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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터스텔라’ 블랙홀 동영상, 뜻, 줄거리, 개봉일, 시간여행, 웜홀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가 드디어 11월 6일 대개봉되었습니다. 우주SF 공상과학영화 ‘인터스텔라’는 개봉전부터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개봉된 후 CGV개봉관에서 개봉일인 11월 6일 첫날 22만명의 관객이 찾는 등 연일 매진사례를 이루면서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우주공상과학영화가 이렇게 커다란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영화 ‘인터스텔라’가 시간여행의 통로인 ‘블랙홀’과 ‘윔홀’을 가장 확실하게 스크린상에서 완벽하게 재현해 냈기 때문이랍니다.


종래의 우주SF 과학영화들은 ‘블랙홀’등의 영상기법에서 등장인물들의 말로서 대충 때우고 넘어갔는데 ‘인터스텔라’는 ‘블랙홀’과 ‘웜홀’의 이미지를 영화사상 가장 확실하게 스크린으로 재현해내었다고 합니다. 



‘인터스텔라’의 ‘블랙홀’과 ‘웜홀’은 단지 이미지로서만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을 철저히 준수했다는 점, 그리고 과학적 방정식을 통해서 과학이론을 현실세계에 철저하게 적용시켰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얻고 있는 것이며 앞으로 당분간은 ‘인터스텔라’를 뛰어넘을 우주SF영화가 나오기는 힘들 거라는 전망이 나올만큼 영화계는 물론 과학계에서도 엄청나게 극찬을 받고있는 작품이랍니다.


과거처럼 단지 상상을 통해서 만들어진 우주SF 과학영화가 아니라 실현가능하고 철저한 과학적 원리와 고증을 통해서 만들어진 우주과학영화라는 점에서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인터스텔라’의 뜻은 행성간의 간격 즉, 별에서 별까지의 거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총지휘를 맡은 ‘인터스텔라’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20세기에 인간들은 지구에 대한 무차별적인 개발로 인해 자연과 대기는 황폐화되었고 이러한 인간들의 무분별한 남획과 개발로 인해 지구는 엄청난 식량고갈과 자원고갈 상태에 부딫치게 된다.


지구는 전세계적으로 경제시스템이 마침내 붕괴되어 식량부족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타개책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면서 미국의 나사마저도 해체되어 지구는 거의 멸종될 절대적인 위기에 직면한다.


전직 나사의 우주조종사였던 쿠퍼는 은퇴한 후 아들 톰과 딸 머피와 함께 스스로 땅을 일구고 옥수수를 경작하면서 한가로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우연히 해체된 줄 알았던 나사로 가는 비밀의 문을 발견하게 되고 나사로 들어가게 된다.

나사는 황페해진 지구의 인류들을 살리기 위해서 은하계의 다른 행성에 대한 탐험을 시작하는데 전직 유능한 우조조종사였던 쿠퍼에게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제2의 행성에 대한 탐험을 맡기게 된다.



인류가 새롭게 생존할 수 있는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서 쿠퍼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놓고 머나먼 우주항해를 시작한다.

쿠퍼의 행성탐험대는 태양계를 벗어나 은하계의 다른 통로에서 ‘블랙홀’을 발견하고 ‘블랙홀’을 통해서 4차원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웜홀’을 통해 시간여행을 하면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또다른 행성을 찾아낸다는 이야기이다.


세계의 수많은 전문가들은 영화 ‘인터스텔라’가 아이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역대 헐리우드영화 중 가장 확실하게 구현해내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히 관객들의 호기심만을 자극하기 위해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과거의 영화들과 달리 ‘인터스텔라’에서는 정밀한 과학적 원리에 입각해서 ‘블랙홀’과 ‘윔홀’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과학적이론을 충실히 구현해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와 과학이 따로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헐리우드영화 사상 최초로 영화=과학이라는 등식을 성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저명한 물리학자 킵 손이 발표한 웜홀을 통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이론을 그 토대로 하고 있으며 ‘인터스텔라’에서 구현한 ‘블랙홀’과 ‘웜홀’은 킵 손의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상태성 이론을 완벽한 방정식을 통해서 재현해냄으로써 영화로서의 예술성과 과학으로서의 경이성을 함께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는 수작이다.


‘인터스텔라’에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매튜 맥커너히를 비롯해 앤 해서웨이, 제시카 차스테인, 마이클 케인, 토퍼 그레이스 등이 출연한다. 영화진흥위원회에 의하면 영화 ‘인터스텔라’는 11월 6일 개봉 첫날 22만7106명을 동원하면서 엄청난 흥행몰이에 돌입했다.



