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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관의 98년 히트곡 ♬ 네박자 ♬ 뮤직동영상




인정많은 시골아저씨 같은 수수한 모습과 구수하고 낮은 목소리로 중장년층으로부터 인기를 많이 받았던 송대관의 히트곡 ‘네박자’,

송대관이 98년도에 발표해서 나름대로 꽤나 인기가 높았던 곡이지요.

‘네박자’가 인기를 끌었던 것은 우리 삶의 애환을 닮은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가 아무 부담감 없이 가슴 깊이 와닿는 노래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네박자’는 트로트 계열의 노래로 정겹고 부드러운 멜로디가 우리들 정서에 친숙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노래를 들으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고 있답니다.

가수 송대관은 노래를 시작한 지 경력이 꽤나 오래되었던 원로급 가수이지요. 일설에는 나훈아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었다고 하는데요.


송대관이 부른 1975년도에 발표한 ‘해뜰날’은 송대관이 최초로 히트시킨 노래로 송대관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곡이지요.

그리고 70년대 후반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가게 되었고 88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송대관은 90년대에 다시 무대로 컴백해서 부른 노래 ‘차표 한 장’이 크게 히트하면서 성공적인 복귀무대를 갖게 되지요.



거의 10년 이상 공백기를 갖고 다시 컴백한 송대관은 이후 ‘네박자’가 또다시 히트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답니다.

송대관은 현재 사채문제로 소송에 걸려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지만 자신이 불렀던 노래 ‘쨍하고 해뜰날’처럼 다시 고난을 극복하고 재기하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송대관의 '네박자'  라이브 동영상






네박자 / 가사


니가 기쁠때 내가 슬플때 누구나 부르는 노래

내려보는 사람도 뒤를 보는 사람도 어차피 쿵짝이라네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한구절 한고비 꺽고 넘을때 우리네 사연을 담는

울고 웃는 인생사 연극같은 세상사

세상사 모두가 네박자 쿵짝


쿵짝쿵짝 쿵짜자 쿵짝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짠짠짜라라라 짠짠짠자리 짜리라라 짜라짠


나 그릴울때 너 외로울때 혼자서 부르는 노래

내가 잘난 사람도 지가 못난 사람도 어차피 쿵짝이라네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한구절 한고비 꺽고 넘을때 우리네 사연을 담는

울고 웃는 인생사 소설같은 세상사

세상사 모두가 네박자 쿵짝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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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붕괴원인, 사망자수, 생존자수




4월 16일 302명의 실종자 및 사망자를 발생시킨 ‘세월호’ 침몰사고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역대 대형참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우리나라 대형 재난사고 중 가장 큰 인명피해를 발생시킨 사고는 바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 대형 참사사고 중 가장 대표적인 재난사고의 대명사로 불리우고 있는 오명을 간직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1995년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삼풍백화점 A동 5층건물이 완전히 붕괴되는 사고로 인해서 사망자가 무려 501명이나 발생했으며 실종자 6명, 부상자 937명이 발생하여 우리나라에서 6.25전쟁 이후에 발생한 가장 큰 인명피해를 가져온 참사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부실시공과 무리한 설계구조 변경, 그리고 공무원에 뇌물제공으로 인한 비리등의 삼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발생한 대표적인 인재로 인한 참사라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지상 5층과 지하 4층 등 총 9층에 해당하는 대형건물인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불과 2개월 전에는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와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도 발생했기에 참사 직후 초기에만 해도 가스폭발로 인한 충격으로 건물이 붕괴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대세였는데 후에 사고원인을 정밀 분석한 결과 삼풍백화점 붕괴는 삼풍그룹의 이준회장의 무리한 설계구조 변경과 부실시공이 가장 큰 원인으로 밝혀졌다.


사망자 501명을 포함한 총 사상자 1,500여명을 발생시킨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대형참사로 기록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예견되었던 ‘인재’라는 점에서 국민들의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낳았던 사고였다.


