덕후보는 한국에서 정치활동을 할 계획이었으며 미국행을 거절하면서 결국 박유아만 1998년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일방적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박유아는 미국으로 이주한 후 뉴욕에서 활발한 미술회화작업을 벌여나가고 있으며 가끔 한국과 미국에서 미술작품 전시회도 개최하는 등 예술가로서의 왕성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미국 뉴욕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있는 박유아


이후 한국에 홀로 남은 고승덕후보는 부인과 사실상의 이혼상태로 지내다가 2002는 합의이혼하게 되었으며 98년에 미국으로 이주해갔던 고승덕의 자녀들은 홀어미니 밑에서 아버지 없는 부재상태에서 자라왔던 것이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고승덕의 딸 고희경의 글에서 보면 아버지 없이 어린시절을 보낸 딸 고희경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회한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승덕의 딸 고희경은 ‘아버지가 없어 고통을 느낀 적이 너무나 많다. 미국인 친구들은 제 아버지가 제게 어떻게 자전거를 타는지 가르쳐주지 않고, 저와 한 번도 캐치볼을 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한 고희경은 ‘“아버지의 날”에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카드를 쓰고 선물을 줬지만, 저는 카드와 선물을 제 어머니에게 드리거나 만든 뒤에 그냥 버리기도 했다’고 말하며 구구절절 자신들을 미국땅에 방치해왔던 아버지 고승덕에 대한 원망과 비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고승덕의 딸 고희경은 ‘자기 자신의 아이들을 교육할 능력이나 그럴 의지가 없는 사람은 한 도시 전체와 같은 대규모 지역에 어떤 교육 정책도 펼칠 수 없다고 본다’고 말하며 아버지 고승덕의 서울시교육감으로서 자질부족을 지적하며 아버지 고승덕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고승덕후보와 딸과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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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덕후보가 99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당시에도 장인 박태준과 전부인 박유아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결국 고승덕후보는 한나라당 공천을 자진 반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그 당시 혼인생활을 유지했던 전부인 박유아와 처가에서 고승덕후보의 정치활동을 맹렬하게 반대해왔는데도 불구하고 고승덕후보는 그후 18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치활동을 계속해왔던 것이며 이것이 고승덕후보와 전부인 박유아의 결별의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판단된다.


그리고 이번 서울시교육감 후보에 다시 출마하고 있는 고승덕후보에게 이제는 장인이나 전부인이 아닌 그의 친딸 고희경이 태클을 걸고 있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혼해서 아무 관련이 없어진 전부인 박유아 대신 아직도 부녀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미국에 사는 장성한 친딸 고희경(27세)과 아버지 고승덕의 정치참여의 갈등과 마찰이 대를 이어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자녀돌봄과 교육을 방치해온 고승덕후보의 자질을 문제 삼아서 그의 딸 고희경이 고승덕의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재동을 걸고 나섰는데 친딸이 아버지의 공직출마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과연 본인 혼자의 생각인지, 아니며 또다른 세력이 사주 및 관여한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 고승덕후보는 6월 1일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딸 고희경의 폭로글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의 회견을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서 고승덕은 자신의 딸 고희경의 ‘사퇴촉구’ 글과 관련해서 ‘서울시민께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도 교육감후보직 사퇴를 거부했다.

또한 고승덕후보는 자신의 딸 고희경의 페이스북글과 관련해서 교육감후보 경쟁자인 문용린후보가 벌인 공작정치라고 규정하고 나섰다.


과거 국회의원 선거 출마 때는 부인과 처가에서 완강히 반대하였고 이제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는 장성한 친 딸이 사퇴를 촉구하며 반대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후보 같으면 부인 및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헌신적인 가족의 응원과 도움을 받아야할 상황인데 정말 고승덕후보의 경우에는 부녀지간에 엄청난 골육상쟁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것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 것인가!




고승덕의 딸 ‘고희경’의 페이스북 글 전문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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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들에게 (To the Citizens of Seoul)


저는 서울 시민은 아니지만, 서울시 교육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담아 글을 씁니다. 제 이름은 Candy Koh이며, 1991년부터 1998년까지 한국에 있는 동안 고희경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저는 박유아와 현재 서울시 교육감 후보인 고승덕씨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 중 첫째입니다. 그가 출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때, 도의상 그의 아이로서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서울 시민은 서울시 교육감이 되어 교육 책임자가 될 수도 있는 '고승덕'이라는 사람에 대한 진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고승덕씨는 그의 자녀의 교육에 대해서 전혀 도움이 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서 1987년에 (엄마와 고승덕씨가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태어났습니다.