블랙홀(Black Hole) - 블랙홀은 시간여행이 가능한 통로인 웜홀로 들어가는 통로를 말하는데 그 이유는 블랙홀은 그 주변이 엄청난 빛을 내며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고 빛의 속도 이상으로 회전하고 있기 때문에 - 빛보다 빠른 속도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해주므로 - 블랙홀 내에서는 시간이 정지해버려 이 블랙홀을 통과해서 다른 은하계의 블랙홀(화이트홀)로 나오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행을 가능케 해준다는 원리를 제공해준다.


블랙홀은 은하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주변에 있는 오래된 별인 초신성을 흡수해서 폭파시킴으로서 오래된 별을 없애주고 폭파된 별 잔해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기능을 한다.


블랙홀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고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나오는 엄청난 빛과 가스의 에너지 때문에 주변에 있는 별이나 물질들을 흡수해서 파괴시켜 버리기 때문에 블랙홀이 이론상 웜홀의 통로라고 해도 사람이나 우주선이 블랙홀에 접근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윔홀(worm hole) - 웜홀은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공간을 이어주어 사간여행을 할 수 있는 시공간상의 좁은 통로를 의미한다.


웜홀이라는 통로를 이용하면 은하간 여행을 할 때,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우주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도달할 수가 있다.

웜홀은 블랙홀이라는 입구를 통해서 들어가 화이트홀이라는 출구를 통해서 나오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통과할 수 있는 웜홀은 블랙홀을 통해서 만들어지며 블랙홀이 빠르게 회전할수록 웜홀이 형성되기가 쉬우므로 웜홀은 블랙홀을 기반으로 해서 존재할 수 있는 사간여행 통로다.


현재로서는 블랙홀 자체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으며 블랙홀은 주변에 있는 많은 별들을 흡수해서 소멸시키기 때문에 블랙홀에 접근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며 웜홀을 통한 시간여행은 수학공식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론이다.



인터스텔라 예고편 동영상







인터스텔라의 '블랙홀' 제작과정 동영상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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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청순미인 유지인, 신트로이카 정윤희, 유지인 영화, 과거사진, 결혼과 이혼사유




왕년의 미인의 대명사였던 유지인은 현재 50대 후반의 나이에도 방송에 출연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답니다. 유지인은 드라마 ‘청담동스캔들’에 출연하면서도 대학에서도 강의를 담당하는 교수로서 정력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최근 ‘정윤희’의 근황이 알려지면서 70년대 3대 미인 트로이카가 새삼 크게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70년대 중후반 ‘아시아의 대표적 미인’이라는 칭호를 들었던 ‘정윤희’는 정말 그당시 완벽한 미모로 손꼽혔던 미인이었죠. 

또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미모 못지많게 탄탄한 연기력도 인정받았던 70년대 톱스타였다는 점은 사실입니다.그런데 정윤희가 활동했던 70년대에는 미모의 톱스타가 정윤희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정윤희 말고도 눈에 띄게 아름다웠던 또한명의 여배우가 그 시대를 주름잡고 있었는데 바로 여배우 ‘유지인’이랍니다.

정윤희가 완벽한 조각미인 소리를 들었다면 ‘유지인’은 이에 질세라 ‘청순한 미인’ ‘세련미 넘치는 미인’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여배우로서 정윤희와 유지인은 동일한 시대인 70년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서로의 미모를 뽐내면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각종 CF모델을 휩쓸고 다니면서 그 시대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지요.



정윤희는 선굵은 윤곽이 뚜렷한 미모를 자랑한다면 유지인은 세련미 넘치는 청순 미모로서 서로 다른 개성을 발휘하면서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자기영역에서 타이틀롤을 맡으면서 각기 큰 인기를 누렸었답니다.


과연 이 두 여배우중 누가 더 미인인 지, 누가 더 인기가 있었는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답니다.딱 두가지만 말할 수 있습니다. 


지인과 정윤희가 활동했던 70년대 중반~80년대 중반까지 거의 10년 동안은 두 여배우가 각기 수많은 영화들에 출연해서 주연으로 활동했다는 점과 그리고 모든 여자연예인들의 로망인 화장품CF 모델에 전속적으로 출연했다는 점이 이 두 여배우 공통점이랍니다.

이 두가지 요건을 충족했던 정윤희와 유지인은 그 시대에 톱스타로 군림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 유지인은 많은 젊은 남자들의 로망인 ‘청순한 미인’ ‘청순가련형의 미인’의 필요충분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서 젊은 남성팬들에게 인기가 매우 좋았답니다.

지금 59세의 나이인데도 동년배의 다른 연기자보다 훨씬 젊어보이며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어서 신기할 정도이지요.