삼풍백화점은 원래 상업용도가 아니라 주거용으로 허가난 용지였는데 공무원에게 뇌물을 공여하고 상업용으로 용도변경을 하여 그 부지에 백화점을 지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비리사건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삼풍백화점은 원래 아파트 근린상가건물을 짓도록 허가받았는데 삼풍그룹의 이준회장이 회사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백화점용도로 변경하였고 원래 설계상 4층 건물이었던 것을 5층으로 무리하게 구조변경을 한 것이 상품백화점 붕괴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4층 건물로 지어갔던 백화점건물에 1층을 더 얹으면 엄청난 하중 압력이 발생하게 되므로 철강지반을 더 많이 보강하는 등 건물을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준회장의 탐욕과 독주로 붕괴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는 시공사를 경질하고 자신의 건설사로 대체해서 무리하게 5층 건물로 구조변경을 했으며 이로인해 엄청난 하중의 압력이 건물완공 직후부터 발생하게 되었다.


부실시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군데에서 발견된다.

5층에 원래 롤로코스트장을 만들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준회장의 또한번의 과욕이 발동하게 되어서 온돌을 갖춘 음식점으로 또한번 용도 변경을 하게 되었고 5층 음식점의 무거운 온돌에서 가해지는 엄청난 하중이 4층 이하의 건물에 그대로 압력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옥상에 들어선 87톤 무게의 냉각탑 3대는 건물이 견뎌낼 수 있는 하중의 4배를 넘는 무게로 건물붕괴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백화점의 넓은 매장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건물의 하중을 견뎌내는 기둥들을 몇 개를 없애는 모험을 감행하였으며 기둥의 두께를 25%나 줄이는 무모한 시공을 일삼았다. 원래 설계 당시 32인치였던 기둥의 두께가 23인치로 축소되어 시공함으로써 이것 또한 건물의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기둥에 16개의 철근을 사용해야 함에도 8개의 철근만 사용하게 되어 이것이 건물 붕괴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삼풍백화점 붕괴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에 일어났는데 이미 4월달부터 건물 붕괴가 부분적으로 진행되어왔다고 한다.

4월에 삼풍백화점 5층 천정의 일부에서 균열이 발생하였으며 5월에는 균열의 범위가 더 많이 확대되었는데 이때 삼풍백화점의 붕괴의 전조가 나타났기 때문에 백화점건물 전체를 페쇄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준회장의 돈에 대한 끊없는 탐욕으로 인해서 토목공학자의 ‘건물붕괴의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간단한 보강작업으로 대충 때워넘겼던 것이다.

한 기업가의 돈에 대한 끊없는 탐욕이 한달도 안되어 1,500여명의 죄없는 일반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장애자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서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붕괴 5시간, 5층에서 큰 파열음이 몇 차례 들려옴과 동시에 백화점건물의 균열들은 더욱 심각해져갔다. 이당시 옥상의 균열은 이미 10cm나 벌어진 상태였다.

오후 5시경, 4층의 천장이 가라앉기 시작했는데 직원들은 4층만을 폐쇄한 채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가 삼풍백화점 붕괴되기 52분 전으로 삼풍백화점 측에서 고객들과 직원들을 밖으로 대피시켰다면 인명피해 만큼은 발생하지 않았었을 텐데, 백화점의 이미지를 고려한 기업주가 또다시 과욕을 부려서 수많은 고객들과 직원들을 백화점 안에 묶어두고 말았다.


붕괴사고 발생하기 7분 전인 오후 5시 50분경, 건물이 붕괴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이 때가 돼서야 백화점측에서는 비상벨을 울리고 고객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곧이어 백화점 건물 옥상이 무너졌고 그 뒤로 도미노현상처럼 4층, 3층, 지하까지 연쇄적으로 건물 전체의 천정이 삽시간에 무너져내렸고 백화점 안에 있던 고객들과 직원 1,500명이 순식간에 매몰되고 말았다.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 A동 옥상부터 붕괴되기 시작한 후 20초도 안되어서 지하 4층까지 모든 천장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백화점안에 있는 고객들과 직원들 대부분이 빠져나올 틈도 없이 건물잔해속으로 매몰되었으며 501명의 사망자와 6명의 실종자, 그리고 937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최악의 참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건물붕괴의 전조현상이 이미 4월 달부터 발생하였고 5월 달에 천정의 여러곳에서 균열이 있었으며 사고 발생 당일, 사고시간 1시간 전에도 천장의 일부가 가라앉았는데도 사람들을 전혀 대피시키지 않은 기업주의 극악한 행태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돈독에 눈이 먼 기업주들의 탐욕의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서도 반성 하나 제대로 하지않은 이러한 사람들은 왜, 도대체 무슨 이유로 지구상에 태어났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러한 악덕 기업주 한두 명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506여명의 소중한 생명들을 살릴 수 있었기에 말이다.


