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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 승리요인, 동영상, 사망자, 위치, 영화 ‘명량’ 관객수, 울들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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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이 8월 24일 현재 관객수 1,600만명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등 때아닌 이순신과 명량해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폭되고 있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1625만 7327명)

2006년 영화 ‘괴물’이 보유한 한국영화 1위 기록을 8년만에 갈아치웠으며 또한 영화 ‘아바타’가 보유한 1362만명 기록마저도 갈아치우면서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작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역사적인 인물을 주제로 한 사극영화가 관객 1000만명을 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케이스로 도대체 왜 대한민국의 관객들은 이토록 이순신이 참전했던 417년 전의 명랑대첩에 열광하는 것일까?


얼마전에 영화 ‘명량’의 누적 관객수가 1,600만명을 넘어섰고 이러한 추세로 가면 한달 정도만 지나도 관객 2,000만명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추정되는 상황인데 현시점에서 보다라도 이순신을 주제로 한 영화 ‘명’은 대한민국 전체국민의 1/3이 관람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관객동원일 뿐만아니라 국민의 1/3이 관람했다고 하는 그 상징적 의미 또한 대단히 큰 것이며 우리나라 영화사상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영화로 길이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 관객들이 이토록 이순신과 ‘명랑’에 집착하고 열광하는 이유는 몇가지로 집어볼 수 있다. 하나는 일본의 아베정권이 끈질기게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우리나라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위안부문제 등 계속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며 2차대전의 전범이 안치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참배하는 등 신군국주의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한반도 주변의 정치상황에서 야기되는 위기감, 그리고 일본 견제의식에 저변에 강하게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이 아베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부쩍 우리나라에 대한 도발적 언행이 심해지고 있는 것도 한반도정세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전쟁을 금지시킨 일본헌법 해석의 변경으로 전쟁이 가능하도록 추진하고 있는 일본정부의 호전적인 야욕 등과 맞물려서 일본 침략을 통쾌하게 물리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일본을 견제하려는 대중들의 극일심리가 작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영화 ‘명랑’의 주제가 된 과거 417년 전에 벌어진 이순신의 ‘명대첩’을 다시한번 살펴봄으로써 이순신의 위대한 치적을 다시 되새겨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 이순신장군만이 가능했던 명량대첩(명량해전)의 대승리



이순신장군은 세계해전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루어냈던 조선이 낳은 최고의 명장이다. 이순신의 임진왜란 당시 전적은 23전 23승으로 불패의 신화를 달성한 유일한 조선의 맹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순신장군은 진도앞 울들목에서 벌어진 명량해전에서 패배가 불을 보듯 뻔한 절대 열세인 처한 상황에서 전함 13척으로 뛰어난 전략을 구사해서 왜군 선단 333척을 물리친 해전사상 유래가 없는 최고의 대승을 일궤냈다. 이순신의 명랑해전은 한마디로 말해서 ‘기적’ ‘천운’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명대첩의 대승은 기적도 아니고 천운도 더더욱 아니며, 이순신의 치밀하고 뛰어난 지략과 전술, 그리고 조선 수군의 우월한 무기체계가 빛을 발휘해서 얻어낸 치밀하게 계획된 전투의 성과였다.



1592년 왜군 15만 9천명이 조선을 침략해온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전혀 전쟁준비가 안된 조선은 개전초기부터 연전연패를 당하며 수도 한양은 물론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평양성마저도 함락당하는 위기에 처한다.

이렇게 육상전투에 연패하는 사이 서남해안 바다에서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 미리 준비한 거북선과 판옥선을 이끌고 서남해안 바다에서 왜군 선단을 파죽지세로 무찌르며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옥포해전, 한산도 대첩 등 끈임없이 처들어오는 왜군 선단들을 싸우는 족족 격퇴해 버리는 이순신 함대의 빛나는 전과로 인해서 평안도 북부를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을 점령하며 승승장구하던 왜군은 보급품 수송에 빨간불이 켜졌다.