드라마에세 오히려 젊은 여주인공보다 더 예뻐 보이기까지 해서 유지인이 청춘영화에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해도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젊음과 미모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답니다. 50대 후반에도 저 정도이니 그녀가 젊었을 때인 70년대의 그녀의 미모는 오죽하겠습니까?


70년대 유지인의 미모는 한마디로 말해서 국보급이었으며 청순미인의 대명사였습니다.

유지인의 미모는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고고함’과 ‘정갈함’이 짙게 묻어나오고 있었지요.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흔한 미인이 아니라 고귀한 품격에서 우러나오는 고품격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유지인은 세련미가 특히 돗보였던 미인이였지요. 이러한 유지인의 필살 미모에 화장품회사들이 그녀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지요.


70년대 당시 쥬단학 화장품(현 한국화장품 전신)에서는 유지인을 화장품 전속모델로 스카웃해서 유지인은 트로이카 중 가장 먼저 화장품 CF모델을 촬영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유지인이 21살의 어린 나이에 화장품 모델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그녀의 미모가 일찍부터 ‘공인’되었음을 의미하지요.


예나 지금이나 화장품 CF모델은 모든 여자연예인들이 가장 찍고 싶어하는 최고의 로망이자 선호도 0순위인데 여성연예인이 화장품 CF모델을 찍고 나면 그녀의 미모는 당시대 최고의 미인으로서 공인받았다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유지인은 이미 데뷔한 직후 아직 신출내기 시절에 트로이카 중 가장 먼저 쥬단학화장품 CF모델로 발탁됨으로써 ‘공식 미인’ 1호가 되었답니다.


유지인의 미모의 또다른 매력은 바로 때묻지 않은 ‘청순한 미인’이라는 것이지요. 유지인의 고품격과 더불어 청순한 미모는 트로이카 세명의 여배우 중 가장 돗보이는 유지인만의 매력 포인트이지요. 물론 70년대 트로이카가 모두 미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각기 자기 개성이 있고 독특성이 다르지요.


장미희는 동양적인 풋풋한 미모, 정윤희는 선굵고 윤곽 뚜렷한 섹시한 미모, 그리고 유지인은 백옥처럼 아름다운 세련미 넘치는 청순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답니다. 세명의 트로이카 미인들이 70년대 중반~80년대 중반까지 모두 톱스타로 군림하면서 한국 연예계를 3등분하면서 3두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답니다.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가 활동하던 이 시기의 우리 연예계에서 이들 세 명의 인기를 능가할 다른 배우들은 전무했습니다. 드라마면 드라마, 영화면 영화, CF모델이면 CF모델 등 우리 연예계의 세분야에서 이들 트로이카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으니까요.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처럼 때로는 협력하면서 때로는 경쟁하면서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는 인기를 삼등분해서 자기영역에서 최고의 연기자로 군림했었지요.


유지인은 74년도 영화 ‘그대의 찬손’의 공개오디션에 공모해서 무려 2,300: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주연여배우로 뽑혔답니다. 과연 이기록이 그 후에 깨졌는지는 확인 안해봐서 모르겠지만 고등고시 100대l의 경쟁률보다도 훨씬 높은 2,300:1의 경쟁률에서 1위를 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대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심장 약한 사람은 저런 경쟁률 높은 오디션에 가슴 떨려서 신청조차 않합니다. 말이 여배우 공개모집이지 사실상 그시대에는 미인대회나 다름없답니다.


정윤희


다시말해 최고의 미인을 뽑는 모집이벤트였다는 말이지요. ‘미스코리아 진’ 보다도 뽑히기가 더 어렵다는 2,300:1의 경쟁률에서 1위로 뽑힘으로써 이미 유지인은 데뷔할 때부터 그녀의 미모가 출중했었다는 증표를 받은 셈이지요.


유지인이 나이 19세의 어린 나이에 - 당시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중 - 당당히 공개오디션에서 주연배우 자리를 꽤찬 영화는 ‘그대의 찬손’으로 당시 인기 듀오였던 어니언스의 ‘이수영’과 함께 출연한 것도 크게 화제가 되었었지요. 당시 노래 ‘편지’를 크게 히트시켰던 어니언스의 ‘이수영’은 최고 미남가수로 명성이 높았었지요.


유지인의 첫 데뷔작품인 영화 ‘그대의 찬손’은 영화 자체의 내용보다도 당시 최고의 미남가수와 최고의 미녀배우의 출연이 더 큰 화제가 되어 그것이 상승효과를 일으켜서 영화의 완성도가 좀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지인은 74년도 데뷔하면서부터 뛰어난 미모로 큰 화제를 몰고왔었고 그리고 그 다음해에 유지인은 ‘쥬단학화장품’ 광고의 CF모델로 발탁되면서 그녀의 ‘청순미’가 큰 빛을 뿜어내기 시작합니다.