무리한 불법 설계구조 변경과 부실시공, 부실관리로 인해 1,500명의 사상자를 낸 삼풍그룹 이준회장은 교도소에서 7년을 복역한 후 출소했는데 지병인 당뇨병으로 출소한 지 6개월 만에 사망했다고 하며 부실시공에 공동책임이 있는 그 아들 이한상사장도 같이 출소해서 지금은 몽골에서 선교사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 우리에게 엄청난 감동을 준 희소식도 존재한다.

생명의 소중함과 존엄성을 우리에게 뼈저리게 각인시켜줌으로써 일생일대의 큰 감동을 선사했던 삼풍백화점 생존자 세 명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세 명의 생존자들은 기적같이 매몰된 지 10일 이상을 버티어 살아남아 생명의 소중함과 경외심을 느끼게 해준다.

남성 최명석씨(당시 20세)는 붕괴된 건물더미에 매몰된 지 11만에 구조되었고 여성 유지환씨(당시18세)는 매몰된 지 13일만에 구조되었으며 여성 박승현씨(당시 19세)는 매몰된 지 17일 만에 구조되는 기적과 같은 일이 발생했다. 모두다 10대로 삼풍백화점 직원들이었다.

특히 박승현씨는 백화점 붕괴로 지하의 어두운 건물더미 아래 매몰되어서 17일간을 버텨내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로 기적 이외에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17일간 부상당한 몸으로 건물더미 아래 깔려 전혀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 칠흑같이 어두운 암흑 속에서 배고픔과 공포, 절망감에도 정신을 놓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는 강인함을 보여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물, 바로 물이었다. 지상에서 구조대가 작업하는 과정에서 소방호스를 계속 쏘았는데 그 소방호수의 물이 매몰된 지하현장까지 내려갔고 그렇게 떨어진 물을 조금씩 마셔가며 박승현씨는 17일간을 버텨냈다고 한다. 물도 물이지만 그녀의 끈질긴 생명력과 의지가 그녀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삼풍백화점 붕괴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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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군산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사고와 침몰원인, 사망자수, 실종자수




4월 16일 진도앞바다에서 발생한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로 300여명의 사망자 및 실종자를 낳은 선박대형 참사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는데 과거에도 이와 유사한 여객선 침몰사고가 1993년에 발생하여 수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적이 있었다.

바로 1993년에 발생한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가 그것으로 그당시 사망자수가 292명으로 ‘세월호’에 버금가는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여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대형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93년 위도 앞바다에서 쓰러지고 있는 서해훼리호 여객선 사진


그런데 이번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나 93년에 발생했던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몇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두 선박사고 모두 300여명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낳았다는 점과 그리고 자연재해라기 보다는 ‘인재’로서 발생한 대형참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즉, 선장이나 승무원의 운전조작과 선박회사의 안전관리가 부실했기 때문에 발생한 선박사고라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호에서도 항해사의 급격한 변침(선박 우회전)이 침몰사고의 한 원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해 훼리호의 침몰사고도 당시 기상조건이 나쁜 상황에서 항해사의 무리한 키조작이 침몰사고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서해 훼리호 여객선은 (주)군산서해훼리 여객선회사 소속으로 90년 건조되었고 전북 부안군 위도에서 육지로 왕복 운항하는 정기 여객선으로 위도섬에 있는 주민들을 육지로 실어나르는 해상교통 전용선박이었다.