1991년 제 남동생이 뉴저지에서 태어난 후, 저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저는 고승덕씨가 저나 제 동생에게 그 어떤 것이라도 가르쳐 줬던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기억하기에 충분했던 나이임에도 말입니다.저희 엄마가 저와 제 동생을 미국으로 데려와 뉴욕에 있는 학교에 다니게 했을 때에도, 고승덕씨는 한국에 남았고 저희와 연락을 끊었습니다.


아버지 없는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전 고작 11살이었습니다. 매년 아버지의 날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전 사람들이 제게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묻는 것이 싫었고 모른다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저에게 전혀 가르쳐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화나 인터넷이 있었음에도, 고승덕씨는 저나 제 동생에게 전화를 하거나 저희가 뭘 하는지 물은적도 없습니다.

저희의 생일에 전화나 선물을 요구하는 것 또한 저희의 상상으로 끝나곤 했습니다. 그가 저희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저희의 교육에 있어 그 어떠한 방면으로도, 재정적으로도 도움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대학/대학원에 진학하여 클래스에서 탑을 하곤 했습니다.

공공정책에 대한 관심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가을에 장학금을 받고 로스쿨에 진학할 예정입니다.

저는 이 모든것을 제 '생물학적 아버지' 없이 해왔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저와 제 동생을 부양해온 저희 엄마나 외할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일입니다.

저희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의 역할을 맡아 저를 많이 생각해주셨습니다.

미국에서 자라는 동안에, 전 한국 언론을 통해 고승덕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 어떻게 '성공'해야하는지 강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부모들에게 아이들의 교육에 힘쓰라고 말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 처음 그 내용을 접하고선 저는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녀를 교육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무시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전 아이였고 미국에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 가만히 있을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고승덕씨를 이른바 천재라고 치켜세우는 것을 보면서도 저는 침묵했습니다. 아무도 제게 신경을 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 미국인이기도 하고, 특히 한국의 정치에 대해 왈가왈부할만큼 관여되어있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승덕씨의 서울시 교육감 출마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는 것은 제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로서, 저는 서울 시민들에게 고승덕씨가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서울시 교육감의 역할이 서울시의 교육 정책과 시스템을 다루는 것이라면 고승덕씨는 그 역할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가 자기 자신의 혈육의 교육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한 도시의 교육을 맡은 수장이 될 수 있습니까?

교육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사람의 미래, 도시의 미래, 국가의 미래, 나아가 세계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저, 고승덕씨의 자녀인 저는 고승덕씨에게 교육적인 도움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과거 서울시민이었고, 서울시민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이 그 곳에 많은 저는 지금 서울 시민 여러분이 서울을 위해 옳은 결정을 내려주길 바랍니다.


더 나은 사람을 뽑아주길 바랍니다.

진정으로 서울시의 교육을 위해,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을 스스로의 자녀들부터 돌볼 수 있는 사람을 뽑아주길 바랍니다.


Candy Koh



고희경의 페이스북 원문





고승덕의 딸 고희경의 페이스북 주소 - https://www.facebook.com/kohrea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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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덕 서울시교육감 후보 기자회견, 후보사퇴거부, 고승덕의 딸 고희경씨의 페이스북 글




고승덕 서울시교육감 후보가 6월 1일 오후 2시30분 서울시 을지로 3가에 있는 자신의 선거사무실에서 친딸 고희경씨의 폭로에 대한 해명성 기자회견을 열었다.

고승덕 서울시교육감 후보는 미국에 사는 자신의 친딸 고희경씨의 ‘사퇴촉구’ 글과 관련해서 ‘서울시민께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도 교육감후보직을 사퇴할 뜻은 없다고 밝혔다.

또한 고승덕 교육감후보는 자신의 딸 고희경의 페이스북글과 관련된 상황이 교육감후보 경쟁자인 문용린후보의 공작정치의 일환이라고 규정하고 나섰다.





고승덕 교육감후보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친딸인 고희경이 페이스북에서 자신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행하지도 않았으므로 서울시 교육감으로서 자격이 없고 후보사퇴를 촉구한 글에 대해서 반박하고 나섰다.