데뷔한지 1년 남짓밖에 안된 풋내기 배우가 당시 최고의 화장품회사의 CF모델로 발탁된다는 것은 또하나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지요. 유지인의 미모가 또다시 공인받았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인배우 유지인은 단지 얼굴만 예쁜 배우로만 통했으며 연기력은 평가받지 못했던 시절이었지요. 원래 너무 예쁜 여자들은 연기를 잘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미모를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지라, 얼굴이 헝클어질 정도로 과감한 액션을 취하는 걸 꺼려하기 때문이지요, 


즉, 자신의 고품격 미모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이 망가지는 과감한 연기는 몸을 사리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이영애, 김태희도 초창기 시절에는 얼굴은 예쁘지만 연기력은 별로라는 평을 많이 들었었지요.

반면, 못생긴 연기자들은 원래 얼굴 자체가 가만히 있어도 망가져 있으니까 망가지는 과감한 연기를 너무나 잘합니다. 더 이상 망가질 구석이 없기 때문이지요.



유지인도 데뷔 초기 2년간은 그랬습니다. 그랫던 유지인이 77년 드라마 ‘서울야곡’으로 대폭풍을 몰고옵니다. 단지 예쁜 연기자에서 연기력을 갖춘 미모의 뛰어난 연기자로 거듭나게 된 것이지요. 

77년에 방송된 일일드라마 ‘서울야곡’에서 유지인은 특유의 청순가련한 연기를 너무나도 실감있게 연기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녀의 애절하면서도 실감있는 연기에 박수갈채를 보냈던 것입니다.


유지인의 청순미와 눈물 연기가 돗보였던 ‘서울야곡’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유지인은 톱스타로 우뚝 솟아버린답니다.

77년 같은 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청실홍실’의 장미희와 정윤희도 같은 시기에 스타덤에 오름으로써 이 시기부터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는 한국의 대표적인 연기자로 대중들에게 크게 각인되었고 이 때부터 이들 세명의 스타를 ‘신트로이카’라고 명명하면서 우리나라 연예계에 3두체계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신트로이카’는 60년대 중반부터 71년까지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세명의 여배우 - 문희, 윤정희, 남정임 - ‘트로이카’의 인기에 필적할 만한 세명의 새로운 인기스타라는 의미에서 ‘신트로이카’라고 매스컴에서 명명한 것이지요.



이렇게 드라마에서 최고의 스타덤에 올랐던 유지인은 미모와 연기력을 갖춘 연기자에게는 당연한 수순인 영화출연도 매우 활발하게 전개해 나갔지요.

‘마지막 잎새’ ‘심봤다’ ‘내가 버린 남자’ ‘가시를 삼킨 장미’ ‘26 X 365 = 0’ ‘청춘의 덫’ ‘바람불어 좋은 날’ 등 수많은 영화들에 주연으로 출연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영화들은 흥행에도 성공하였지요.


이 당시 유지인이 출연했던 영화들은 47편이 넘을 정도였지요. 아마도 ‘신트로이카’의 다른 여배우들보다도 더 많은 영화출연이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당시 연기자로서 수입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 영화 중에서 유지인을 진정한 ‘은막의 톱스타’로 인정받게 한 작품이 하나 있는데요. 78년 유지인과 이영하가 타이틀롤을 맡은 영화 ‘마지막 겨울’이라는 영화인데요.


이 영화는 정말 대단한 영화였지요. ‘마지막 겨울’은 유지인의 인기와 명예를 한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고 평가될 만큼 뛰어난 걸작품이 아닐 수가 없답니다. 이 영화의 히트로 유지인은 명실상부한 당시 최고의 인기 여배우로 순풍에 돗단 듯 탄탄가도를 달려갔으며 부동의 톱스타로 자리잡게 된답니다.



이 영화를 계기로 ‘신트로이카’의 팽팽했던 세명의 인기도가 유지인에게로 저울추가 쏠리는 현상이 벌어진 듯 하기도 했었답니다. 유지인이 나이 23살 때 13번째로 출연했던 78년도 영화 ‘마지막 겨울’은 너무나도 슬프고 가련한 순정멜로 영화랍니다.


유지인은 두 남자 사이에서 겪게되는 사랑의 비애를 유감없이 신들린 듯한 연기력으로 표현해 내었고 유지인의 애절하고도 가련한 연기 모습에 관객들을 눈물을 흘리면서도 박수갈채를 보냈답니다.