서해훼리호는 초기에는 주로 섬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운항하였기에 하루 1회 운항으로도 승객이 적어 수익이 낮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국가보조금까지 받고 운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도가 낚시명소로 소문이 나면서 수많은 낚시애호가들이 전국에서 몰려들게 되는 바람에 서해 훼리호는 호황을 맞게 되었고 승선 수요가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승선인원의 수요초과가 발생하자 하루 1회 왕복 운항하는 서해훼리호 측에서는 증편을 요구하였지만 당국에서는 증편을 거절하였고 결국 서해 훼리호측에서는 무리하게 많은 인원을 여객선에 승선시켜서 운항했던 것이다.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의 첫 번째 원인으로 지목되는 무리한 초과승선이 발생하는 단초를 낳은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서해훼리호는 무려 89회나 초과승선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93년 10월 10일 9시 45분경,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당시 서해 훼리호는 정원 221명보다 141명이나 많은 초과인원을 무리하게 승선시킨 것이 여객선이 침몰한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110톤 밖에 안되는 작은 여객선에 141명이나 초과 승선시켰으며 또한 당시 위도 섬주민들의 젓갈 등 하중이 많이 나가는 해산물등을 배 앞부분에 집중 선적시킴으로서 당시 거센 강풍과 높은 파도를 만나 여객선이 중심을 잃고 뒤집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서해 훼리호 출항 당시 초당 10~14m의 강풍이 불었고 2~3m에 이르는 높은 파도가 치는 등 항해하기에는 기상상태가 악조건이었는데 불구하고 무리하게 운항시킨 것도 침몰사고의 또다른 원인으로 꼽고 있다.

서해 훼리 여객선회사의 지나친 수익추구로 인해서 선박이 운항하기 곤란한 악천후의 기상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출항한 점과 그리고 정원을 초과한 무리한 운항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여객선 침몰사고를 불러일으켰다.



또 한가지 원인으로는 서해훼리호가 출항 당시 항해사가 휴가중이라서 갑판장이 대신 항해를 맡았다고 하며 선장 또한 미숙한 운항관리로 인해 참사를 더 키웠다는 것이다. 전문 직종인 항해사를 단순히 갑판관리나 하는 갑판장이 대신 맡아 항해를 했다는 것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또한 강풍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악천후 상황에서 작은 여객선에 정원을 141명이나 초과해서 운항했으며 높은 파고가 밀려오자 무리한 키조작으로 배는 순간 기우둥거리며 옆으로 넘어져 버렸고 넘어진 배위로 바닷물이 급격하게 밀려들어왔다.


긴급한 상황에서 중요한 구명장비는 제대로 동작조차 하지 않았고 사고 직후 위급상황임을 알린 사람도 없었으며 구조 요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인명피해를 더욱 키운 원인이 되었다.


여객선은 옆으로 쓰러졌고 바닷물의 급격한 침투로 인해 미처 피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가거나 잠기게 되어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서해훼리호는 탑승객 총 362명 중 무려 292명이 사망하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서해 훼리호 침몰당시 선장은 승객들을 구조하려고 조타실에 들어가 구조요청을 하던 중 사망하여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승객을 구조하려 했던 ‘의로운 선장’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가 난 후 21년 뒤인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하는 여객선 참사가 또다시 발생했는데 선장은 승객들을 구조하지도 않고 제일 먼저 사고 여격선에서 탈출하는 일이 일어나서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고 있는데 서해 훼리호 침몰 당시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조타실에 끝까지 남아 분투히디기 사망한 서해 훼리호 선장과 너무도 비교되는 부분이다.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는 여객선회사의 안전관리 불감증과 관리부실이 부른 대형참사로 손꼽히는 사건이며 결국 군산서해훼리 상무가 선박안전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 이후에 이 항로의 여객선 운항횟수가 크게 증가했다. 사고 직후부턴 비록 카페리호가 투입됐지만 하루 왕복 2회로 증편되었다가 현재는 평일 왕복 6회, 주말에는 왕복 8회로 운항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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