시대적 영웅이 나타나면 영웅을 시샘하는 모함꾼들이 항상 꼬이게 되는 것이 조선의 고질적인 병폐다. 이순신장군이 옥포해전,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한산도해전 등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면서 일본 보급선의 발을 묶어두고 호남지방을 방어하는 수훈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싸움에만 몰두하던 조정대신들은 자신보다 더 위대한 영웅의 출현을 시기하여 이순신을 모함하는 파렴치한 작태를 벌인다.

그리고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무능하고 졸렬했던 임금, 선조 또한 이순신장군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이 높아지자 이순신장군에 대한 시기심과 의심을 품게되어 이순신장군을 명령불복종죄를 뒤집어 씌워 감옥에 수감하고 모진 고문을 행한다.


이렇게 조선에서는 왜군을 무찌른 데에 큰 공을 세운 전쟁의 영웅을 감옥에 가둬놓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 가장 기뼈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이순신의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던 바로 왜군들이었다.

이순신이 감옥에 있는 사이, 왜군들은 서남해안에 다시 거대한 전함을 이끌고 침략해 들어오는데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 된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거의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였고 원균 자신도 왜군의 칼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조선수군은 이순신이 모아두었던 300척의 전선의 대부분을 잃고 역사상 최대의 패베를 당했다.



해전의 대패로 다시 서남해안 재해권은 일본으로 넘어갔고 이에 몹시 다급해진 선조는 이순신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고 전선으로 내보내는 데 이 당시 선조는 ‘과인이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라고 하는 굴욕적인 저자세로 이순신장군을 설득해서 다시 전선으로 내보냈다고 실록에선 기록되어 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자신의 명으로 처벌한 이순신장군에게 이렇게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재등용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선조가 자신의 잘못된 처사를 반성한 것인지, 아니면 이순신을 단지 전쟁방패막이로만 써먹을 교활한 계산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겟지만 ~


임진왜란 전쟁 발발 후 2년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명나라군대가 개입하고 전세가 팽팽한 접전 상태에 접어들자, 명나라와 일본은 협상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그 후 3년 동안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전쟁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다시 대군을 파견해서 제2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바로 1997년에 벌어진 정유재란의 시작이다.

당시 왜군들은 300척이 훨씬 넘는 거대한 선단에 왜군 2만명을 태우고 서남해안으로 다시 쳐들어왔는데, 이들 왜군은 남해안을 거쳐서 서해로 올라가 예성강을 통과해 수도 한양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계산은 당시 이순신이 없는 남해안을 손쉽게 통과해서 서해로 올라가서 예성강이나 한강을 통해 한반도 중부권에 곧바로 진격해 한반도 중북부를 장악하려는 복안이었다. 이순신이 없는 상황이었다면 이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줄만 알았던 이순신장군이 다시 진도앞바다에 나타난 것이다. 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순신장군의 질긴 악연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장군이 감옥에 갇히게 되어서 가장 기뻐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는데 이제 또다시 이순신장군에게 덜미를 잡히게 되었다.


명량해전의 최대의 격전지가 바로 울들목이다. 울들목은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섬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급류가 심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심한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아픈 몸을 추스릴 사이도 없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장군에게는 당시 수백척의 왜적선과 상대할 수 있는 전함은 고작 13척에 불과했으며 병사들 또한 상당수가 도망가거나 사라진 후였다.

자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완성한 수군 함대 300척은 원균의 처절한 패배로 거의 다 소실되거나 수장되어 버렸기에, 그야말로 잿더미속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개전 이래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이순신 수군의 열약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선조는 대신을 보내 이순신에게 차라리 수군을 폐지하고 충청도로 올라와서 훗날을 도모하자는 제안을 하지만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끝까지 항전의지를 되새겼던 것이다. 나중에 한 척이 추가되었다.

우리 조상이래서가 아니라 참으로 대단한 의지를 지닌 무장이 아닐 수 없다. 고작 함선 13척으로 적선 333척을 상대하겠다고 나선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장군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울들목의 지형적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법을 구사해서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켜 버린 것이다.