유지인이 맡은 캐릭터가 실제 유지인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유지인이 실제로 영화속 주인공 그 자체가 인 것 같은 착시현상까지 느끼게 했던 영화랍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지인 특유의 ‘청순미’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영화랍니다. 영화 ‘마지막 겨울’은 우리나라 슬픈 멜로영화의 정수를 보여주었던 영화로써 유지인의 혼과 열정이 담긴 당대의 뛰어난 수작이었답니다.


영화 ‘마지막 겨울’의 빅히트로 유지인은 그 후 수많은 영화들과 드라마를 오가며 승승장구하면서 한국 인기 여배우의 아이콘으로 떠오릅니다. 또한 같은 해 찍었던 ‘심봤다’에서 출충한 연기력을 선보이면서 트로이카 중 유일하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맞보기도 했답니다.


그후 유지인은 ‘피막’ ‘내가 버린 남자’ ‘그때 그 사람’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 뛰어난 작품들에 연이어서 출연하는 등 유지인의 인기는 영원히 식지 않을 것 같이 지속된답니다.

그러다가 86년 드라마 ‘원효대사’를 끝으로 결혼 발표와 함께 화려했던 연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말았답니다.


유지인과 딸


유지인은 86년 의사 조모씨와 결혼함으로써 연예인생활을 청산하고 가정주부로 지냈답니다. 86년부터 2002년까지 유지인은 일체 매스컴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가정주부로서만 살아왔었는데요.


2002년 유지인은 갑자기 방송에 복귀해서 올드팬들을 설레이게 했답니다.

유지인은 오랜 침묵을 깨고 2002년 드라마 ‘삼총사’에 전격 출연한 것인데 유지인으로서는 결혼과 함께 은퇴한 후 실로 16만에 방송계로 컴백한 것입니다. - 그 중간에 딱 한번 드라마 출연한 적은 있었답니다.


유지인의 방송 복귀와 함께 들려온 또하나의 소식은 불행하고도 씁쓸한 소식이었는데 그것은 유지인이 남편 조모씨와 협의이혼했다는 소식이었지요.


결혼 하기 전 연예인 시절부터 한번도 스캔들을 일으킨 적이 없었던 정말 모범답안지 같았던 유지인이 16년동안 방송 출연안하면서 가정주부로서만 충실하게 살아왔었기에 그녀의 이혼소식은 뜻밖이었답니다.


유지인의 이혼이유는 ‘성격차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한 내막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답니다. 워낙 점잖고 입이 무거운 유지인이라서 진솔한 이혼이유를 밝힐 분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유지인이 16년 만에 전격 방송계에 컴백한 것은 유지인의 올드팬들에게는 반가운 일이지만 - 유지인을 다시 방송에서 볼 수 있어서 - 그렇다고 마냥 반가워할 만한 일은 아니랍니다. 진정한 유지인의 팬이라면 유지인이 끝까지 이혼하지 않고 영원히 남편과 함께 사는 모습을 기대했을 지도 모르지요.


다른 연예인들의 이혼은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유지인의 이혼 만큼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그것은 유지인을 단지 연예인으로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고고한 인격체’로서 존경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유지인은 그만큼 워낙 빈틈없고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분이기 때문이랍니다.

아뭏튼 연예계로 다시 돌아와서 예전의 ‘트로이카’ 시절 못지않게 활발하게 방송활동을 해나가시는 모습 매우 보기 좋습니다. 또한 유지인은 연기와 더불어 KAC 한국예술원 교수로서 강의도 담당하신다고 합니다.


최근 MBC에서 ‘대장금 2’의 방영계획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문제는 ‘대장금’ 출연에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였던 이영애가 사정상 출연할 수 없다는 통보를 보내와서 ‘대장금2’의 촬영이 난황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무조건 ‘이영애’ 한사람에게만 매달리고 있는 MBC의 모습이 너무도 딱해 보입니다.


이미 ‘대장금’속편 출연을 놓고 수년 전부터 ‘이영애’의 출연을 거론하면서 시청자들을 현혹시켜왔던 MBC는 이제 이영애는 영원히 잊어주길 바랍니다. 당사자는 떡 줄 생각도 안하는데 김치국물만 한 양동이 이상 들이삼켰던 MBC는 이제 냉수 먹고 속차리시고 정신 좀 차릴 때가 됐습니다.


오랫 동안 CF촬영 독식을 통해서 엄청난 부를 쌓아놓은 배때기 너무 불러서 다시는 힘든 촬영 안하려는 콧대 높은 이영애는 이제 그만 좀 잊어주길 바랍니다.