고승덕 후보는 ‘자신의 자녀를 이용해서 나를 후보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공작정치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후보사퇴에 대한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고승덕 후보는 전처와의 이혼에 대해서 자녀교육문제로 많은 이견이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전처는 한국교육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미국에서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했으며 그래서 자신에게 미국이민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한 고승덕후보는 ‘그렇게 불화가 이어지면서 1998년에 아내가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잘 키우겠다고 하고 미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떠났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어린 아이들이 많은 상처를 받았고, 나는 권력과 재력을 가진 집안의 딸에게 양육권을 빼앗긴 아버지로서 많은 슬픔을 겪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고승덕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딸 캔디 고(고희경)씨는 5월 3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울 시민에게(To the Citizens of Seoul)’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는데 ‘고승덕후보는 자식들 교육을 방치했으므로 교육감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려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고승덕 교육감후보의 딸은 현재 미국에서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데 현재 고승덕후보는 전부인과 이혼한 상태로 딸 고희경씨는 미국에서 고승덕후보와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거주해왔다.


아무리 이혼해서 전처와 딸과 따로 떨어져 살고있다고 하지만 자신의 친딸이 교육감후보에 나선 아버지의 자녀교육 문제의 잘못을 거론하며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닐 수 없고 정말 놀라운 일이라서 충격을 금할 수가 없다.


성숙한 친딸이 선거에 출마한 아버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아버지를 비난하며 아버지의 공직선거 출마의 사퇴를 촉구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아버지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처럼 천륜을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아버지를 맹비난하며 공직선거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것일까?



지난 5월 30일 고승덕후보는 아들의 이중국적 문제로 인해 질문을 받자 ‘아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우연히 미국에서 태어나 이중국적을 갖게 된 것’이라며 ‘아들은 건드리지 말아주십시오. 잘못을 저질렀으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었다.

그런데 이러한 고승덕후보의 아들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에 대해서 미국에 사는 친딸 캔디 고(고희경)씨는 ‘그 눈물은 자기가 버리기로 결정한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고승덕후보의 친딸 고희경씨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고승덕후보)가 현실의 삶에서 저와 제 동생에게 그런 정도의 감정을 보인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고희경씨는 ‘아버지로서 이혼 과정에서 아이들한테 상처를 줘 평생 미안해하고 있다’고 말한 고승덕후보의 말에 대해서 ‘그의 개인적 고통이 그의 부재나 자식들에게 연락이 부족했던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만약 그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느꼈다면, 자신의 자녀들을 무시하지 않고 살갑게 대했어야 했다’며 고승덕후보의 해명을 반박하고 나섰다.


고승덕후보의 딸 고희경씨는 이어 ‘아버지가 없어 고통을 느낀 적이 너무나 많다’고 말하며 ‘미국인 친구들은 제 아버지가 제게 어떻게 자전거를 타는지 가르쳐주지 않고, 저와 한 번도 캐치볼을 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희경씨는 또한 ‘미국에 있는 “아버지의 날”에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카드를 쓰고 선물을 줬지만, 저는 카드와 선물을 제 어머니에게 드리거나 만든 뒤에 그냥 버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고희경씨는 자신의 아버지(고승덕)으로부터 한 번도 전화가 온 적이 없으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지도 확인하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고희경씨는 자신의 아버지가 서울시교육감 후보에 출마한 것과 관련해서 ‘저는 교육이란 작은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녀와의 관계에서부터 말이다. 그래서 저는 자기 자신의 아이들을 교육할 능력이나 그럴 의지가 없는 사람은 한 도시 전체와 같은 대규모 지역에 어떤 교육 정책도 펼칠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고승덕후보는 1984년에 포항제철(포스코)의 회장이였던 박태준의 둘째딸인 박유아와 결혼했으며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고승덕의 전부인 박유아는 이화여대 동양학과를 졸업했고, 미국에서 유학하여 미술사와 드로잉을 공부하기도 했다. 고승덕이 18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정치참여를 반대하는 장인 박태준과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이렇게 장인과 멀어지게 된 것 또한 고승덕이 이혼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하며 결국 고승덕은 2002년 전부인 박유아와 합의 이혼을 하였다.


이후 고승덕은 지난 2004년 KBS 전아나운서 왕종근의 중매로 재혼을 하였는데 고승덕후보가 재혼한 현부인은 10살 연하의 이무경기자로 고승덕 재혼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었다. 이무경기자는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91년 경향신문에 입사하여 기자 생활을 했던 경력이 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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