진도대교가 있는 울들목


진도섬과 해남면 사이에 있는 좁은 수로인 울들목은 수심이 20m 정도이며 거리는 323m에 불과한 작은 해협인데 엄청나게 빠르고 거센 조류가 흐르고 있어서 한번 조류에 휩쓸려 버리면 거센 조류에서 빠져나오기가 불가능한 곳인데, 이순신장군이 착안한 전술이 바로 이러한 거센 조류를 최대한 역이용하는 전법이었다는 사실을 왜선단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최악의 상황을 지리적 특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것은 세계 해전 사상 최고의 해전이라는 대역사를 만들어냈으며 이순신장군이 아니라면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는 복안이었다.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던 충성스러운 전사가 지혜와 병법을 최대한으로 활용함으로써 세계역사상 유래없는 대승을 일궤냈다.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수군이 13척의 판옥선으로 왜군선단 333척을 맞아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몇가지로 간추려볼 수 있다.

이순신함선들은 왜군선단을 만나 도망치는 척하며 물쌀이 가파르고 조류가 심한 울들목으로 많은 왜선들을 유인해 왔다. 쉽게 이야기하면 유인매복 작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당시 고작 13척에 불과한 이순신 선단으로서는 넓은 진도앞바다에서 정면승부를 거는 것은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거북선


이순신장군은 전투 전부터 울들목에 철쇄(쇠사슬)를 준비해 두었는데 이 철쇄(쇠사슬)를 울들목의 좁은 해협 밑에 숨겨 놓았다가 적선이 나타났을 때 이 철쇄를 팽팽하게 당겨서 빠르게 밀려오는 왜선들의 밑부분을 걸어서 침몰시키거나 묶어두는 전법을 구사함으로써 왜군함선들의 공격진로를 완전 차단했던 것이다. 철쇄에 걸려 정지당한 왜선들은 일부는 침몰하거나, 뒤에 오는 함선들과 연쇄 충돌도미노 현상이 벌어짐으로써 일부 왜함선들이 난파되었고 많은 왜선들이 발이 묶여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왜함선의 진행방향으로 거센 조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이러한 거센 조류도 왜함선들의 충돌시 충격을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해서 왜선의 난파를배가시켰으며 울들목 철쇄(쇠사슬)에 의해 정지당한 왜군함선들의 조총사정 거리를 벗어난 지역에서 이순신함선들이 포진해 있다가 조총보다 훨씬 유효사거리가 긴 천자총통으로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가함으로써 왜함선들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이순신함대의 승리의 또다른 요인은 바로 우수한 무기체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이 이끌던 판옥선에는 조선의 함포, 천자총통을 장착하고 있었는데 이 천자총통의 유효사거리는 평균 700m 정도 되며 가장 긴 사거리는 1,200m라고 한다. 이에 반해 당시 왜함선은 함포 자체가 없으며 그들의 유일한 무기는 조총이나 화살이다. 


당시 일본의 함선은 밑이 뽀쪽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매우 불안정해서 방향전환이나 무엇인가에 걸리면 잘 넘어진다. 그리고 일본 함선은 크기가 작아서 무거운 화포를 장착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당시 일본에서는 함포 제작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그들은 오로지 조총으로만 전투를 치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군의 조총은 유효사거리가 150m로 우리 천자총통의 유효사거리 700~1,200m 보다 훨씬 짧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공방전이 벌어졌을 경우에는 조총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즉, 명량해전의 울들목에 철쇄(솨사슬)를 달아놓은 가장 큰 이유는 이 철쇄로 왜함선의 발을 묶어두고 조총 사거리를 훨씬 벗어난 원거리를 유지하면서 이순신함선의 천자총통으로 맹폭격을 가하는 것으로, 이러한 이순신의 전략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명량해전의 대승의 요인이 되었다.


울들목의 해협에서 철쇄에 걸려 정지상태에 있는 왜함선들로부터 500m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이순신함선의 천자총통에서 일제히 함포사격을 가했을 경우에 500m 거리는 천자총통의 유효사거리 내에 있어서 적선을 파괴시킬 수 있지만 왜군 조총의 유효사거리에서는 벗어나 있기 때문에 우리 함선에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조선의 천자총통 같은 무기의 우수성과 이순신장군의 치밀하고 뛰어난 전략전술이 그대로 적중했기 때문에 이순신 함대는 대승을 거두게 된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왜선은 31척이 침몰해 버렸고 90척이 파손을 당했으며, 우리 함선은 단 한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기적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은 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명량해전에서 아군의 사망자수는 단 2명(부상자 3명)에 불과하며 왜군은 약 3,500여명의 사망자와 4,5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뭏튼 명량해전의 대승으로 인해서 서남해안의 재해권은 우리 수군이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으며 정유재란을 일으켜 2차로 침입해 들어왔던 왜군들의 북상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렸던 것이다.