드라마 한편이 한사람으로 인해서 좌우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영애 말고도 그녀 만큼 연기 잘하고 인물 좋은 여배우는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유지인을 이영애 대신 ‘대장금’ 속편에 출연시키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어차피 ‘대장금2’는 장금이의 중년 이후의 시절을 그려나가는 내용이므로 너무 나이를 따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정갈하고 품위있고 연기력까지 갖춘 유지인이라면 장금이의 중년의 모습을 충분히 아름답게 표현해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비록 유지인이 나이가 좀 있지만 아직도 동안인데다가 40대의 캐릭터를 연기하기 충분할 정도의 미모는 남아있으니까요.


미국 허리웃 영화사에서는 50대 여배우들이 아직도 주연급 청춘영화에 많이들 출연하고 있답니다. 미국은 편견이나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갖지않고 순수한 그사람의 재능만 보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봉건적인 편견의 틀에서 벗어나서 미국처럼 합리적인 안목이 필요하답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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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청나라의 전쟁, 역사저널 병자호란의 결과, 발생원인, 남한산성 전투, 청태종 홍타이지




16세기 후반, 만주지역에 흩어져 살고있던 여진족들은 누르하치가 부족들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웠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나갔던 후금은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청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군사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땅을 쳐들어와 조선을 굴복시켰던 조선으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패전의 역사가 바로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이미 후금(청)은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과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구실로 군사 3만을 조선에 출병시켜 평양까지 진출하는 등 조선을 위태롭게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당시에는 양국이 확전을 원치않아 강화가 쉽게 성립되어 전쟁은 조기에 종료됐다.


정묘호란은 후금을 세웠던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새롭게 후금의 황제가 된 태종 홍타이지가 후금과 전쟁을 벌이는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는 등 후금에 적대정책을 취하고 있는 조선에 경고와 위협을 보내기 위해 일으켰던 전쟁이었으며 조선이 후금과 ‘형제지교’의 관계를 맻고 배척하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고 군사를 되돌렸던 것이다.


광해군 집권시절에는 광해군은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강성해지자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여 광해군은 명나라와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펼쳐나가 후금과 큰 마찰없이 평온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1627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 집권세력은 광해군이 추구했던 실리위주의 중립 외교정책을 버리고 다시 친명배금 정책으로 복귀해서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는 등 후금(청)에 대한 적대정책을 추구하였는데 명나라와 전쟁을 한창 벌여나갔던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는 자신들의 배후에 또다른 적인 조선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조선은 당시 평안북도에 있는 가도에 명나라장군 모문룡을 주둔시키고 군사원조를 해주면서 명나라의 요동수복 작전을 도와주는 형국이었으니 후금의 강경파였던 태종 홍타이지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고 결국 청나라로 개칭하고 스스로 황제로 올라선 홍타이지는 청나라의 후방을 교란하는 조선을 쳐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직접 군사 12만 8천명의 철기병을 거느리고 1636년 12월에 조선으로 출병하였는데 이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의 새로운 국왕으로 등극한 인조와 서인 집권세력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국방강화에도 거의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1636경 당시 청나라로 개칭한 후금은 국력이 날로 신장되고 있었고 명나라가 점령했던 만주의 대부분을 모두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몽고에 있는 원나라 몽골세력까지 복속시켰을 정도로 국력과 군사력이 크게 강화되있는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명나라는 집권세력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이 등을 돌렸고 양자강 이남의 지방마다 봉기가 일어났으며 양자강 이남을 장악한 이자성이 명나라조정에 반기를 들고 명나라 조정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으로 명나라는 국력이 크게 약화되어 쇠락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발빠르게 파악했던 광해군은 후금과 좋은 관계를유지하여 후금(청)과의 전쟁을 막을 수 있었지만 청강명약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못하고 오로지 숭명정책의 대의명분에만 빠져있던 인조와 서인세력은 결국 청나라의 침공을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사태파악을 할 수 있는 전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인조와 서인세력은 국방력 강화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후금(청)나라와 약속한 친교정책도 소홀히하며 계속해서 후금을 오랑캐나라라고 얕잡아보며 배척하고 있었다.


과연 후금(청)이 조선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화수준이 떨어진 오랑캐, 야만족일까? 왜 조선은 개국 이래 오랫동안 만주에 사는 여진족 및 그들이 세운 후금을 오랑캐라고 얕잡아 본 것일까?



조선이 야만족이라고 생각하는 여진족은 실제로는 문화적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만주에 흩어져살고 있던 여진족은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어받아 계승·발전시켜서 17세기에는 조선을 거의 능가할 정도로 높은 문화수준을 지니고 있는 선진문명국가였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이 계속해서 만주의 여진족들을 평가절하한 것은 바로 명나라 때문이다.


조선은 유교와 성리학적 이념을 근간으로 해서 세워진 나라였고 조선을 지배했던 사대부들은 모두 성리학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신념은 오직 공자와 맹자, 주자가 교시하는 유교적 이념 안에만 묶여있었고 이로써 다양한 문화의 발전을 꾀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교적 속박으로 인해 조선은 서양의 발전된 신문화와 신기술의 도입이 불가능해 근대화를 이뤄내지 못했으며 결국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집권세력들은 오로지 최고의 스승인 공자와 맹자를 배출한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라고 여기며 숭배해왔고 조선자신을 중국의 작은 나라라고 여기는 ‘소중화주의’의 망상에 빠져있었다.

한 나라의 고관대작들이 다른 이웃나라를 ‘어버이의 나라’, ‘조상의 나라’라고 부르고 섬긴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국치’에 해당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조선지배층의 ‘소중화주의’ ‘사대주의’는 일본과 여진족들로 하여금 조선을 얕잡아보고 침략해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집권사대부들은 실제로 그랬으며 -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인 이이와 이황이 집필한 기자실기, 기자집기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 그들은 조선 건국 이래부터 조선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명나라 등 중원 한족들을 조선의 어버이, 조상의 나라라고 숭배해왔는데 이것을 ‘사대’라고 표현했고 결국 조선 지배층들이 지녔던 ‘사대주의’는 바로 큰 스승이자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공자, 맹자, 주자의 철학적 이념만을 받들어 뫼시고 공자, 맹자가 태어난 나라인 명나라는 스승의 나라이자 조상의 나라로 승격시켜서 조선을 영원한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중국 주나라의 사람인 기자마저도 기자조선의 시조로 만들어놨으며 기자조선을 건국했던 기자가 중국 주나라 사람이니, 주나라의 후손들이 세운 명나라는 우리의 조상의 나라로 떠받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니 명나라 이외의 다른 족속들, 즉, 만주의 여진족이나 몽골족 등 이민족들은 모두 야만인 취급을 하며 외교관계의 예를 다히지 않고 계속해서 멸시만 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 지배층의 편협하고 어리석은 이념 때문에 조선은 국제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없었고 임진왜란이나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은 전쟁과 참화를 스스로 불러일으킨 것이다.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광해군을 몰아낸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즉, 광해군이 북방에서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후금의 강성함을 파악하고 명나라와 후금사이에 중립외교를 표방해서 실리외교를 편 것을 두고 조상의 나라이자 스승의 나라인 명나라를 배반했다고 해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낸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조선의 사대부들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나라를 섬기기 위해서 자신들의 왕을 몰아내는 이러 어처구니 없는 일을 조선의 사대부들은 서슴없이 행했으며 이러한 사대부들의 편협된 행동들이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같은 참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조선에 철기마병을 이끌고 출병했던 청(후금)나라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 출병의 이유를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과 조선의 명나라 군사지원을 이유로 들었다는 것을 보아도 조선이 얼마나 국제정세에 어두웠는지를 알 수 있다.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넜던 홍타이지가 인솔한 청나라 군대는 불과 5일 만인 12월 14일에 한양에 도착하는 엄청난 속도를 보여준다.

5일 만에 한양(서울)에 도착할 정도로 빠른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 군대가 모두 기마병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청나라군대는 국경지대에 있는 조선의 수비성들을 모두 우회하는 전략을 펼쳤고 압록강에서 한양까지 길목에 있는 수비성들과 공성전을 벌이지 않고 오로지 인조가 있는 도성만을 목표로 해서 진군해왔다.


완행버스가 아닌 직행버스를 타고 오직 왕성(한양성) 탈취만을 목표로 해서 진격함으로써 5일이라고 하는 최단 시일 내에 한양에 도착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가 부산 동래성을 출발해 한양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 24일에 비하면 엄청난 진군속도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 국왕인 인조와 대신들은 원래 강화도로 피신할 생각이었으나 청군이 이미 한양부근까지 쳐들와 있어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조선 국왕 인조와 대신들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937년 1월 30일까지 한달 반 동안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버텨냈다.