육지에서는 당시 왜군들이 충청도지역까지 진출해 있었는데 북상하던 왜군들은 직산지역에서 명군을 만나 대접전을 벌였지만 이 역시 패배하였으며 충청도지역에서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되었는데, 해전에서 이순신함대에게 왜함대가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왜군들은 보급품 부족등의 문제로 더 이상 북상을 포기한 채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왜성을 쌓고 방어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의 대승은 한반도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 후 왜군들은 더 이상 서남해안 진출은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 명량해전의 승리로 이순신함대의 완전한 해상권 장악이 완료되었고 왜군들의 보급품 공급을 차단함으로써 한반도 북상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명량대첩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함대의 명량해전의 대승은 그동안 수세국면으로부터 벗어나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순신의 ‘명량해전’ 동영상 1부






이순신의 ‘명량해전’ 동영상 2부









♣ 이순신장군의 임진왜란 당시 역대 전쟁기록


횟수 

전투시기 

충무공 년보

지휘장수

전투결과

조선-(명나라)

여진-왜(일본)

1

1587.9.

녹둔도

조경록 이순신

갑청아 사송아

포로 60명 구출

2

1588.1.14.

녹둔도

이일 김우추 이순신(이 전투 후 백의종군 풀림).

우을기내

적 33명 사살200여호 불태움.적380명 사살말 9필 소 20두 획득

3

1592.5.7.

옥포

이순신

도오도오 다카도라

왜선 26척 격파

4

1592.5.7.

합포

이순신 원균

와키사까 야스히로

왜선 5척, 왜군 패주.

5

1592.5.8.

적진포

이순신 원균

와키사까 야스히로

왜선 11척 격파.

6

1592.5.29.

사천

이순신 원균

가메이타 고레노리

왜선 13척 격파.

7

1592.6.2.

당포

이순신 원균

와키사까 야스히로

왜선 21척 격파.

8

1592.6.5.

당항포

이순신 원균 이억기

 

왜선 26척 격파.

9

1592.6.7.

율포

이순신 이억기 원균

구루시마 미찌후사

왜선 7척 격파.

10

1592.7.8.

견내량

이순신 이억기 원균

와키사까 야스히로

왜선 47척 격파.12척 나포.

11

1592.7.11.

안골포

이순신 이억기 원균

구기 요시다까

왜선 42척 격파.

12

1592.8.29.

장림포

이순신 이억기 원균

 

왜선 6척 도주.

13

1592.9.1.

부산다대포

이순신 이억기 원균

 

왜선 128척 격파.

14

1593.2.6∼ 3.8.

웅포

이순신 이억기 원균

구마다니

왜군 100명 사살.

15

1594.3.4.

당항포

이순신

와키사까 야스히로

왜선 31척 격파.

16

1594.9.29.

장문포

이순신

후꾸하라

왜선 2척 격파.

17

1594.10.1.

영등포

이순신

시마쯔

왜군 격파.

18

1594.10.4.

장문포

이순신

후꾸시마

쌍방간 조우 대치전과 없음.

19

1597.8.28.

어란진

이순신

도오도오 다까도라

왜선 도주.

20

1597.9.7.

벽파진

이순신

도오도오 다까도라

왜선 도주.

21

1597.9.16.

명량

이순신

도오도오 다까도라

왜선 31척 격파.

22

1598.7.18.

절이도

이순신 진린

 

왜선 50척 격파.

23

1598.9.19∼11.15.

관양만 예교성

이순신 진린권율 유정(劉綎)

고니시 유끼나가

왜군 퇴로 요청.왜선 30척 격파.11척 나포.명나라 전선 39척 침몰.

24

1598.11.18∼11.19.

노량관음포

이순신 진린

고니시 유끼나가

이순신 전사.왜선 200여 척 격파.왜선 50척 도주.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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