남한산성에서 수비태세에 돌입한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을 지키는 수비군대 1만 2천명의 병력으로 남한산성의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청군의 집요한 공격을 오랫동안 방어해 내지만 군량미의 부족상태와 엄청난 추위, 그리고 조선병사들의 사기저하로 한달 반 만에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사실 병자호란 당시 군량미의 부족상태는 청나라군대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고 후방의 성들을 우회해서 오직 조선왕이 있는 남한산성만을 공략했던 청나라 군대도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우회했던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 등지에는 적지않은 조선군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이들 조선병력들을 공략하지 않음으로써 청나라 군대는 후방과 전방에 모두 적군들에게 둘러쌓인 불리한 상황이었으며 나중에 본국으로 귀환할 때 퇴로가 막힐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조선국왕과 조정이 한달 정도 더 버텨냈더라면 식량이 바닥이 난 청나라군대가 철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조선은 갑자기 왜 한달 반 만에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게 항복한 것일까?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천자총통과 조총으로 진격해오는 청나라군사들을 집요하게 괴롭혔으며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의 철통같은 방어를 뚫지못해 한달 동안 고전을 면치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에 군사파병을 내려 모집한 조선의 근왕군(속오군)들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 큰 문제였다.


조선조정은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항전하는 동안에 전국 각지에 파발을 보내 지방군들이 파병하여 청군의 포위망를 뚫어줄 것을 기대하였지만 지방에서 모여든 근왕병들은 통일적인 지휘체계가 서지 않은 상태에서 따로 움직이는 바람에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충청도에서 파병한 근왕병은 죽산에서 진격을 멈추었고 강원도 근왕병은 12월 27일에는 검단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청나라 군대에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었던 전라도 근왕병은 전투에서 이기고도 탄약부족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져서 청군에게 포위되었던 남한산성은 지방 근왕병들의 원조를 받지못하고 다시 고립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더욱이 도원수로 임명된 김자점은 군사 2만여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면서도 청나라의 철기군의 기세에 겁을 먹고 성문을 걸어 잠그고 싸우기를 거부한 것도 전쟁패전의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남한산성을 한달 반이나 지켜냈던 인조와 조정은 시간이 갈수록 근왕병들이 패배하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주전파의 입김이 약해지고 주화파의 입김이 더욱 강해져갔고 결국 세자빈과 봉림대군이 피신해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의를 완전 상실했고 주화파 최명길의 주선으로 결국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문서를 전달하고 말았다.


조선은 정묘호란이 발발한 이후 또다시 전쟁이 터질 것을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전국에 전쟁준비를 하달하는 등 나름대로 방비를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감이 있었다.

청나라는 이미 내몽고 지역까지 진격하여 여러 몰공족들을 복속시켰으며 북경지역까지 공략하는 등 군사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는데도 조선은 우물안 개구리처럼 명나라와의 의리와 명분에만 사로잡혀서 국제정세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터진 도화선은 1936년 청나라 태종이 황제로 칭제를 개칭한 후 파견한 청나라 사신을 조선국왕이 만나주지 않는 등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청나라 황제의 국서도 받지 않았던 것이 청황제 홍타이지가 쳐들어온 가장 큰 시발점이 되었다.

사실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명나라와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청나라의 후방의 적을 평정해서 안정화시킬 목적이었으며 또한 명나라와 교역이 끊어져 부족해진 물자를 조선으로부터 조달받기 위함이었다.


강화도가 청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전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면서 항복의 예를 거행했다.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다.



조선과 청나라가 맻은 항복협약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행할 것.

조선은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헌납할 것.

조선은 왕의 장자(세자)와 제2왕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청이 명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내외 여러 신하와 혼인하고 사호(私好)를 굳게 할 것.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물품 20여 종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성절·정삭·동지·경조 등 사신은 명 구례를 따를 것.

가도(假島)를 공격할 때는 병선 50척을 보낼 것.

포도(逋逃)를 숨기지 말 것.

일본과 하는 무역을 허락할 것.


조선 인조의 항복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고, 그리고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포로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조선의 항복으로 청나라와 맺은 항복협정의 내용은 조선이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또한 조선은 해마다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수십만포의 세포등 엄청난 양의 세폐(조공)를 바치는 것이며 명나라와의 전쟁에 군사지원을 해주는 것등 청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엄청난 조공세금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다.


조선을 굴복시키고 난 후 청나라는 명나라 본토를 총공격해 들어가서 명나라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당시 청나라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명나라는 내부의 반란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바로 양자강 이남에서 봉기한 이자성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명군을 대파하고 몰고들어가 북경의 윈난성이 함락되면서 명나라는 1644년에 사실상 멸망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땅을 차지한 이자성군대와 청나라 군대가 하북지방에서 대전투를 벌였고 명나라 장수인 오삼계를 회유해서 귀화시킨 청나라 군대는 총 18만 대군으로 이자성군대를 압박공격해서 결국 이자성군대는 대패하였고 이로써 청나라는 명나라 도성을 점령하면서 중국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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